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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51화 (51/100)
  • 51화

    예쁘겠네

    하지만 뛰던 심장은 이내 잠잠해졌다.

    봉투를 봉한 빨간 실링 왁스에 찍힌 문양이 황실의 것인 게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이게 뭐죠?”

    “초대장.”

    “초대장이라니 갑자기 무슨….”

    “곧 황궁에서 무도회가 열릴 거야. 아버지께서 직접 여는 무도회. 아버진 내게 약속하셨어. 내가 성인이 되는 해가 끝나기 전에 그레이시아나 제국 귀족들에게 날 소개하겠다고. 아마 그 약속을 기억하시기 때문에 여는 무도회겠지.”

    “…그렇군요.”

    “그렇군요? 그게 끝인가?”

    “끝이 아니면요?”

    “그대도 나와 함께 가야 해.”

    “…제가요?”

    “당연한 거 아닌가? 대공녀는 어쨌든 황후가 될 사람인데.”

    …황후가 될 사람?

    올렌도는 엘로즈가 황후가 되는 걸 극도로 싫어하던 게 아니었던가?

    여주 캐스티나와도 별개로.

    코웰 가문에 권력을 나눠주길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런데 아무렇지 않게 내가 황후가 될 것이라 말하는 게 참 이상했다.

    어쨌든 올렌도가 요구하는 무도회엔 가야 할 것 같았다.

    나의 가장 큰 목표는 아무 특이사항 없는 듯 올렌도와 잘 지내며 그의 시선을 이곳에만 묶어두는 것이었으니.

    코웰 가문의 반역 준비가 끝날 때까지.

    “알겠어요.”

    “……허락한 건가? 정말?”

    “당연히 함께 가야 한다면서요. 아니에요?”

    “맞지. 당연히 함께 가야지. 당연히 함께….”

    “초대장 이리 주세요.”

    “……그래.”

    올렌도는 내내 삐딱한 표정을 짓고 있더니 내가 초대장을 받아들자 어쩐지 좀 순해졌다.

    나는 그 모습을 잠시 의아하게 보다가 곧 관심을 거뒀다.

    “참. 드레스는 따로 준비하지 말고.”

    “드레스를 준비하지 말라고요? 왜요?”

    “내가 다 생각이 있어.”

    “……네.”

    굳이 토를 달진 않았지만, 무슨 나쁜 꿍꿍이속이 있는 건 아닌 건지 나는 올렌도가 의심스러워졌다.

    * * *

    엘로즈에게 초대장을 전달한 후 올렌도는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드레스 디자이너를 저택으로 불렀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공식적으로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올렌도를 만나게 된 디자이너는 긴장해 마른 침을 삼켰다.

    하지만 오랜 시간 귀족들을 상대해온 처신술의 대가답게 그는 올렌도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으며 화려한 드레스가 가득 그려진 카탈로그를 올렌도에게 내밀다.

    올렌도는 그 카탈로그를 오랜 시간 들여다봤다.

    까딱거리는 올렌도의 머리 위로 연노랑 가을 햇살이 찬연히 쏟아졌다.

    한참 고민하던 올렌도는 어깨 한쪽이 완전히 드러난 검은색 원 숄더 시폰 드레스를 골랐다.

    상체부터 허벅지 중간 즈음까지는 검은색이고, 그 아래로는 자연스럽게 붉은색으로 바뀌는 그라데이션 형태의 드레스였다.

    허리선과 어깨선 부근은 새하얀 다이아몬드로 꾸며져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머리 묶고 이거 입으면 예쁘겠네.”

    올렌도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하지만 드레스 디자이너는 그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간 걸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들이 머리를 묶으면 머리 장식은 뭘로 하지?”

    “고르신 드레스엔 이 다이아몬드 티아라가 잘 어울립니다.”

    눈치껏 올렌도에게 다가선 디자이너가 카탈로그 뒷장을 빠르게 펼쳤다.

    올렌도의 시선이 디자이너가 가리킨 티아라에 고정됐다.

    엘로즈의 백발 같은 은발에 잘 어울릴 듯한 하얀 티아라였다.

    “…예쁘네.”

    “사실 워낙 화려한 티아라라 보통은 소화하기 어려운데요, 황자비님껜 잘 어울릴 겁니다. 제가 얼굴을 뵙진 못 했지만, 알 것 같습니다. 지금 황자님 표정을 통해서요. 황자비님께서 이 티아라를 소화하실 수 있을 정도로 얼마나 아름다우신지.”

