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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48화 (48/100)

48화

계략녀

대공과 나, 르나르는 꽤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대공은 르나르에게 일을 맡겼다.

누군가를 찾아와야 하는 일.

그리고 그 일을 위해 르나르는 잠시 내 곁에서 떠나기로 했다.

이 때문에 나와 르나르는 단둘이 된 뒤 크게 다투게 됐다.

“그 얘기는 여기 오기 전에도 했잖아요. 제가 아예 대공저에 돌아오면 황자와 다툼이 생겨 가족들 반역 준비에 방해가 될지 모른다니까요?”

“아무리 방해가 된다고 하셔도 대공녀님께선 이곳에 계셔야 합니다. 올렌도가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곳에 대공녀님을 혼자 둘 순 없습니다. 대공 각하께선 아무 말씀 안 하시던가요? 각하라면 대공녀님께서 혼자 그런 위험을 감수하도록 그냥 두진 않으실 텐데요?”

“…….”

“혹시 어젯밤 이야길 각하께 하지 않으신 겁니까?”

“…….”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르나르!”

내가 매달리자 르나르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봤다.

나로선 익숙하지 않은 서늘한 르나르 표정에 몸이 움찔 떨렸다.

그런 날 인식한 르나르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몸을 돌려날 마주 보고 섰다.

“지금 사실 전 대공녀님께 묻고 싶은 게 많습니다. 제 아버지가 누구인진 어떻게 알고 계셨는지, 제 어머니가 누구인진 어떻게 알고 계셨는지…….”

“그건….”

“대공 각하께서 말씀하시기도 전에 모두 알고 계셨다면서요. 하지만 제가 지금 대공녀님께 듣고 싶은 건 그에 대한 설명보다도 올렌도의 저택에 돌아가지 않겠단 그 말 한마디입니다. 지금 제 마음이 어떤지 정말 모르시겠어요?”

“…….”

모르겠다.

사실 그게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대공이 황자가 될 방법을 일러줬는데.

그럼 어서 서둘러 떠나야 하는 게 아닌가?

왜 내 거취 문제 따위에 신경을 쓰고 있는 건지.

악몽과 흉터 때문일까?

‘그래서 내 안전에 이렇게 날카롭게…. 돌아왔을 때 내가 멀쩡히 살아있어야 하니.’

“대공녀님께서 이곳에 계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시면 전 대공 각하 명령을 수행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르나르, 그렇게 되면 르나르는 황자가 될 수 없잖아요!”

“상관없습니다. 제가 최근에 황자가 되고 싶었던 건 오로지 대공녀님 때문이었으니까요.”

“…저 때문이요?”

“대공녀님께서 그 자리를 특별하게 생각하시잖아요.”

르나르의 조금 날 선 반응에 얼빠진 내가 눈을 깜빡였다.

내가 황자의 자리를 특별하게 생각한다고?

‘이 세계에서 나만큼 신분제를 별거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라고 내가 억울해하는데, 문득,

「그래도 황자 전하예요. 우리가 이렇게 대하면 안 돼요.」

어젯밤 내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그것 때문에…….’

그냥 하는 소리겠지.

그레이시아나 황실을 장악하는 게 원작에서도 르나르의 최종 목표였는데.

“대공녀님께서 굳이 돌아가시겠다면 전 대공녀님을 따라가서 대공녀님 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르나르는 완고했다.

“그럼 제가…, 여기 있을게요….”

기세를 꺾은 내가 말했다.

르나르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정말이십니까?”

“네, 정말요.”

“이렇게 갑자기?”

“…….”

믿지 않는 모양새였다.

‘…통할까…?’

잠시 고민한 내가 발꿈치를 들어 르나르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놀란 그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대공녀……님……?”

르나르가 한 발짝, 두 발짝, 내게서 멀어졌다.

‘역시.’

본인이 마음먹고 다가오는 건 참을 수 있는데, 내가 먼저 다가가는 건 아직도 싫은 모양이었다.

내게 춤을 배울 때도 르나르는 그랬었다.

내가 허리에 손을 올리라고 하면 어정쩡하게 떼어버리던 그였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가 싫어하는 이런 행동을 했을 때 르나르는 얼이 빠져버린단 것이었다.

행동이 순해지고 속이기 쉬운 상태가 되는 것이었다.

“바로 떠나야 한다면서요. 빨리 돌아올 거죠?”

“……네….”

“제가 옆에 없으면 또 악몽을 꾸게 될 수도 있잖아요. 최대한 빨리 돌아와요.”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르나르의 귀 끝과 목 언저리가 어쩐지 붉었다.

실내정원 가득 핀 부겐빌리아가 그의 위에도 피어난 것만 같았다.

“르나르는 제가 안전하길 바라는 거잖아요. 그렇죠?”

“……그렇죠.”

“걱정 말아요. 전 안전할 거니까.”

“…….”

“르나르, 듣고 있는 거죠?”

“네? 아, 네…….”

잘 이해한 게 맞는 걸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 하라고 재촉하자 르나르가 날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계략남을 다루는 난 어느새 계략녀가 다 되어 있었다.

* * *

“대공녀님?! 대공녀님께서 왜 여기에…?!”

황자의 저택에 돌아온 나를 보고 더글라스가 당황했다.

르나르가 떠나기 전, 내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더글라스에게 미리 언질을 주고 떠난 모양이었다.

“제가 대공저에 머물면 반란 준비에 차질이 생길지도 몰라요. 그래서 왔어요.”

“하지만 돌아가셔야 해요. 도련님께서 아시면 가만 계시지 않으실 텐데…! 당장 돌아오실지도 모를 일이라고요!”

“르나르는 모를 거예요.”

“……네?”

“더글라스가 르나르에게 이야기하지 않을 거잖아요. 그렇죠?”

