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소문
[구름이 하얀 것을 보니 대공녀님 생각이 납니다. 저는 잘 있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저는 무사합니다. 다만 대공녀님이 보고 싶습니다. 많이 보고 싶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대공녀님이 보고 싶습니다.]
와륵-
르나르가 보낸 편지들을 읽던 올렌도가 편지를 구겼다.
공처럼 둥글어진 편지들은 이내 벽난로 불꽃 속으로 던져졌다.
르나르가 엘로즈에게 보내는 편지들엔 올렌도에게 의미 있을 만한 내용이 하나도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사실은 명확했는데, 그가 죽이라 명한 르나르가 무사히 살아있단 것이었다.
“그동안 걔 하나에 붙인 자객이 몇이야! 근데 왜 걔 하나를 못 죽여!”
올렌도가 책상을 주먹으로 때리며 인상을 구겼다.
책상 앞에 도열한 올렌도의 기사들이 불똥이 튈까 고개를 수그렸다.
르나르의 편지를 올렌도가 빼돌리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더글라스를 찾아 날아온 마법 전서조를, 올렌도가 우연히 붙잡게 된 게 시작이었다.
이후 올렌도는 그의 저택과 코웰 저택 근처를 나는 새를 모두 잡아들이라 명령 내렸다.
대신 잡는 걸 들키지 말고.
그렇게 르나르가 엘로즈와 더글라스에게 보낸 편지는 모두 올렌도의 손에 떨어지게 됐다.
내용이 부실한 게 크나큰 흠이었지만.
“이따위 쓸데없는 편지나 쓸 만큼 그 자식이 멀쩡히 살아있는 꼴을 내가 봐야 해?! 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올렌도가 던진 유리 조각상이 기사 중 한 명의 머리를 타격했다.
기사는 조각상에 맞아 찢어진 머리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올렌도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황자님. 자객을 더 보내겠습니다.”
“보내는 게 의미가 있어? 보낼 때마다 시체가 되어 돌아오는데! 네가 대신 가지 그래?!”
올렌도가 기사를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그는 말이 없었다.
사실 자객을 계속 보내는 게 의미 없는 짓이란 걸 올렌도 또한 이미 알고 있었다.
그의 기사들이 르나르는 절대 이길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해 본인들은 수도에 머물며 자객들만 줄창 고용해 보내고 있단 것도.
“그보다 황자님, 저택 하녀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하나 돌고 있습니다.”
기사 중 한 명이 그런 올렌도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용기 있게 입을 열었다.
“…소문?”
“그것이…. 대공녀와 집사 더글라스에 관한 소문인데….”
* * *
그날 밤.
달이 밝았다.
올렌도는 그 달의 빛을 피해 긴 복도의 어두운 구석에 숨었다.
잠시 후 반대쪽 복도 끝에서 더글라스가 나타났다.
더글라스가 노크하자 엘로즈의 방에서 그녀의 하녀가 나왔다.
더글라스가 엘로즈의 방으로 들어갔다.
하녀는 더글라스를 따라 들어가지 않고 마치 망을 보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올렌도는 이때 이미 확신했다.
저 방 안에서 분명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올렌도가 엘로즈의 방문 앞으로 다가섰다.
뒤늦게 올렌도를 발견한 하녀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녀가 소리라도 지를 듯 입을 열려는 것을 보며 올렌도는 다물라는 의미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하녀가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녀가 옆으로 비켜섰다.
올렌도가 조심스럽게 방문에 귀를 댔다.
두런두런, 엘로즈와 더글라스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아니, 더글라스, 그쪽 말고….”
“그럼 이쪽…이요…?”
“반대…, 아앗…!”
미간을 구긴 올렌도가 더 참지 못하고 방문을 열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겠단 생각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두 사람이 뒤엉겨있다면 둘 중 한 명은 죽여 놔야 속이 풀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한 명은 아마 더글라스가 될 것이었고.
