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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55화 (55/100)

55화

장미 정원

“아주 뚫어지겠군.”

다시 내 곁으로 돌아온 올렌도가 르나르를 보는 내게 씹어뱉듯 말했다.

올렌도는 여전히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럼에도 어느 정도 정신은 차린 건지 태도가 고요했다.

귀족들은 이 예상치 못한 상황을 비교적 쉽게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어차피 올렌도의 얼굴도 오늘 처음 봤기 때문에, 또 다른 황자가 있단 것도 받아들이기 쉬운 모양이었다.

“…저 자식이 살아 돌아온 걸 보니 좋아? 좋아 죽겠어?”

올렌도가 내 허리를 붙잡고 내 귀에 속삭였다.

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르나르가 날 배신한 것이라도 그가 살아 돌아온 건… 난 좋아….’

올렌도가 그런 내가 질린다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그때, 눈에 띄는 상체를 지닌 이국적 외모의 여인이 올렌도와 내 쪽으로 다가섰다.

“황자님…? 황자님이셨다니요…! 저 기억하세요? 제가 그레이시아나 제국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저희 이 궁에서 만났었잖아요. 전 그때 황자님께서… 황실 기사인 줄만 알았지만….”

여인이 얼굴을 붉혔다.

올렌도와 과거가 있는 여인인 모양이었다.

“아, 왕녀. 대공녀, 소개하지. 에스틸리아 왕국의 이벨리아 왕녀.”

억양이 특이하더니 꽤 먼 왕국에서 온 왕녀였다.

왕녀가 별안간 날 훑었다.

꽤 혐오하는 것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곧… 약혼하신단 얘긴 이곳 귀족들을 통해 들었습니다. 그 시절엔 제게 결혼하자 말씀하셔 놓고. 역시 황자님이시라 정해주는 약혼을 하실 수밖에 없으셨을까요? 전 사실 오늘 이곳까지… 황자님을 뵈러 온 건데. 예전에 제게 하신 약속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처연한 얼굴을 건 왕녀가 말했다.

올렌도의 예비 약혼녀인 내 앞에서 그와의 결혼을 운운하는 것치고 꽤 당당한 모양새였다.

왕녀들이란 다 저런 걸까?

아무렴 상관없다고 생각한 내가 다시 르나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터넛 곁에 꼿꼿이 선 그를 보며 다시 한번 마음이 저미어 오는데, 좀 더 날카로워진 이벨리아 왕녀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닿았다.

“황자님의 첫 춤을 제게 양보하시죠, 대공녀님. 어차피 정략결혼일 텐데. 그 정도쯤은 해줄 수 있잖아요?”

너무도 당연히 정략결혼일 거로 생각하는 왕녀가 우스웠다.

하지만 날을 세울 것도 없어 보였다.

현실은 정략결혼보다 못한 사이일 테니.

날 마차에 짐짝 던지듯 밀어 넣던 올렌도를 내가 다시 떠올리는데,

“가도 되나?”

올렌도가 내게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올렌도 미간이 좁아졌다.

“정말 가도 상관없다고? 약혼녀인 널 두고 내가 다른 여자와 첫 춤을 추면, 네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될 텐데?”

“황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전 상관없으니.”

“상관없다고? 하, 넌 항상 이런 식이지.”

“…….”

“…젠장.”

올렌도가 밀어내듯 날 놓고 이벨리아 공주를 에스코트하며 내게서 멀어졌다.

루비홀을 가득 채운 귀족들의 웅성거림이 심해졌다.

“두 사람, 사실 사이가 좋지 않은 걸까요?”

“외국인이 황후가 되는 것도 가능한 겁니까?”

“올렌도 황자님, 아무리 그래도 첫 춤은… 대공녀 체면이 말이 아닐 텐데….”

“이거 코웰 대공이 우스워졌는데요.”

나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상관없었다.

