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안녕, 아버지?
“집사 더글라스와 대공녀가 연인 관계라는 황당한 소문은 대체 어디서부터 퍼진 거지?”
“하지만 황자님, 더글라스가 밤마다 대공녀 방에 드나든단 소문이 분명 하녀들 사이에 파다하게….”
“내 선물을 만들고 있던 거잖아! 나한테 줄 선물을 몰래 만들고 있었다고!”
버럭 소리치는 올렌도에 기사가 움찔 몸을 움츠렸다.
“소문이 어떻게 시작된 건지 알아 와. 지금 당장.”
“네, 황자님…!”
기사들 여럿이 저택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범인은 빠르게 밝혀졌다.
소피아가 그녀의 편이 되었던 하녀 몇 명과 끌려와 올렌도 앞에 무릎 꿇려졌다.
그들은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화, 황자님 저는 모르는 일이에요. 저도 대공녀님과 집사님에 관해서는 소문만 들었을 뿐…! 소문을 낸 것은 저 하녀들….”
“뭐라고, 소피아?! 네가 이 소문을 내달라고 우리에게 부탁했잖아!! 네가 황후가 되면 네 덕을 톡톡히 보게 해주겠다면서!!”
엄한 황후 자리가 언급되자 올렌도가 어이없어 실소를 흘렸다.
“…내가 시킨 것도 아닌데 또 소문을 냈어? 널 어떻게 처리해 줘야 대공녀가 좋아할까? 응? 소피아.”
올렌도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소피아에게 물었다.
올렌도의 말을 들은 소피아는 심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 그래도 황자님. 제가 황자님의….”
“나의? 내가 나의 뭔데?”
“저, 저는 황자님의….”
그 무엇도 아니었다.
소피아의 초록색 눈동자에 투명한 눈물이 가득 들어찼다.
“그래도 한때는 나와 친밀했던 사이니 노예로까지는 만들지 않을게.”
“화, 황자님…!”
“여기 있는 하녀들. 전부 매질해서 저택에서 쫓아내. 다른 곳에도 취직 못 하게 하고.”
“황자님……!”
소피아가 울분에 가득 차 올렌도를 불렀지만 올렌도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슬쩍 내려다보고 말 뿐이었다.
소피아는 매질 당하게 될 것보다 일자리를 잃게 될 것보다, 그런 올렌도의 태도가 더 원망스러웠다.
* * *
“아가씨, 소피아가 저택에서 쫓겨났대요. 올렌도 황자님께서 직접 소문의 근원인 소피아를 찾아 쫓아내셨대요.”
“…그게 정말이야, 안나?”
아침부터 안나가 내게 전한 소식에 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안에 스며든 황금빛 가을볕에 안나의 갈색 머리칼이 반짝였다.
올렌도가 소피아를 쫓아낸 것은 기대 이상의 결과였다.
나는 그저 오해를 풀기 위해 계략을 썼을 뿐이었는데.
‘올렌도가 알아서 소피아 문제까지 해결해줬다니….’
몰래 들이닥친 것 때문에 미안하기라도 했던 걸까?
소피아를 쫓아낸 올렌도의 마음은 어떤 종류의 것인 걸까?
나는 어쩐지 심란해졌다.
“아, 그리고 아가씨! 올렌도 황자님께서 드레스를 보내셨어요. 내일이 무도회잖아요.”
안나가 들고 온 커다란 상자의 리본을 내 앞에서 풀었다.
상자 안엔 무척 아름다운 드레스가 들어있었다.
새하얀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티아라도 함께.
올렌도가 내게 드레스를 준비하지 말라고 했을 때만 해도 그에게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 건 아닌가 의심했었는데, 멀쩡한 드레스를 보니 딱히 나쁜 의도가 있던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드레스의 붉은 치맛자락을 보고 있자니 붉은 기운이 강한 르나르의 적갈색 눈동자가 생각났다.
‘르나르는 지금….’
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 걸까?
“저는 솔직히…. 올렌도 황자님도 조금 괜찮은 것 같아요.”
별안간 안나가 말했다.
