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나는 웃고 있었다
“아가씨, 일어나보셔야겠어요. 아가씨?”
코웰 저택에서 데려온 하녀 안나가 날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으음…. 무슨 일이야, 안나……?”
무거워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비비며 내가 눈을 떴다.
그리고 마주하게 된 안나의 청록색 눈동자엔 걱정이 한가득 담겨있었다.
불안한 기분에 정신이 번쩍 드는데, 낯설진 않지만 반갑지도 않은 목소리가 방문 바로 건너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대체 왜 그렇게들 느린 거야. 빨리빨리 못해?”
올 것이 와 있었다.
올렌도였다.
서둘러 잠옷을 갈아입은 내가 방문을 열었다.
끼이익-
문 열리는 소리에 뒤돌아본 올렌도와 내 시선이 곧장 마주쳤다.
“…….”
“…….”
올렌도와 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올렌도는 내 방 바로 맞은편 방에서 지낼 모양이었다.
하인들을 시켜 그곳에 짐을 풀고 있는 걸 보면.
“르나르가 지내던 방에서 지내고 싶지 않아. 그래서 그래.”
올렌도가 나를 의식한 듯 다시 뒤돌며 내게 변명했다.
내가 방안의 시계를 봤다.
정오가 되기 직전이었다.
르나르가 떠나고 내가 돌아온 같은 날의 정오.
황제의 눈치를 봐서라도 올렌도가 곧 저택에 들어오겠단 예상은 했었지만, 그게 바로 오늘이 될 줄은 몰랐었다.
갑자기 나타난 올렌도에게 어떻게 반응을 보여야 좋을지 내심 고심하는데, 올렌도가 건조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건넸다.
“방금 일어난 거면 식당에 가 있어. 곧 점심 먹을 시간이잖아.”
올렌도가 하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바람에 나는 하마터면 내가 올렌도와 원래 식사를 함께하는 사이인 줄 착각할 뻔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황자님, 저는 보통 식사는 방에서 혼자 따로 해서요.”
내가 에둘러 올렌도를 거절했다.
꼭 황자의 저택에 처음 와서 르나르를 거절했던 시기로 되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르나르는… 잘 가고 있으려나…?’
플루토나 제국까지 가야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렇군.”
내 쪽을 돌아봤던 올렌도가 무덤덤하게 말하고 다시 뒤돌았다.
혹시 다시 말을 걸까 싶어 잠시 기다렸지만 올렌도는 또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더는 지체하지 않고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 * *
하인들이 짐을 푸는 데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올렌도는 집무실을 찾았다.
이 저택 자체를 자주 오지 않았기 때문에 오랜만에 둘러보는 집무실은 낯설었다.
르나르는 집무실을 사용하지 않았었는지 보이는 르나르의 물건도 없었다.
그게 아니면 혹시 누군가 미리 치워둔 걸까?
이 저택에 대공녀를 제외한 르나르 편이 혹시 또 있을까?
올렌도가 고민하는데,
똑똑-
별안간 노크 소리가 들렸다.
‘…대공녀일까?’
올렌도는 무의식중에 기대하게 됐다.
하지만 노크 소리 후 나타난 건 엘로즈가 아닌 소피아였다.
“…무슨 일이지?”
올렌도가 냉담하게 묻자 소피아가 흠칫 몸을 떨었다.
안 그래도 몰래 오느라 온갖 눈치를 다 봐야 했는데, 올렌도의 반응마저 무심하자 소피아는 애써 냈던 용기가 다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기어코 여기까지 와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기사님 이게…, 어찌 된 거세요…?”
“집사에게 듣지 못했나? 내가 진짜 황자야.”
“그럼 예전에 계시던 황자님은….”
“걔가 진짜 르나르고.”
“…….”
“더 궁금한 게 있나?”
“…….”
…궁금한 거요? 있죠. 많죠.
왜 제게 진즉 진실을 말해주지 않으셨나요?
설마 저에 대한 마음이 진심이 아니셨던 건 아니겠죠?
절 만난 건 큰 행운이라고 하셨잖아요.
절 만난 건.
절 만난 건….
소피아는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감히 물을 수 없었다.
그녀는 평범한 하녀에 불과했고 올렌도는 제국의 황자였기에.
“…아뇨, 없습니다….”
“그래.”
간결한 올렌도의 대답에 소피아가 눈물을 머금고 뒤돌았다.
그때,
“소피아.”
올렌도가 소피아를 불렀다.
소피아가 반색하며 뒤돌았다.
“네, 황자님.”
“대공녀 말이야. 원래 혼자 밥을 먹었나?”
다른 여자에 대한 질문에 소피아는 실망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낯빛이 어두워졌다.
이를 눈치채지 못할 올렌도가 아니었으나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뇨, 가짜 황자님과 거의 항상 함께 드셨습니다. 아침, 점심, 저녁 세 끼 모두요.”
“…그래?”
올렌도 표정이 불쾌함으로 일그러졌다.
“대공녀와 르나르는. 사이가 좋았나?”
“…….”
“소피아.”
올렌도가 짜증을 억누른 목소리로 소피아를 불렀다.
겁먹은 소피아가 눈을 꼭 감고 거의 울먹이며 대답했다.
“싸울 때가 있긴 했습니다, 황자님께 편지로 말씀드린 것처럼. 그래도….”
“…….”
“그 싸움 뒤로는…, 전반적으로 사이가 좋아 보이긴 했습니다. 아, 물론 대공녀님께서 외출하시진 않았습니다. 그랬다면 제가 편지로 이미 말씀드렸을 테니….”
소피아가 곧 터질 것 같은 눈물을 꾹 참으며 말했다.
이야기할수록 비참해졌다.