하지만 대공이 거론되자 나는 기분이 급격하게 불쾌해졌다.

그때,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이 귀족들의 수군거림을 일순간 정적으로 바꿔버렸다.

“…코웰 대공녀, 당신과 춤출 수 있는 영광을 제게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르나르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 * *

갑작스러운 정적을 기이하게 느낀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지휘를 멈추자 홀을 가득 채운 음악 소리가 멎어 들었다.

화려한 무도회장을 깊은 고요가 감쌌다.

의아함으로 얼굴을 물들인 올렌도가 이벨리아와의 춤을 멈추고 사위를 두리번대다 엘로즈와 르나르를 발견했다.

때마침 엘로즈의 시선이 올렌도를 향했다.

이벨리아 왕녀의 손을 이미 뿌리친 올렌도는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때, 그녀를 향한 르나르의 갈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엘로즈, 날 봐.”

엘로즈가 르나르를 봤다.

그녀를 보는 적갈색 눈동자가 집요했다.

“내가 여기 있는데 넌 어딜 보는 거야. 네가 딴 남자 보는 거 싫어. 내가 앞에 있을 땐 나만 봐.”

그의 목소리는 꼭 짐승의 것 같았다.

화가 난 듯도 했고 자괴감이 섞인 듯도 했다.

르나르는 사실 엘로즈가 미웠다.

잠시 자리를 비운 새 올렌도 곁으로 가버린 엘로즈가.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체면이 상하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이 세상 누가 뭐래도 그녀는 그의 여왕님이었으니.

“…춤.”

“…….”

“추실 거죠…?”

“…….”

“제게 가르쳐 주셨잖아요. 춤추는 법.”

엘로즈는 르나르의 손을 쉽게 잡을 수가 없었다.

배신한 르나르가 아니었던가?

그녀는 혼란스러워졌다.

엘로즈의 망설임이 길어지자 르나르가 자조적 분위기 짙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두 눈을 부드럽게 휘며 이내 웃었다.

“절 애태우시는 건 여전하시네요. 보고 싶었습니다.”

흑발이 살짝 흘러내린 붉은 기운 강한 눈동자가 물기를 머금은 듯 일렁였다.

엘로즈와 르나르 위로 크리스털 샹들리에를 통과한 선연한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제게 춤을 가르쳐 주신 날 기억하십니까?”

엘로즈에게 묻는 르나르는 어느새 그녀의 손을 잡고 이끌고 있었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두 사람 모습에 지켜보던 이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 숨을 멈추었다.

르나르는 별빛이 맺혀 반짝이는 크리스털 샹들리에 아래에서 멈춰 섰다.

“오늘은 제가 리드하겠습니다.”

그가 그녀의 앞으로 한 발 짝 다가섰다.

단단한 그의 손이 얇은 그녀의 허리 위에 닿는 것을 느끼며 엘로즈가 숨을 들이마셨다.

고즈넉한 가을밤의 달콤한 왈츠 선율이 다시금 무도회장을 채워나갔다.

“두 사람… 정말 아름답네요….”

“잘 어울려요.”

“어쩜 저렇게 호흡이 잘 맞을까요?”

“한 쌍의 나비 같아요.”

두 사람에게 홀린 귀족들이 한 마디씩 말을 더했다.

이내 춤이 끝났을 때, 멈춰선 엘로즈는 르나르를 빤히 봤다.

그녀의 입이 벙긋거렸다.

르나르에게 묻고 싶은 게 많다는 듯.

하지만 르나르는 몸을 돌렸다.

그녀가 뱉을 말이 문득 두려워졌기 때문이었다.

“르나…!”

엘로즈가 가까스로 그의 이름 일부를 입 밖에 냈을 때, 르나르는 이미 터넛에게 돌아가 있었다.

“대공녀가 아직 널 보고 있는데?”

르나르와 엘로즈를 번갈아 보며 터넛이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조용히 하십시오. 적당히 존대해드릴 때.”

