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안고 있어도
“괜찮으십니까?”
실내정원에 앉아 목걸이를 들여다보던 내게 르나르가 다가왔다.
“대공녀님과 많이 닮으셨네요. 아름다우십니다.”
르나르가 내가 보던 목걸이를 슬쩍 들여다보곤 말했다.
세리나의 초상화가 담긴 목걸이.
코웰 대공이 내게 선물한 것이었다.
초상화 속 여인은 나와 꼭 같은 백발에 가까운 은발에 짙은 보라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누가 봐도 피를 나눈 사이라 믿을 수 있을 만큼 유사한 외양이었다.
“어머니가 보고 싶으십니까?”
르나르가 내게 물었다.
내가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세계에서 온 영혼을 가지고 있는 내게 세리나는 엘로즈의 친모 이상의 의미는 없었으니.
그럼에도 어쩐지 기분이 먹먹해 나는 아무런 말도 이을 수가 없었다.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후 계속 유지되고 있는 감정이었다.
핏줄조차 아닌 날 코웰 가문 가족들이 그렇게 사랑해줬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으면서, 또 고마운 감정.
또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아 고개를 뒤로 젖히니 날 바라보던 르나르가 조심스레 그의 품 안으로 날 넣었다.
토닥여주는 그의 품이 따뜻했다.
레오가 날 위로해줬을 때처럼 마력이 널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와는 조금 다른 느낌도 있었다.
간질거림.
‘가족도 아닌 남이 위로해준다는 건 이런 느낌이구나….’
전혀 알지 못했던 그 느낌을 곱씹어 느끼는데 그 순간, 누군가 실내정원으로 들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내가 르나르를 품에서 밀어냈다.
그가 순순히 밀렸다.
‘왜 날 안은 거지? 설마 나보다 다가오는 저 기척을 먼저 눈치채지 못했나?’
의아한 내가 얼굴에 물음표가 생겼다.
대답을 요구하듯 빤히 보니 르나르가 할 말이 없다는 듯 눈동자를 도르륵 굴려 내 시선을 피했다.
다음 순간, 커다란 야자수를 돌아 에반이 나타났다.
“로……! 두 사람……, 어……? 방금까지 뭐 하고 있었어……?”
나와 다소 가까운 거리에 있는 르나르를 보며 에반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 작은 머리통 속에 무슨 상상이 들어찬 건지 심히 궁금해지는 표정으로.
“아무것도.”
르나르가 앉은 자리로부터 내가 조금 멀어지며 말했다.
르나르가 그런 나를 곁눈질로 살폈다.
“아무것도……. 아무튼, 로즈. 아버지께서 널 찾으셔.”
“아빠가 날?”
“응. 지금 바로 집무실로 가봐.”
그때, 르나르가 별안간 끼어들었다.
“대공녀님, 저도 각하를….”
대공을 만나게 해달라더니 정말 대공에게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혹시 본인이 우리 대신 반란을 일으킬 테니 지지해달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그 순간, 에반의 날 선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께서 로즈만 데리고 오라고 하셨어.”
그러더니 날 일으켜 당겨 제 뒤에 숨겼다.
르나르 눈초리가 미세하게 날카로워졌다.
“르나르. 제가 아버지를 만나고 르나르를 따로 만나 달라고 부탁할게요. 잠시만 에반과 같이 있겠어요?”
내 절충안에 르나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반은 반발했다.
“내가 왜! 로즈, 내가 왜 저 자식과 같이 있어야 하는데!”
“손님이잖아, 에반. 우리 집에 온 손님에겐 잘 해줘야지. 에반이 르나르에게 정원을 구경시켜줄래? 에반은 친절하잖아, 응?”
에반이 화가 많이 난 것 같아 그의 얼굴을 붙잡아 날 보게 하고 차근차근 아이 달래듯 달랬다.
이에 한껏 찡그렸던 에반의 표정이 점점 풀어졌다.
그런데 나는 보았다.
르나르의 한쪽 눈썹이 비뚜름히 위로 올라가 있는 것을.
에반을 나와 같이 데리고 가야겠단 위기감이 드는 건….
