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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50화 (50/100)
  • 50화

    왜 질투하지 않지?

    안나가 하녀들의 숙소로 돌아간 늦은 시각.

    잠이 오지 않았다.

    안나가 떠나기 직전 날 찾아온 더글라스와 나눈 대화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대공녀님, 여쭈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저희 도련님께 편지를 받으셨습니까?」

    「아뇨, 도착하는 편지가 있으면 바로 전달해달라고 가족들에게 얘기해놓고 왔는데 아직 받은 게 없어요. 설마 더글라스도 아직 르나르의 편지를 못 받은 거예요?」

    「그게…. 네…….」

    르나르는 떠나기 전, 자주 편지를 보내겠다고 분명 내게 약속했었다.

    같은 약속을 더글라스에게도 했다고.

    「……편지를 보내기 여의치 않은 상황일 수도 있을까요?」

    「…글쎄요. 마법 전서조 종이를 가져가셨으니 펜과 불만 있으면 편지를 보내실 수 있을 텐데, 불이야 여관만 들러도 구하기 쉬우실 거고…. 잘 모르겠네요, 무슨 일이 생기신 건 아니실지…….」

    르나르가 떠난 지 2주.

    플루토나 제국에 도착하자마자 편지를 보내겠다고 하긴 하였지만, 그렇다고 편지가 오지 않아 초조해할 만큼 시간이 많이 지난 것은 아니었다.

    ‘별일 없을 거야.’

    내가 애써 그렇게 마음을 달래는데,

    “아웅, 황자님……!”

    달뜬 신음과 함께 소피아가 올렌도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안나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사실 나도 불편했다.

    초저녁부터 늦은 새벽까지 남녀가 마주하는 적나라한 소리가 매일같이 이어지는 것이….

    베개 더미 속에 머리를 파묻어도 들리는 소리를 막을 순 없었기에 나는 결국 침대를 벗어났다.

    따뜻한 우유라도 한잔 마셔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주방으로 향했다.

    이미 오밤중이었기 때문에 주방은 텅 비어있었다.

    주방 구석의 너른 창을 통해 스며든 달빛이 은은했다.

    어느새 가을이 되어버린 날씨에 주방 안과 밖이 선선한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화로엔 쓰다 남은 장작이 남아있었다.

    ‘일상생활 중에 마법은 최대한 사용하지 않으려 했지만….’

    사용인들을 불러낼 생각이 없었던 나는, 손가락을 튕겨 작은 불덩이를 만들어냈다.

    그것을 화로 안으로 던져 넣자 불덩이가 여러 갈래로 나뉘며 난로 안 기름 묻은 장작을 삼켜댔다.

    “…….”

    내가 멍하니 불꽃을 응시했다.

    내가 불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신기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몰래몰래 연습하다 보니, 나는 어느새 불을 꽤 잘 다루게 됐다.

    마법은 편리했다.

    ‘따뜻한 우유를 마시기 위해 주전자를 쓸 필요도 없으니.’

    나는 오늘 짜고 남은 듯한 우유를 하얀 사기 컵에 옮겨 담은 뒤 두 손으로 모아 쥐었다.

    내 손이 뜨거워지면서 컵 속 우유가 데워졌다.

    나는 선반 근처의 의자를 끌어다 화로 앞에 놓고 앉아서 우유를 마시며 화롯불을 쬈다.

    타닥- 타닥-

    장작 타는 소리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눈을 감으니 르나르와 함께 보냈던 오두막에서의 밤이 생각났다.

    ‘르나르는…. 무사한 것이겠지…?’

    걱정으로 무거워지는 마음과 함께 눈꺼풀도 무거워졌다.

    깜빡이던 눈꺼풀의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그러고 보니….’

    요새 잠을 깊이 자지 못했다.

    앞방의 올렌도와 소피아가 밤마다 시끄러웠고, 또….

    또 나는….