“안나 양…?!”
안나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여태껏 조용하던 더글라스가 목소리를 높이며 티 나게 얼굴을 구겼다.
“아니, 그렇잖아요. 손가락이 전부 부러지기라도 한 게 아니면 왜 지금껏 편지 한 통이 없으시대요? 손가락이 부러져도 다른 사람 시키면 편지 한 통은 쓰겠다…!”
“그러는 안나 양은 바로 얼마 전까지 이 방 앞에서 들리던 소리를 잊은 겁니까?”
“……아?! 그건 그렇네요…. 봐요, 사람이! 과거를 이렇게 쉽게 잊는데! 이렇게 연락이 없으시면 대체 뭘 믿고 기다리라는 건지….”
안나의 중얼거림을 듣는 더글라스와 내 눈이 마주쳤다.
사실 우리 둘 다 마음속 깊은 곳엔 가지고 있을 것이었다.
르나르가 우릴 배신했을지 모르겠단 불안감.
물론 르나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가장 컸지만, 무슨 일이 생기기엔 그가 무척 강하단 걸 모르지 않았으니.
“대공 각하 덕에 황자가 되는 법을 알게 되셨다더니, 이제 알았으니 됐다 뭐 그런 거 아니에요? 혜택은 봤지만, 열매는 나누지 않겠다? 그런 게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연락이 없으신 건 대체….”
“안나. 조용히 해.”
평소 안나에게 말할 때와 다른 서늘한 내 목소리에 안나가 의아해져 나를 봤다.
그러다 굳은 내 표정을 보고 제 실언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아, 아가씨, 죄송해요. 제가 예쁜 드레스를 보고 맘이 혹해서 말을 너무 많이….”
돌아보니 더글라스의 노란색 눈동자가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그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는…, 저희 도련님을 믿습니다. 대공녀님께선요?”
더글라스가 나를 봤다.
“나도 같아요. 나도 르나르를 믿어요.”
내 대답에 더글라스가 희미하게 웃었다.
난 르나르를 믿고 싶었다.
설령 그것이 자신을 속이는 일이 될지도.
* * *
“안녕, 아버지?”
터넛의 턱 아래 장검을 들이민 르나르가 터넛에게 인사했다.
깊은 밤 어둠에 휩싸인 터넛의 방안에서 르나르의 장검이 희미한 달빛을 받아 시퍼렇게 빛났다.
“…왜 아버지라 불러도 놀라지 않는 거지?”
르나르가 터넛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원하는 게 뭐냐.”
“아버지, 나 황자가 되고 싶어. 날 올렌도와 대등한 위치의 황자로 만들어줘.”
“이제 와 왜. 올렌도의 호위 기사가 된 지도 벌써 5년은 더 되어 놓고.”
터넛이 말했다.
마치 르나르가 그의 아들인 걸 그때부터 알고 있었단 것처럼.
“…….”
“올렌도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 있었을 텐데.”
터넛의 매정한 말에 르나르의 미간이 험하게 접혔다.
“…내가 올렌도를 죽이기라도 바랐다는 거야?”
“…….”
“안타깝네. 내가 죽이고 싶었던 건 올렌도보다도 당신이라.”
“그럼 왜 진즉 죽이지 않았지?”
“때를 기다린 거지. 완벽하게 물어뜯을 수 있을 때.”
“늦었군. 나는 네가 좀 더 빨리 와주길 기대했었는데.”
“글쎄, 과연 늦었을까?”
르나르가 알렌에게 고갯짓했다.
알렌이 쓰러진 황제의 기사들을 넘고 나가 문밖에서 대사제를 끌고 들어왔다.
피와 멍으로 엉망이 된 대사제 몰골에 터넛 황제가 르나르를 만나게 된 후 처음으로 얼굴을 구겼다.
“…적당히 좀 손대지. 네가 누굴 데려온 건지 모르겠잖아.”
“모르겠으면 더 가까이 가서 봐.”
르나르가 터넛의 목덜미를 잡고 끌고 가 대사제 앞에 무릎 꿇렸다.
