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무도회
그 순간, 내 뒤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대, 대공녀님…! 황자님을 뵈러 오신 겁니까…?!”
올렌도의 기사 중 하나였다.
기사의 목소리는 작지 않았다.
내가 여기 있단 것을 올렌도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처럼.
기사의 잔꾀가 통한 건지 집무실 안쪽의 대화 소리가 뚝 멈췄다.
하지만 ‘그동안 보낸 자객’이란 말을 듣고 올렌도가 무슨 일을 벌인 건지 예상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내가 그대로 문을 열고 올렌도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파면이라면서요. 그래놓고 르나르한테 자객을 붙이셨어요?”
“대공녀한테 남의 얘길 엿듣는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군. 쥐새끼도 아니고.”
“대답하세요, 붙였냐고요…!”
소리치는 나를 보며 올렌도가 침묵했다.
감정이 격해진 내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무사…한 거죠…? 르나르는 무사한 거죠?”
“…….”
“르나르가…, 당할 리가 없으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야 당연히….”
“그동안 르나르에게…, 무슨 소식이라도 들은 게 있었나?”
“…….”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됐다.
눈앞이 희뿌예졌다.
‘설마 자객에게 당한 건….’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당신 말…. 안 믿어….”
“안 믿는다면 왜 우는 거지?”
“…….”
정말이었다.
나도 몰랐던 새, 내 양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 줄기들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울지 마. 그놈이 죽었다고 내 앞에서 우는 거 정말 짜증나니까.”
뇌까리는 올렌도를 내가 힘껏 노려봤다.
그러자 올렌도가 내 손목을 붙잡더니 집무실 밖으로 거칠게 끌어내기 시작했다.
“놔…! 이거 안 놔?!”
올렌도는 그대로 날 마차까지 날 끌고 갔다.
그러곤 마차 안으로 날 밀어 넣은 다음, 자신이 탄 뒤 마차 문을 닫았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출발해!”
올렌도가 마차 벽을 두드리며 마부에게 명령했다.
“황자님!!”
“입 다물어!! 그 작은 입에 험한 걸 물고 싶지 않으면!!”
올렌도가 하얗게 드러난 내 목을 그러쥐었고 그다음 순간 덜컹거리며 마차가 출발했다.
“…미안해. 아프게 할 생각은 없었어.”
그가 쥐었던 내 손목과 목 부분을 곁눈질하며 올렌도가 내게 사과했다.
나는 대답 없이 고갤 돌리며 창밖으로 고정한 시선만 깜빡였다.
올렌도는 그 이상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마차 안엔 침묵이 내려앉았다.
고요한 마차 안에서, 난 르나르만을 생각했다.
‘르나르는…, 살아있을까…?’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르나르는 강하니까.
르나르는 뛰어나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눈물은 속수무책으로 차올랐다.
‘편지 한 통만 보내주지. 그럼…. 내가 안심할 수 있었을 텐데….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으면서…….’
눈을 감자 뜨거운 눈물은 차가운 볼을 타고 흘렀다.
* * *
무도회가 열린 루비 홀은 화려한 옷차림의 고위 귀족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오늘은 올렌도 황자의 얼굴이 처음 공개되는 날이었기 때문에, 황실에서 초대장을 받은 가문이라면 빠짐없이 참석한 것 같았다.
우리 가문 사람들만 제외하고.
나는 표정을 관리했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가족들에게 부탁해 르나르의 행방을 알아볼 생각이었지만, 그것도 일단 무도회가 끝난 후의 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올렌도가 내 허리를 감싸 날 그의 쪽으로 다가서게 했기 때문이었다.
허리를 숙인 그가 내 귀에 속삭였다.
“너는 나와 결혼할 여자잖아. 네 본분을 다해야지.”
“르나르에게 자객을 보낸 황자님과 제가 결혼할 것으로 생각하세요?”
“안 하면? 네가 날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
올렌도와 내가 서로에게 작게 속삭이며 날을 세우는데, 주변에서 귀족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주변에 호위가 저렇게 많은 걸 보면…. 저분이 올렌도 황자님이신 걸까요…?”
“옆엔 코웰 대공녀가 맞는 것 같아요. 코웰 대공녀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백발 같은 은발을 가지고 있다고 들은 적이 있어요.”
“두 사람이 사이가 정말 좋나 보네요.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저렇게 딱 붙어있는 걸 보면.”