내 지나친 걱정인 걸까?
* * *
“아빠, 절 찾으셨다고요?”
내가 대공의 집무실에 들어섰다.
서류를 보던 대공이 고개를 들고 날 향해 싱긋 웃었다.
중년이 되어도 여전히 눈이 부신 코웰 대공이었다.
‘처음 태어나서 저 얼굴을 보고 정말 놀랐었는데….’
지금의 코웰 형제들과 유사한 그 시절 코웰 대공을 떠올리며 내가 대공을 마주 보는 의자에 앉았다.
나는 대공의 청옥색 벽안과 다시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에게 궁금했던 걸 물었다.
“아빠. 르나르와 아빠가 아는 사이인가요?”
“어제 이후로. 어제 날 찾아왔더구나. 본인이 검술 실력이 뛰어나니 우리 가문의 반역을 돕고 싶다면서.”
“혹시…, 다른 얘기는 안 하던가요?”
“다른 얘기?”
본인이 반란을 일으키겠다든지, 본인을 황제로 만들어달라든지.
대공이 고개를 저었다.
‘……왜지…?’
대공이 혼란스러워 흔들리는 내 눈동자를 직시했다.
그러더니 별안간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을 했다.
“그 청년 말이다. 르나르라는 청년. 그 청년이 혹시…, 엘리 루즈벨트의 아들이니?”
대공이 르나르의 친모를 알고 있었다.
한동안 대공과 내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내 정신을 차린 내가 대공에게 물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닮았더구나. 예전에 플루토나 제국에서 만난 엘리 루즈벨트 공녀와 무척. 첫눈에 알 수밖에 없었을 만큼.”
“그럼 르나르의 친아버지가 누군지도 아빠는 혹시 알고 계세요?”
“그래. 너도 알고 있는 거니?”
“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었는데….”
나는 반역이 성공한 뒤 르나르를 황제의 자리에 앉히는 게 어떨지를 대공에게 물었다.
그런데 대공은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답이자 질문을 내게 내놓았다.
“황제의 자리에 누굴 앉힐지는 차차 생각해보고, 그보다 우리가 반역을 일으키기 전에 먼저 저 청년을 황자로 만들면 어떨까? 우리의 반역이 꼭 성공하리란 보장이 없으니. 저 아이가 앞서 황자가 되어 훗날의 우리를 위한 보험이 되어줬음 좋겠는데. 물론 저 청년도 동의한다면 말이지.”
“르나르를 황자로 만드신다고요? 그게 가능만 하다면 당연히 그게 더 좋을 것 같은데…. 근데 반역 전에 르나르를 황자로 만들 방법이 있을까요?”
내가 묻자 코웰 대공이 빙그레 웃었다.
마치 그는 계획이 다 있다는 듯.
“그 아이를 들어오라고 해주겠니? 같이 얘기 나눠봐야겠구나.”
나는 르나르를 데려오기 위해 대공의 집무실 밖으로 직접 나섰다.
그런데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정원의 에반은 들어서는 날 발견하더니 잽싸게 달려와 내 뒤에 숨었다.
그러곤 마치 구원자를 만난 것 같은 다급한 목소리로 귀에 속삭였다.
“엘로즈…! 치워줘, 저 끔찍한 녀석을……, 어서 내 앞에서 치워줘……!”
“대공자님, 끔찍하다니요. 저 상처 받습니다.”
내게 에반이 속삭인 내용을 르나르가 그대로 읊자, 에반이 경악하며 내 머리칼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르나르는 소드 마스터라 귀가 밝을 텐데.
그걸 모르니 이 상황이 더 충격적인 모양이었다.
“저리 가……! 난 널 좋아하지 않아……. 난 여자를 좋아해……!!”
그런데 에반이 갑자기 르나르에게 이상한 소리를 했다.
의아해진 내가 르나르를 보니, 르나르가 저도 잘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로즈, 너만 두고 가서 미안해. 그래도 넌 괜찮을 거야. 넌 여자고, 저 녀석 남색가니까…!”