대사제를 코앞에서 마주하게 된 터넛이 눈을 가늘게 뜨고 골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놀라더니,
“……!”
갑자기 웃었다.
“으으…! 으하하하하하하하…!”
르나르가 기가 막혀 실소했다.
“웃지 마. 기분 나빠.”
“망국 플루토나 제국의 대사제를 데려왔구나. 이제 뭘 어쩔 거지?”
“날 황자로 만들어줘. 당신이 플루토나 제국에 무슨 짓을 했는지에 대해 입 다물어 줄 테니까.”
“내가 싫다면?”
“플루토나 제국민들에게 알릴 거야. 당신이 마녀와 마법사들의 반란을 뒤에서 지원하고 선동했다는 것. 그래놓고 반란에 성공한 반란군 리더를 직접 죽였다는 것.
그래서 생긴 혼란을 핑계로 반란군을 진압하며, 플루토나 제국을 점령했다는 것. 그렇게 플루토나 제국은 제 땅덩이보다 작은 그레이시아나 제국의 속국이 되었다는 것. 전부.”
“…….”
“플루토나 제국민들이 내 말은 안 믿어도 대사제 말은 믿겠지. 근데 믿게 되면 가만히 있을까? 가뜩이나 지금도 독립시켜 달라고 난린데? 게다가 애국심 불태우기도 좋지. 겨우 40여 년 전 칭제한 그레이시아나 제국 황제의 계략에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모국이 통째로 무너진 건데. 어때? 그냥 날 황자로 만들고 입 다물게 하는 게 당신에게도 이득이 아닐까?”
터넛이 르나르를 봤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터넛의 표정은 모호했다.
“코웰 대공을 네 편으로 만든 것이냐? 대사제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는 건 나와 대공밖에 없는데.”
“그건 당신이 알 거 없고.”
“대공을 네 편으로 만들다니 그것 하나는 정말 마음에 드는구나. 여기까지는 저 작은 소년과 둘만 온 거고? 너는 실력이 어느 정도인 거지? 내 분명 호위를 심심치 않게 배치해두었는데….”
“…….”
“짐작하긴 했지. 네 녀석이 진짜 실력을 숨기고 있는 것 같다고. 답답했다고. 네 녀석을 황자로 만들어주고 싶어도 네 녀석이 영 욕심을 내고 달려들질 않았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
“이제야 온 게 안타깝지만, 이제라도 왔으니 환영해주마. 널 내 아들로 인정하겠다.”
* * *
소식 없는 르나르 생각을 곱씹으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나니 어느새 무도회 당일.
준비를 마친 후 저택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대기 중인 마차가 한 대였다.
“그러니까 이 마차를…. 황자 전하와 함께 타고 가라고…?”
내가 물음에 마차에서 발판을 내리던 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감했다.
마차가 작은 편이어서였다.
딱 두 사람이 타기 좋을 정도.
궁까지 가는 내내 이 작은 마차를 올렌도와 함께 타야 한다면 황궁에 도착하기도 전에 기력이 모두 소진될 것만 같았다.
“난 다른 마차를 타고 가겠어. 마차를 추가로 준비해줘.”
내가 하인에게 말했다.
그러자 하인이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 됐다.
“저, 대공녀님. 마차를 한 대만 준비하게 된 것은 사실…, 황자 전하의 직접적인 명령이 있었기에….”
올렌도의 직접적인 명령?
“……내가 직접 황자님께 말씀드려 보지.”
내가 발걸음을 돌려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날 챙겨줄 하녀도 같이 타야 한다고 설명하면, 올렌도와 다른 마차를 타야 할 충분한 변명거리 정도는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노크하기 위해 올렌도의 집무실에 다가서던 순간 안에서 익숙한 이름이 들렸다.
“르나르가…. 제국에 돌아….”
무슨 내용인진 제대로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이름 석 자만큼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르나르.’
르나르의 이름을 들었다고 확신한 내가 문 가까이 귀를 댔다.
뒤이어 올렌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동안 보낸 자객들은 대체….”
‘…자객들?’
내 얼굴이 사색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