    “…대공녀가 예쁘긴 하지.”

    올렌도가 피식 웃었다.

    그의 눈에 들고 싶어 혀를 놀리는 디자이너의 입에 발린 소리가 그렇게 듣기 싫지 않다고 생각하며.

    그때, 다과를 올린 트레이를 들고 응접실에 들어서던 소피아가 멈칫했다.

    기척을 느낀 올렌도가 고개를 돌려 소피아를 봤다.

    그러곤 아무렇지 않게 다시 디자이너를 봤다.

    소피아의 얼굴이 모멸감으로 붉어졌다.

    그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황자의 침실에 있었다.

    그의 아래에서 그녀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대체 무엇이 잘못된 건지 올렌도는 언젠가부터 그녀를 더는 침실로 부르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를 다른 하녀들과 차등 없이 대하기도 했다.

    그래놓고 대공녀에게 줄 선물을 고르고 있었다.

    그녀가 예쁘다는 말을 하며.

    소피아가 그녀가 들고 온 트레이를 봤다.

    은빛 주석 표면에 눈물 어린 그녀의 초록 눈동자가 아롱거렸다.

    그날 밤 소피아는 한적한 곳에서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러다 복도로 나왔을 때, 그녀는 집사 더글라스가 찻잔과 티포트를 들고 엘로즈의 방에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됐다.

    이 저택의 사용인들은 엘로즈와 더글라스 사이를 의심하지 않았다.

    가짜 황자 르나르가 이 저택에 있었을 때 엘로즈와 르나르 사이가 얼마나 각별했는지 모르지 않았으므로.

    하지만 그런 사정을 올렌도는 몰랐다.

    게다가 가짜 황자가 없는 지금, 엘로즈의 마음이 어떨지 누가 알지?

    가짜 소문을 내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눈물 젖은 눈을 한 소피아가 입꼬리를 늘여 기이하게 웃었다.

    * * *

    “편지는요?”

    내 질문에 더글라스가 고개를 저었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르나르가 떠난 지 벌써 한 달.

    1주, 2주까지는 편지를 받지 않고도 견딜 수 있는 시간이었다.

    편지를 쓰기엔 바쁘다고 생각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한 달은 길었다.

    나는 르나르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초조함을 감출 수가 없게 됐다.

    “플루토나 제국 수도까지 반나절밖에 걸리지 않는 포털이 있잖아요. 르나르는 그 포털을 이용할 거라고 더글라스가 그랬잖아요. 근데 왜 한 달이 다 되도록 연락이 없는 거죠? 더글라스에게도 나에게도?”

    “대공녀님, 걱정되시는 건 이해하지만 일단 진정을….”

    나는 말하는 순간순간 심장이 점점 더 빨리 뛰었다.

    조급해졌고 두려워졌다.

    하지만 그 이상 더글라스를 몰아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지금 나만큼이나 르나르를 걱정하고 있는 사람이 더글라스였으니.

    더글라스는 ‘르나르는 강하다.’ 고 속 편히 말하고 말던 평소와 달리 나만큼이나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있었지만, 머릿속으론 르나르에게 생겼을지 모를 수많은 나쁜 일을 그려보고 있는 듯했다.

    마치 지금의 나처럼.

    “…좀 더 기다려보죠. 지금 저희는 어차피…,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나도 알아요. 그렇지만….”

    “걱정마세요, 대공녀님. 저희 도련님은…. ……강하시니까요.”

    여전히 하얗게 질린 얼굴로 더글라스가 말했다.

    르나르가 강하다는 것은 나도 알았다.

    그의 검술 실력을 이미 보고도 모를 수는 없는 사실이었다.

    원작이 묘사하길 그는 수백의 기사도 홀로 상대할 수 있다 했다 하기도 했고.

    ‘그럼에도 르나르가 이렇게 걱정되는 것은….’

    “…대공녀님?”

    ‘좋아하나 봐.’

    내가 처음으로 인정했다.

    르나르를 향한 나의 감정을.

    * * *

    “…믿을 수가 없네.”

    허둥지둥 달아나는 대사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르나르가 중얼거렸다.

    불시에 습격한 자객에게서 목숨을 구해줬더니 르나르가 그 자객을 처리하던 중 도망쳐 버린 것이었다.

    “저 치는 정말 내게서 도망갈 수 있을 거로 생각한 건가?”

    르나르의 입술 새로 어이가 없다는 웃음이 흘렀다.