내게 빠르게 속삭인 에반이 정원 밖으로 쏜살같이 사라졌다.
내가 그런 에반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는데 뒤에서 쿡 하는 웃음소리가 났다.
반사적으로 돌아보니 르나르가 나와 마주친 시선을 피하며 뒷짐 진 채 눈동자를 굴렸다.
명백한 딴청이었다.
위로 휘어진 입꼬리는 숨기지 못한 채였다.
“르나르, 에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아무 짓도 안 했습니다.”
“거짓말하지 않기로 했잖아요.”
“대공녀님도 거짓말 잘하시지 않습니까.”
“제가요?”
“아까, 대공자님께. 저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그야 정말 아무것도 안 했으니까요.”
“아, 그러십니까?”
눈썹 한쪽을 삐딱하게 올린 르나르가 날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그러곤 허리를 숙여 나를 품에 넣었다.
그의 단단한 팔이 내 허리를 휘감았다.
다른 손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안 하고 있습니다만.”
삐딱하게 답한 르나르가 내 머리칼을 한 움큼 쥐더니 그 위로 입술을 짓눌렀다.
그러곤 더욱 불만스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봐요, 아무렇지 않아 하시잖아요? 에반 대공자님께선 경악하시던데.”
“르나르, 에반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춘 거예요?”
“흉내만 냈습니다.”
“그런 흉내를 대체 왜…….”
“괴롭혀 드리려고요. 대공녀님과 제가 함께 있는 걸 마음에 안 들어 하시니까. 그리고 또….”
“또…?”
“절 마음에 안 들어 하시니까.”
순간 나는 멍해졌다.
르나르가 평소 능글맞아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 또한 상처받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우리 오빠들이 나를 과잉보호하며 르나르를 적대시한 게 그에게 상처가 된 모양이었다.
그 생각이 드니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 내가 르나르의 품에서 빠져나와 그의 볼을 쓰다듬었다.
내가 에반을 달랠 때 잘하는 행동이었다.
르나르는 아까의 에반처럼 뚱한 표정을 짓고 있더니, 내 손이 계속 그의 볼을 어루만지자 이내 눈매가 스르르 부드럽게 풀렸다.
나는 꼭 오빠가 한 명 더 생긴 것 같은 느낌이었다.
“미안해요, 르나르. 오빠들 대신 내가 사과할게요. 그렇다고 에반을 괴롭히진 말아요. 르나르에게 잘 해주도록…, 내가 오빠들한테 잘 얘기해볼 테니.”
“그래 주시겠습니까? 그럼 제가 이렇게 대공녀님을 안고 있어도…, 형님들이 뭐라 하시지 못하게 되는 건가요?”
말하는 르나르가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던 날 다시 안았다.
그런데 형님들?
‘아니, 그보다도…. 오빠들 앞에서 날 이렇게 안고 있겠다는 건….’
“어…. 그건…….”
“괜찮지 않아요? 그래도 되는 걸로 해주기로 하신 거였잖아요.”
“…제가요?”
내가?
내가 언제?
그래도 되는 걸로 해주기로 했었지?
“괜찮잖아요. 약속하셔 놓고.”
르나르가 날 안은 채 어깨를 가볍게 흔들며 속삭였다.
꼭 츄르를 더 달라고 애교 부리는 길고양이를 품에 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잠깐.
르나르가 내게 뭘 요구하고 있었더라…?
‘어…. 음…. 어…….’
기억이 잘 나지 않아 미간을 찌푸리니, 르나르가 그런 날 내려다보며 비죽 웃었다.
이내 그의 손가락이 내 허리선을 간질이기 시작했을 때야 나는 정신을 번쩍 차릴 수 있었다.
‘그래 맞아, 코웰 대공!’
“르나르! 아버지께서 르나르를 불러오라고 하셨어요.”
떠올린 내가 놀라 소리치듯 말하자 르나르가 미간을 접었다.
“각하께서 저를요?”
갑자기 별 생뚱맞은 소리를 다 한다는 듯.
그러다 본인이 먼저 대공과의 만남을 원했단 걸 기억해냈는지 이내 표정이 진지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