르나르가 그런 터넛에게 으르렁댔다.

하지만 터넛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르나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대공녀를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할까 싶은데.”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제야 르나르의 시선이 터넛을 향했다.

터넛이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말 그대로야. 나야 코웰 가문 막내딸을 며느리로 맞고 싶은 게 전부일 뿐이니 내 아들 중 누구와 결혼시켜도 상관없지. 하지만 대공녀는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게 행복하지 않겠어?”

“…….”

“에드워드의 막내딸이잖아. 나는 에드워드 코웰 대공의 막내딸이 행복해지길 바란다고.”

“지금 그 말씀은… 엘로즈가 올렌도가 아닌 절 좋아한다면 폐하께서 직접 올렌도와 엘로즈를 파혼시켜 주시겠단 말씀입니까?”

“못할 것도 없지.”

“…….”

“단, 대공녀가 올렌도가 아닌 널 좋아한다고 증명만 할 수 있다면.”

터넛이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르나르의 적갈색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그를 움직인 건 자신감이 아닌 오기였다.

‘만약 엘로즈가 올렌도를 좋아하게 된 것이라도….’

“엘로즈는 저를 좋아합니다.”

표정을 가다듬은 르나르가 날카롭게 말했다.

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무표정했고 무감해 보였다.

“보여드리죠.”

하지만 오만해 보일 정도로 당당한 그의 태도에 터넛이 기대된다는 듯 너그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 * *

“그새 르나르와 춤을 춰? 쥐 새끼같이….”

어느새 내 곁에 다가온 올렌도가 날 두고 험한 말을 했다.

위험을 느낀 내가 나도 모르게 르나르를 찾았다.

내 시선이 본능적으로 르나르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터넛 곁에도, 무도회장 어디에도 르나르가 보이지 않았다.

머리칼이 쭈뼛 서는 것 같은 감각을 느끼는데 올렌도가 그런 날 비웃으며 말했다.

“하, 내가 그 녀석이 날 보는지 확인하지도 않고 널 보러 왔을 것 같아?”

“…….”

“…….”

올렌도와 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스스로가 한 말에 자괴감이 든 듯 올렌도는 짧은 욕설을 내뱉더니 얼굴을 붉히고 내게서 멀어졌다.

올렌도가 귀족들 사이로 사라진 뒤 나는 쫓기듯 무도회장 밖으로 나왔다.

어디로 가야 할진 몰랐다.

그래도 일단은 올렌도를 피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르나르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올렌도는 내게 위험했다.

그때, 달리기 시작한 날 시종 하나가 급하게 붙잡았다.

“대공녀님! 대공녀님! 코웰 대공녀님…!!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갑작스러운 부름에 당황한 내가 우뚝 멈추어 섰다.

순식간에 내 앞까지 달려온 시종이 폐가 아픈 듯 가슴을 움켜잡고 헉헉 숨을 내쉬었다.

“잠시만요. 잠시만요, 대공녀님. 하- 하- 이거 받아 가세요.”

시종 내게 장미 한 송이를 내밀었다.

작은 쪽지가 매달린 다홍색 장미였다.

내가 장미를 받자 주변을 빠르게 둘러본 시종이 한껏 작아진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르나르 황자님께서 보내셨습니다.”

‘르나르 황자님….’

르나르에게 붙은 황자란 호칭이 새삼 어색해 내가 눈을 깜빡였다.

내가 쪽지를 봤다.

쪽지엔 정갈한 글씨체로 딱 한 줄이 적혀 있었다.

[붉은 장미 정원으로.]

같이 공부한 적 있어 알고 있는 분명한 르나르의 글씨였다.

“…붉은 장미 정원이 어느 쪽이죠?”

내가 묻자 시종이 앞장섰다.

“가시죠. 혼자서는 찾기 어려우실 테니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내가 시종을 따라 르나르가 있다는 장미 정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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