    다음 순간 르나르가 단도를 던졌다.

    단도는 정확히 대사제의 종아리 근육에 꽂혔다.

    으억 소리를 낸 대사제가 바닥을 뒹굴었다.

    대사제.

    망국 플루토나 제국의 대사제.

    코웰 대공에 따르면 그 대사제는 대공 본인과 터넛 황제를 제외하고, 터넛 황제가 플루토나 제국의 마법사와 마녀들의 반란에 관여한 걸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터넛 황제가 마법사와 마녀들의 반란을 물밑 지원한 게 차후 그 반란을 직접 진압한 뒤 플루토나 제국을 속국으로 삼으려 한 것임을 알고 있는, 황제와 대공을 제외한 유일한 사람.

    그 순간 수풀 속에서 튀어나온 자객 하나가 르나르를 향해 달려들었다.

    르나르는 칼에 베인 자객조차 한 박자 느리게 깨달았을 정도로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눈이 커진 자객의 목에서 시뻘건 피가 솟구쳤다.

    “하. 빨리 돌아가야 하는데…. 왜들 이렇게 성가시게 구는 거지…?”

    르나르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장검을 털었다.

    “로즈한테 빨리 돌아가겠다고 약속했는데….”

    그때, 나무 뒤에서 알렌이 나타났다.

    “르나르 님!”

    르나르가 알렌 쪽을 향해 단도를 던졌다.

    놀란 알렌이 다리가 풀리려는데, 그의 뒤에서 윽 하는 짧은 신음 이 들렸다.

    이내 가슴에 단도가 박힌 남자가 알렌 옆으로 쿵 하고 쓰려졌다.

    하마터면 자객에게 등을 내줄 뻔한 알렌이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알렌은 그동안 르나르가 진심으로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보게 된 지금, 알렌은 르나르가 그와 같은 편인 걸 무척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로즈에게 편지를 보내야겠어.”

    르나르가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대공녀님께 편지라면 르나르님, 오늘 아침에도….”

    “내가 없는 동안 로즈가 날 잊어버리면 어떡해?”

    그런 얼토당토않은 말을 하는 르나르의 눈빛은 진지했다.

    “하지만 르나르님, 이제 마법 전서조 종이가 두 장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

    르나르와 알렌 사이에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마법 전서조 종이는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종이처럼 보였지만 글자를 쓰고 불을 붙이면 새로 변해 날아가는 마법이 걸린 종이였다.

    마법 사용이 절대적으로 금지된 그레이시아나 제국에서조차 암암리에 사용될 만큼 활용도가 높은.

    출발할 때 가지고 떠난 것이 마흔한 장.

    알렌은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건 르나르가 틈만 나면 엘로즈에게 편지를 써 보내려 할지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나마 사용된 서른아홉 장 중 두 장을 알렌이 더글라스에게 상황을 전하기 위해 사용했고, 나머지는 르나르가 엘로즈에게 안부를 전하기 위해 사용한 것.

    엘로즈에게 편지를 못 쓰게 하면 르나르는 신경이 지나칠 정도로 날카로워졌으므로, 알렌은 구하기 힘든 마법 전서조 종이가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도 르나르의 의미 없는 편지 남발을 막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남은 두 장만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남겨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르나르를 무척 괴롭게 만들지라도.

    “자꾸 새를 날리시니 자객들도 새를 보고 쫓아오는 게 아닙니까.”

    알렌이 울먹였다.

    “괜찮아. 찾아오면 내가 다 죽여.”

    르나르가 뇌까렸다.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자객들이 계속 이렇게 찾아오니 시간이 조금씩은 지체되잖아요. 대공녀님께 빨리 돌아가겠다고 하셨다면서요.”

    르나르는 그제야 말이 없어졌다.

    “미꾸라지 같은 저 대사제만 아니었어도 자객들과 상관없이 벌써 돌아가긴 했겠지만….”

    알렌과 르나르의 시선이 동시에 다리를 붙잡고 쓰러진 대사제에게로 향했다.

    그가 얼마나 꽁꽁 잘 숨어있었고 잡히고도 꾸준히 도망쳤는지 그를 그레이시아나 제국으로 향하는 포털 근처까지 데려오는데 걸린 시간이 한 달이었다.

    그 생각을 다시 하니 르나르는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르나르가 대사제를 향해 다가섰다.

    르나르가 대사제에게 편지를 쓰지 못하게 된 분풀이를 할 것을 예상한 알렌이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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