은근한 내 협박에 잠시 멍해졌던 더글라스가 이내 우는 표정을 만들어 보였다.

“하지만 대공녀님……! 이러다 대공녀님께 무슨 일이 생기시면… 전 정말 도련님께 죽습니다……!”

“저는 안전할 거예요. 올렌도 황자는 제게 해를 끼치지 못할 테니까요. 절 믿어요, 더글라스.”

내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자 더글라스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공녀님, 어떻게 그렇게 확신을….”

“그건…….”

날 보는 더글라스의 얼굴 위로 어젯밤 마주하게 됐던 올렌도의 눈빛이 떠올랐다.

그 눈빛을 마주한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의 올렌도는 적어도 내 목숨을 위험하게 하진 않겠구나.’

하지만 이 얘기를 더글라스에게 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더 걱정시킬 수 있었으니.

내가 침묵을 지키자, 더글라스가 또다시 우는 표정을 만들어 보였다.

나는 그런 더글라스에게 미안한 표정을 보여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또 내가 더글라스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나는 이 반란을 성공시킬 거예요, 더글라스. 그리고 르나르를 황자, 아니…, 황제로 만들어줄 거고요. 그러기 위해서는 더글라스의 도움이 꼭 필요해요. 부탁할게요, 더글라스. 날 좀 도와줘요.”

더글라스를 조금이라도 안심시킬 수 있길 바라며, 내가 더글라스에게 나의 뜻을 전했다.

더글라스는 잠시간 아무 말 없이 나를 응시했다.

그럼에도 내가 물러서지 않고 뜻을 굽히지 않자, 이내 포기한 더글라스가 눈을 꼭 감고 날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 * *

“으으…….”

밤새 독한 술을 잔뜩 마신 올렌도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한동안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젓던 그는 이내 그의 곁을 지키던 기사 한 명에게 물었다.

“르나르는? 죽었어?”

지난밤, 르나르에게 자객을 붙이라고 명령한 올렌도였다.

분명 르나르에겐 파면이라 말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엘로즈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을 뿐, 올렌도는 감히 그의 목에 칼을 들이민 수하를 용서하고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방금 저택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고용한 자객도 따라붙었고요.”

“방금? 내가 파면이라고 한 게 지난 밤인데?”

올렌도가 환한 빛이 쏟아지는 창 쪽을 노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에 기사가 무언가 말할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내 입을 다물었다.

이를 눈치챈 올렌도가 바닥에서 빈 술병 하나를 집어 창문 쪽으로 던졌다.

창문과 술병이 동시에 깨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갑작스러운 그 소란에 기사가 움찔하자 올렌도가 표정을 더욱 구겼다.

“알렌은 어딜 가고 이런 겁쟁이가 날 호위하고 있어?”

“알렌은…, 북부 성에 다녀온 이후 사라졌습니다.”

“사라져?”

“네.”

올렌도의 고개가 모로 기울었다.

그러고 보니 북부 성으로 가는 길에 알렌이 좀 이상했었다.

북부 출신이라길래 길잡이를 맡겼는데, 몇 번이나 갈피를 잡지 못하고 길을 헤맨 것이었다.

‘혹시 알렌도…. 르나르 녀석처럼 날 배신한 걸까…?’

올렌도가 미간을 접으며 고민했다.

알렌이 처음부터 르나르가 심어놓은 첩자였단 건 전혀 알지 못하는 올렌도였다.

그때, 말을 망설이던 기사가 드디어 마음을 정한 듯 입을 열었다.

“실은…, 르나르가 새벽에 저택 밖으로 나왔었습니다.”

“새벽? 근데 방금 나왔다는 건 무슨 소리야.”

“나갔다 돌아온 뒤…, 방금 다시 나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객은 방금만 붙였고? 새벽엔 뭘 한 거야.”

“새벽엔 대공녀가 르나르와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황자님께서 르나르를…, 대공녀 모르게 처리하라고 하셔서….”

“대공녀가?”

엘로즈가 저택 밖으로 나왔단 이야기에 올렌도의 표정이 다시 험해졌다.

올렌도를 무서워하는 기사가 몸을 움츠렸다.

‘이 여자가 정말…. 발목이 잘리고 싶은 거야?’

“그래서 엘로즈는. 어딜 간 거고 지금 어딨는데.”

“어딜 간 건지는 알 수 없습니다. 중간에 저희 쪽 미행이 두 사람을 놓쳐서…. 그런데 지금 대공녀는 황자님 저택에 있습니다. 르나르가 저택을 떠난 뒤, 대공녀 홀로 저택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뭐?”

의외의 소식에 올렌도가 눈이 커진 채 반문했다.

어젯밤 죽어라 부어 마신 복숭아 맛 술의 풍미가 그 순간 올렌도 입속을 맴돌았다.

르나르는 떠났고 엘로즈는 그의 저택에 있었다.

그 단순한 사실 하나가 이유를 파악할 새도 없이 올렌도를 기쁘게 했다.

사실 어젯밤 올렌도의 꿈속에선, 엘로즈의 뒷모습이 몇 번이고 재생되었었다.

그를 때리려는 황제를 막아서던 바로 그 뒷모습이.

세게 잡으면 부서질 것 같은 어깨.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던 밟지 않은 흰 눈 같은 머리칼.

“황자…님……?”

순간 열기로 흐려지는 올렌도의 눈동자를 본 기사가 저도 모르게 올렌도를 불렀다.

그러다 스스로 깜짝 놀라 제 입을 막는 기사를 보며, 올렌도는 한심하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이곳을 정리해. 거처를 옮길 거다.”

“어딜…, 가시게요…?”

“내가 있어야 할 곳. 내가 있었어야 했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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