내가 신경질적으로 올렌도의 곁을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올렌도는 더 정제된 미소를 걸치고 강한 힘으로 날 붙잡아왔다.
싫은 걸 드러내는데 한계가 있던 내가 점점 지쳐가던 차,
“황제 폐하 납시오!”
기대를 북돋는 외침이 화려한 루비 홀을 가득 메웠다.
이내 터넛 황제가 등장하자 올렌도와 나를 주시하던 귀족들의 시선들이 황제에게로 쏠렸다.
짙은 붉은 색 커튼 뒤에서 나타난 황제는 계단 끝 단상에 올라 그곳에 마련된 황좌에 앉았다.
그런데 그런 황제의 뒤를 그와 같은 머리 색을 가진 누군가가 따르고 있었다.
붉은색 제복 위에 검은 망토를 두른 키가 큰 남자.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내 눈이 커졌다.
‘르…, 르나르…!’
나는 숨을 멈추게 됐다.
처음 느낀 감정은 반가움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반가움.
‘살아…, 역시 살아있었어….’
그런데 그 마음이 지나가고 나니 작은 의문이 생겨났다.
‘…왜지? 왜 연락을 하지 않은 거지? 저렇게 멀쩡히 살아있었으면서….’
순간, 르나르가 고개를 돌렸다.
그를 보고 있던 내 시선과 그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부딪혔다.
르나르가 서늘한 표정으로 날 응시했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 * *
르나르가 엘로즈 쪽을 봤다.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과 함께 엘로즈의 허리 위에 자리한 올렌도의 손이 르나르의 신경을 긁어댔다.
르나르가 어젯밤 일을 떠올렸다.
「그 눈. 정말 엘리를 닮았구나.」
「닥쳐. 어머니 이름 부르지 마.」
「네 흑발은 날 닮았고. 아니지, 엘리도 나와 꼭 같은 흑발을 가졌었으니. 우린 참 잘 어울렸을 거야. 함께 할 수만 있었다면….」
「하. 내가 왜 이런 개소리를 듣고 있어 줘야 하는 거지?」
르나르를 황자로 만들어주겠다는 터넛은 그 뒤로 르나르가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
엘리와 르나르에 관한 시답지 않은 소리들을 늘어놓으며.
터넛과의 협상만 끝나면 바로 엘로즈를 찾아가려 했던 르나르는 아이처럼 매달리는 터넛 때문에 발이 묶이게 됐다.
물론 외면하고 가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원하면 언제든 떠날 수 있다고 르나르는 생각했다.
하지만 터넛이 너무도 쉽게 황자의 자리를 내어주겠다고 한 것이, 르나르는 석연치가 않았다.
‘팔 하나 정돈 잘라야 할 줄 알았는데….’
터넛이 제국 귀족들에게 르나르의 존재를 공표하겠다고 한 것이 바로 다음 날 열릴 무도회.
르나르는 그전까지만 터넛의 곁에 머물기로 했다.
그가 허튼짓을 할 수 없게 감시하기 위해.
터넛은 그저 르나르가 그의 곁에 머무는 것이 만족스러운 듯했지만.
「알렌. 마법 전서조 종이를 가져와.」
르나르는 엘로즈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당신을 다시 볼 수 있으려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것 같다고 전하기 위해.
그레이시아나 제국에 도착했다는 내용은 이미 편지로 보내놓았으니, 약간의 지체는 엘로즈도 허락해줄 것 같았다.
그때, 터넛 황제가 르나르에게 물었었다.
「코웰 대공에게 쓰려는 건가? 편지?」
「알 거 없어.」
「그나저나 네가 황태자까지 될 생각이 있는 거면 어쩌지? 나는 코웰 대공녀를 며느리로 맞고 싶은데. 대공녀는 올렌도에게 사랑에 빠졌으니….」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엘로즈는 올렌도를 사랑하지 않아.」
「두 사람이 저택에서 함께 지내며 가까워졌어.」
「두 사람은 저택에서 함께 지내지 않았어. 엘로즈와는 내가….」
「그럴 리가. 내가 최근 첩자를 보내 알아봤을 때만 해도 대공녀는 올렌도와 함께 지내고 있었는데? 두 사람 사이가 꽤 가까워진 것 같아 내가 궁금해져 더 알아봤지.」
「…….」
「거짓말이 아니란 것에 내 목을 걸 수 있어.」
「……알렌, 다녀와.」
르나르가 짧게 알렌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올렌도의 저택을 염탐하고 돌아온 알렌의 낯빛은 어두웠다.