    ‘르나르가 걱정이 되어서….’

    장작 타는 소리가 느리게 의식에서 멀어졌다.

    그러다 갑자기 선명해졌다.

    내가 쥐고 있던 우유 잔이 손안에서 사라지는 것을 느끼고 잠이 깼기 때문이었다.

    깜짝 놀라 옆을 보니 우유 잔을 바닥에 내려놓고 막 나를 안아 올리려던 올렌도가 보였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올렌도가 그대로 굳었다.

    그와 나 사이에 가을밤보다 깊은 정적이 흘렀다.

    “…….”

    “…….”

    이내 정신을 차린 내가 움찔하자 올렌도가 나를 향했던 손을 거뒀다.

    그리고 짜증스럽다는 말투로 말했다.

    “이런 곳에서 자면 입 돌아가.”

    “……황자님만 아니었으면 굳이 이런 곳에서 잠들지도 않았을 겁니다.”

    “나 때문이라고?”

    그런데 올렌도가 갑자기 눈을 빛냈다.

    ‘부끄러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좋아하는 것 같지…?’

    “나 때문에 이곳에 내려온 거야?”

    “네.”

    “질투가 난 거야?”

    “……네?”

    “질투 난 거냐고.”

    올렌도의 질문을 듣고 나는 한동안 굳어있었다.

    그의 질문이 한 번에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질투라니, 그게 무슨…….”

    “……? 아니면 말고.”

    올렌도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팔짱을 꼈다.

    그러곤 화롯불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기 시작했다.

    ‘…화는 내가 내야 하는 거 아닌가? 밤마다 잠도 못 자게 하는 게 누구인데….’

    계속 함께 있으면 나까지 이상해질 것 같아 나는 올렌도의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조용히 주방을 떠나려 했던,

    바로 그때….

    “……!”

    올렌도가 내 손목을 잡아채 날 돌려세웠다.

    그러곤 벽 쪽으로 몰아세운 날 잔뜩 날 세운 눈으로 노려보며 물었다.

    “왜 질투하지 않지?”

    그 질문을 듣는 순간, 나는 사고 회로가 정지했다.

    내가 질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의 머릿속이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을 아침의 하늘 같은 올렌도 연하늘색 눈동자가 왜 우울해 보이는지도 나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처음엔 소유욕 강한 올렌도가 르나르의 것으로 보이는 날 욕심내는 것 같다고 추측했다.

    하지만 소피아를 밤마다 침실로 부르는 것을 보며 그것도 아닌가 보다 생각을 바꿨다.

    내가 욕심났으면 적어도 내 앞에서 다른 여자를 품진 않았을 테니.

    ‘근데 그래 놓고….’

    어떻게 내가 자길 질투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가 있는 거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좋아해야…, 질투를 하겠죠…?”

    “그 말은 날 좋아하지 않는다는 소린가?”

    “…전 르나르를 좋아합니다.”

    “대충은 알고 있어.”

    “그거면 답이 된 거 아닌가요?”

    “르나르를 좋아하면서. 나도 좋아할 수 있잖아.”

    “……네?”

    “…….”

    “…전 그 정도로 사랑이 넘치는 편이 아니어서요.”

    “여자들은 그러던데. 남편이 있으면서도 내가 좋다고 하고.”

    “……. 대체 어떤 여자들을 만나신 건지….”

    “…….”

    순간, 올렌도가 내 머리칼을 한 움큼 가져가 그 위에 입술을 눌렀다.

    나는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 나도 모르게 올렌도를 밀어냈다.

    밀린 올렌도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과 동시에 내가 놀란 얼굴을 했다.

    르나르도 이런 행동을 자주 했지만, 나는 이럴 때 르나르를 밀어낸 적이 없었다.

    그러곤 그저 내가 스킨십에 아무런 감흥이 없어 그런 줄만 알았었다.

    딱히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싫어하지도 않아서.