꼭 올렌도가 그녀를 사랑한 게 아니라 이용만 한 것 같아서.
“알겠어. 나가봐.”
소피아가 눈물을 흘릴까 귀찮아졌던 올렌도는 그녀를 서둘러 내보내려 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르나르에 대한 질투심 때문이었다.
그러다 문득 올렌도는 그 순간 그의 감정을 곱씹었다.
‘질투…심…?’
“소피아?”
올렌도가 별안간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소피아를 불렀다.
눈물을 흘리며 방문을 열던 소피아가 뒤돌았다.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에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한 질문이 가득 피어올랐다.
* * *
소피아의 새된 교성이 들리는 순간 안나가 티 나게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그런 안나를 힐끗 보니 안나가 우는 얼굴을 만들어 보였다.
그 위로 왜인지 더글라스가 겹쳐 보였다.
나는 못 본 척하고 읽던 책으로 눈을 돌렸다.
이에 안나가 참지 못하고 결국 내게 하소연했다.
“아가씨, 그냥 두고만 보실 거예요?”
“두고만 보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그래도 황자님께서 아가씨의 예비 약혼자이신데, 다리 몽댕이들을 그냥 확…!”
안나가 긴 뜨개바늘을 부러뜨리는 시늉을 하자마자 다시 한번 소피아의 자지러지는 신음이 저택을 뒤흔들었다.
안나와 내가 동시에 몸을 움츠렸다.
“하, 정말 못 참겠네. 아가씨! 소피아 쟤는 정말 그냥 두면 안 된다니까요?! 제가 이미 말씀드렸잖아요! 소피아는 이미 하녀들 사이에서…, 자기가 마치 황비라도 될 것처럼…!”
“황비가 아니라 황후가 될지도 모르지.”
“아가씨!!!!”
안나의 조그만 몸이 쏘아 올린 우렁찬 목소리에 놀란 내가 재차 몸을 움츠렸다.
요즘 청각이 자주 혹사당하는 것 같았다.
‘르나르와 지낼 때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저도 아가씨께서 황자 전하께 관심이 없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아가씨, 우리 아가씨께서 이런 대우를 받는 건…! 저는 정말…….”
안나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물었다.
그러더니 별안간 뒤로 돌았다.
어깨가 미세하게 들썩이는 것을 보니 눈물을 흘리는 듯했다.
코웰 가문에서는 가보 취급을 받는 내가 이곳에서 이렇게 지내는 게 날 아끼는 안나에겐 꽤 충격인 모양이었다.
“안나.”
“…….”
“돌아서.”
“…….”
“명령인데? 이제 너도 날 무시하는 거야?”
“아가씨!!!!”
장난스레 물었는데 안나가 커다란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들이 뚝뚝 흘리며 씩씩대며 뒤돌았다.
팔자가 된 눈썹이 귀여우면서 안쓰러웠다.
“이리 와, 안나.”
“…….”
“안나?”
“…으아앙, 아가씨…!”
안나가 내 발치에 주저앉아 내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다른 귀족들이 보면 놀랄 모양새였지만 이게 나와 안나가 유난히 친한 이유이기도 했다.
단순한 귀족과 하녀처럼 지내온 게 아니었기에.
“난 정말 괜찮아. 좀 시끄러운 것만 빼면 딱히 불편한 것도 모르겠는걸?”
“하지만 아가씨, 황자님께서 대놓고 저러시니까…, 이 저택 하녀들이 감히 아가씨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입방정을…! 황자님께서 소피아에게 홀딱 빠져 아가씨께는 가짜를 붙여놓은 거라느니, 황자님 눈엔 소피아가 더 예쁜 것 같다느니….”
“황자님 눈엔 소피아가 더 예쁜가 보지.”
“아가씨!!!!”
막 그쳤던 안나가 또 울 것만 같아 나는 그녀가 딴생각하지 못하도록 정성스레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내 손길을 좋아하는 안나가 잠시 머뭇대다 배시시 웃었다.
“아가씨, 저랑 같이 코웰 저택으로 돌아가요.”
조금 기세가 꺾인 안나가 내게 조곤조곤 말했다.
“저는 이곳 하녀들이 정말 싫어요. 코웰 저택에선 고용인들이 아가씨를 얼마나 아끼는지 아가씨께서도 잘 아시잖아요. 하지만 여기 하녀들은…, 입을 열 때마다 제가 그 입들을 얼마나 꿰매 놓고 싶은지…….”
“안나, 그들이 하는 얘기를 전해 달라고 내가 널 데려온 건데 네가 그들 입을 꿰매버리면 안 되지.”
“그치만….”
내가 안나를 데려온 건 첩자 역할을 시키기 위해서였다.
첩자를 여기저기 심어놓은 올렌도와 코웰 대공을 보고 내게도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기에.
때문에 안나는 코웰 저택에서 온 걸 하녀들 사이에서 숨기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그들 이야기를 여과 없이 듣게 된 걸 심히 괴로워하는 중이었다.
“황자님께서 가짜 황자를 세운 것도 주인어른께선 모르고 계신 거죠? 제가 다 말씀드릴 거예요, 아가씨! 저 망할 황자가 우리 아가씨를 바로 앞방에 두고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혹시 어젯밤 이야길 각하께 하지 않으신 겁니까?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대공에게 이르겠다는 안나를 보니 떠나기 전 르나르가 생각났다.
내게 정이 들면 전부 대공한테 이르는 걸 좋아하게 되는 걸까?
그때, 당황한 안나가 내게 물었다.
“아가씨, 혹시 지금…. 웃고 계신 거세요…?”
안나의 생뚱맞은 질문에 내가 고개를 틀어 근처 거울을 봤다.
정말 내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르나르를 떠올리는 나는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