「로즈가 정말……. 올렌도와 함께 지내고 있어?」
「……네.」
「잘… 지내고 있어…?」
「거기까진 잘 모르겠지만….」
잘 지내고 있을 것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다면 르나르가 그 저택에 엘로즈가 있는지조차 몰랐을 정도로 조용하진 않았을 테니.
「거봐, 내가 뭐라 그랬어. 대공녀는 올렌도를 사랑한다니까?」
터넛이 잔인하게 웃으며 르나르 신경을 긁어놓았다.
르나르는 차마 진실을 더 확인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혹시 정말 엘로즈가 올렌도와 사랑에 빠진 것일까 봐.
‘내가 너를 사랑하는데.’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엘로즈를 보고 망설임 없이 몸을 던졌을 때, 르나르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녀를 사랑한다고.
마법사의 맹세를 할 때까지만 해도 르나르는, 스스로가 엘로즈의 신뢰를 얻고 싶어 조금 무리하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엘로즈의 신뢰는 곧 코웰 가문의 신뢰였으니까.
올렌도와의 파혼은 어차피 해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레이시아나 황실을 전복시키면.
단지 그뿐인 줄만 알았다.
스스로가 올렌도와 엘로즈의 파혼을 원했던 줄도 모르고.
엘로즈에 대한 그의 집착은 악몽 때문, 흉터 때문이라 착각한 채.
하지만 르나르는 이제 알았다.
어렸을 적 엘로즈를 처음 보자마자 그가 사랑에 빠졌던 것처럼, 사실 엘로즈를 다시 만나게 된 이후 그는 바로 다시 사랑에 빠졌었다고.
멍청한 자신만 그 사실을 미처 몰랐었다고.
그런데 올렌도와 엘로즈가 무도회장에 함께 나타났다.
다정하게 붙어선 채.
르나르는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고 심장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차마 엘로즈를 더 볼 수 없었던 르나르가 시선을 돌렸다.
그저 막막했다.
복수를 잊었었다.
엘로즈 곁에 머물며 사실 르나르는 그랬다.
그랬던 그가 다시 황자가 되고 싶어진 건 황자 자리를 특별하게 여기는 엘로즈를 보고 나서였다.
그래서 대공에게 이야기하려 했다.
황자가 되게 해달라고.
귀족들 사이에서 그의 존재를 공론화해달라고.
그가 후에 황자가 되면, 뒤에서 코웰 가문의 반란을 돕겠다고.
그런데 의외로 대공이 그에게 먼저 제안했다.
「황자가 될 생각이 있습니까? 방법이 있을 듯한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엘로즈를 잠시 떠나있어야 한다는 게 문제였지만.
한 달은 짧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긴 시간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사이 마음이 변할 줄이야…….’
아니, 넌 날 사랑했던 적은 있었던가?
생각해보니 없는 듯했다.
늘 안달 난 그가 그녀의 품을 갈구했을 뿐.
‘너에게 특별해지고 싶어 황자가 되었는데. 네가 날 좋아하지 않으면….’
그럼 난 어찌해야 하나.
이정표를 잃은 르나르가 흔들리는 시야를 잠재우려 눈을 감았다.
* * *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께선 알고 계실 겁니다. 오늘 이 자리가, 제 아들 올렌도를 여러분께 소개하는 자리라는 걸요. 올렌도, 이리 올라오너라.”
터넛 황제가 계단 아래 올렌도를 향해 손짓했다.
갑작스러운 르나르의 등장에 뻣뻣하게 굳어버린 올렌도는 반쯤 정신을 놓은 채 단상을 향해 걸음을 디뎠다.
터넛이 태연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는 이 자리에서, 제 또 다른 아들을 여러분께 공개하려고 합니다.”
장내가 술렁였다.
“또 다른 아들?”
“황제 폐하께 아들이 한 명 더 있었다는 거야, 지금?”
“설마 저 흑발 청년이….”
“그러고 보니 황제 폐하와 머리색이…!”
무도회장 내부 귀족들의 시선이 모두 르나르에게로 쏠렸다.
올렌도의 얼굴은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처참하게 구겨졌다.
나는 그 밖의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완벽하게 황자가 되어 돌아온 르나르가 날 배신했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 근거가 없었다.
나는 여전히 믿고 싶은 르나르를 향한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