그런데 벌컥 열고 들어간 방 안 분위기가 뭔가 이상했다.
“…응? 황자님?”
“어? 황자님! 근데 들어오시면… 안 되는데…?”
엘로즈와 더글라스는 뒤엉켜 있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일정 간격을 잘 유지하고 있었다.
옷도 아주 잘 갖춰 입고 있었다.
두 사람 앞에는 사람의 형태를 한 나무 조각이 있었다.
나무 조각엔 망토가 반쯤 걸쳐져 있었는데, 흘러내리던 중이었는지, 작은 사다리 위에 올라선 엘로즈가 망토 끝을 가까스로 붙잡고 있었다.
올렌도가 이게 무슨 상황인가 눈살을 찌푸리는데 엘로즈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이렇게 보여드리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이렇게 보여드리게 되었네요.”
“……그게 무슨 소리지?”
“황자님께서 제가 무도회에서 입을 드레스에 신경 써주셨단 얘기 들었어요. 그래서 저도 황자님께 뭔가 해드리고 싶어서….”
“…….”
“물론 제가 만든 망토를 무도회에서 입어달란 얘긴 아니에요. 무도회 전까지 완성이 될지도 모르겠고. 그래도 노력이라도 해보고 싶었어요. 이번 무도회가 아니어도 평소에라도 입으실 수 있는 거잖아요?”
엘로즈의 말을 들으며 올렌도는 머릿속이 점점 멍해졌다.
“그러니까 대공녀 말은 대공녀가 지금껏 내게 줄…, 선물을 만들고 있었단 건가…? 집사와 같이…?”
“네, 황자님.”
간결한 대답과 함께 엘로즈가 해사하게 웃었다.
사르르 눈을 휘어 웃었다.
그 순간 올렌도는 마음속 남아있던 마지막 의심까지 저도 모르게 깔끔히 지워버리고 말았다.
상황적으로 더 오해할 게 없는 상황이기도 했고.
“…그럴 필요 없어. 내가 무도회에서 입을 망토는 제국에서 가장 손재주가 뛰어난 장인들이 이미 한 땀 한 땀 공들여 만들어놓았다고.”
“알아요. 당연히 그렇겠죠. 그래도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이번 무도회가 아니더라도 평소에라도 입으실 수 있는 거잖아요? 딱 한 번이라도 입어주셨으면 좋겠어요.”
“…….”
“황자님?”
“…….”
“…….”
“…그러지.”
올렌도가 마침내 대답하자 엘로즈가 웃었다.
올렌도는 정신이 조금 멍해지는 것을 느끼며 엘로즈의 미소를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을 무의식중에 했다.
* * *
“하녀들 사이에 무슨 소문이 돈다고? 더글라스와 내가… 뭐……?”
안나의 말을 들은 내가 너무 황당해 되물었다.
르나르 걱정에 요새 통 잠을 못 자는 내게 리베로 차를 가져다주러 마침 내 방에 와 있던 더글라스도 마찬가지로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제가 대공녀님과 연인이요? 미쳤습니까? 저희 도련님한테 살해당할 일 있습니까?”
“집사님이 집사님 도련님한테 살해당하든 말든 제 알 바 아니고요, 어떻게 감히 저희 아가씨와 엮이실 수가 있죠?! 정말 기분 나빠!!”
“지금 안나 양이 화내는 거 이해는 하는데요, 그래도 제가 없는 곳에서 욕해줄래요? 바로 옆에서 대놓고 욕하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질 모르겠네!”
더글라스와 안나가 투닥거렸다.
“몰라요, 몰라. 이게 다 집사님 때문이에요. 집사님께서 책임지세요!”
“그게 왜 제 책임입니까? 소문을 퍼뜨린 하녀들이 문제인 거지. 안나 양 같은 하녀들 말입니다.”
“지금 저희 아가씨 뒷담화나 하는 이 저택 하녀들과 절 비교한 건가요?! 어머, 불결해라…!!”