    내게 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 그냥 둬도 상관없다고 생각해서.

    하지만 아니었다.

    나는 스킨십이 싫다는 감정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르나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르나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르나르는 네게 어땠지…?”

    놀란 나를 보고 표정이 조금 풀어진 올렌도가 갑자기 내게 물었다.

    “……네?”

    “르나르는 네게 어땠냐고.”

    “르나르는…, 제게 다정했고….”

    나를 흑마 위에 태워주던 르나르 생각이 났다.

    그리고 내게 꽃을 건네는 르나르.

    내 얼굴을 간질이는 머리칼을 넘겨주는 르나르.

    넘어지던 날 붙잡아 주던 르나르.

    그가 내게 다정했던 순간들은 너무도 많아 일일이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

    “그리고…, 많이 웃어줬어요.”

    “르나르가? 너랑 나랑 지금 같은 사람을 얘기하고 있는 게 맞아?”

    황당해하는 올렌도의 얼굴 위로 르나르의 웃는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면 웃는 모습이 참 예쁜 사람이었다.

    얼굴이 잘생긴 것과는 또 별개로.

    그가 웃는 모습을 빨리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왜 편지를 보내지 않는 건지….’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심장이 아파 왔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지?”

    “……? 제 표정이 어떤데요?”

    “울 것 같아.”

    “…….”

    “알았어. 르나르가 잘 웃었다고. 너한텐. 믿어주지. 그러니까 울지 마.”

    무심했지만 어쩐지 다정하게 느껴진 말을 던진 올렌도가 홀연히 주방을 빠져나갔다.

    혼자 남은 나를 선연한 가을 달빛이 은은하게 감쌌다.

    주방에서 짧은 대화를 나눈 그 날 이후 올렌도에겐 두 가지 변화가 생겼다.

    첫 번째는, 그가 더는 침실에 소피아를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내게 자꾸 무언갈 버리기 시작했단 것.

    “올렌도 황자님께서 보내신 약초입니다. 피로 회복에 특히 좋다고 합니다.”

    “약초? 황자님께서 왜 이런 걸 나에게….”

    “대공녀님께서 여쭤보시면 필요 없어 버린 거라고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

    내가 어이가 없어 바라보자 올렌도가 보낸 하인이 본인 또한 그 말이 이상하단 걸 알고 있다는 듯 난감한 기색을 비치며 눈알을 굴렸다.

    “…그냥 받아주세요, 대공녀님. 집에 토끼 같은 자식들이 셋이나 있는 절 봐서라도….”

    하인의 표정이 간절했기에 나는 올렌도가 내게 버린 약초를 그냥 받기로 했다.

    그러나 올렌도의 기행은 그 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대공녀님, 황자님께서 보내셨습니다. 길에서 꽃을 주우셨다고….”

    “대공녀님? 황자님께서 목걸이를….”

    “대공녀님? 황자님께서.”

    “대공녀님?”

    “대공녀님?”

    “휴우…….”

    올렌도가 갑자기 내게 왜 이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르나르가 내게 다정했다는 그날의 대화가, 왜 갑자기 올렌도로 하여금 이런 행동을 하게 만든 건지.

    ‘대체 내게 바라는 것이 뭐길래….’

    그리고 올렌도가 쓸 만한 것들을 내게 버리기 시작한 지 2주의 시간이 흘렀을 때, 그가 나의 방으로 날 찾아왔다.

    “내가 보낸 선물들에 관해 한 번 언급이 없더군.”

    “선물이요? 제게 버리신 것들이 아니었나요?”

    “……그랬지.”

    “…….”

    “…….”

    “고맙단 얘기가 듣고 싶어 오신 건가요?”

    “아니, 그건 아니고…….”

    올렌도가 내게 하얀 봉투에 담긴 편지를 내밀었다.

    편지를 보는 순간, 나는 르나르를 떠올렸다.

    ‘그의 편지인 걸까?’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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