안나와 더글라스가 나에겐 말을 걸지 않고 둘만 싸웠기 때문에 나는 귀가 시끄러운 것과는 별개로 머릿속이 차분해졌다.
황자의 저택 사용인들이 갑자기 나와 더글라스 사이를 의심하기 시작했단 것이 이상했다.
더글라스가 요즘 르나르 얘기와 차 때문에 내 방에 자주 들르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전에도 들르지 않았던 게 아닌데.
게다가 더글라스는 집사였다.
‘일부러 그렇게 보려 하지 않는 이상, 집사가 드나드는 게 어떻게 그렇게 보이게 되는 건지….’
그때 문득,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일부러 그렇게 보려 하지 않는 이상.’
“안나, 그 소문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알아봐 줄래? 그 소문이 시작된 근원지를. 아마 일부러 퍼뜨린 사람이 그 끝에 있을 테니.”
“네에……? 아, 네!”
안나는 우렁찬 대답과 함께 더글라스까지 끌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그로부터 며칠 뒤, 안나는 하녀들 사이 소문의 근원지를 찾아왔다.
“소피아를 추종하는 몇몇 하녀들이 이 소문을 시작했어요. 소피아가 시킨 것이겠죠. 이유야 뻔해요. 황자님께서 한동안 아가씨께 계속 선물을 보내셨고, 얼마 전엔 아가씨께서 무도회에서 입으실 드레스까지 직접 고르셨다고 하니, 질투가 나 아가씨를 모함한 거예요.”
“질투가 나….”
“소문을 들은 황자님이 화를 주체 못 하고 아가씨를 해코지하게 하려 한 것이 틀림없어요…!”
안나가 발까지 쿵쿵 구르며 분개했다.
내 생각도 안나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올렌도에게 버림받은 게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소피아를 이해해줘야 하는 걸까?
‘아니, 천만에.’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올렌도는 원작에서부터 소유욕이 남다른 사람이었다.
나와 파혼해달란 르나르에게 제국 황자의 약혼녀를 운운하고 탐내는 눈빛으로 날 보던 것도 그런 맥락일 터였다.
‘싫어하는 나조차 빼앗기기 싫어하는 올렌도.’
그런데 그런 올렌도가 더글라스에게까지 날 빼앗겼단 생각을 하게 된다면?
더글라스가 위험해질지도 몰랐다.
올렌도가 그에게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기에.
때문에 난 소피아의 무책임한 행동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안나. 저택에 소문이 얼마나 퍼졌어?”
“아마 이 저택 사용인들이라면 한 번씩은 들어봤을 거예요.”
“더글라스. 올렌도 황자에게도 소문이 들어갔을까요?”
“아마도요. 사용인들이 황자님께 직접 소문을 흘리진 않았겠지만, 황자님의 기사들은 평소 소문에 귀 기울일 테니.”
“안나, 더글라스, 내가 생각이 있는데….”
* * *
“그러니까 대공녀 말은 대공녀가 지금껏 내게 줄… 선물을 만들고 있었단 건가…? 집사와 같이…?”
“네, 황자님.”
믿는 걸까?
“…그럴 필요 없어. 내가 무도회에서 입을 망토는 제국에서 가장 손재주가 뛰어난 장인들이 이미 한 땀 한 땀 공들여 만들어놓았다고.”
믿은 것 같다.
“알아요. 당연히 그렇겠죠. 그래도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이번 무도회가 아니더라도 평소에라도 입으실 수 있는 거잖아요? 딱 한 번이라도 입어주셨으면 좋겠어요.”
“…….”
“황자님?”
올렌도가 갑자기 대답이 없었다.
나는 조금 초조해졌다.
“…그러지.”
이내 그가 풀어져 답하자 안심된 내가 웃었다.
웃는 얼굴에 침은 못 뱉겠는 건지 올렌도는 더는 의심하지 않고 내 방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