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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46화 (46/100)
  • 46화

    사랑받는 존재

    푸른 새벽빛이 엘로즈의 연한 은발을 물들이기 시작한 시각.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르나르는 제 품에 안겨 쌔근쌔근 잠든 엘로즈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잘 자지?’

    불만이 생긴 르나르가 엘로즈 귓불을 물었다.

    “으으….”

    아픔을 느낀 엘로즈가 잠결에 낑낑댔다.

    피식 웃은 르나르가 잇자국이 생긴 귓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아. 잠든 사람에게 입을 맞추는 건 잘못된 거라고 했었는데. ……알 게 뭐야.’

    피식, 르나르 입술 새로 다시 한번 가벼운 바람 새는 소리가 흘렀다.

    세상의 도덕적 잣대는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잠든 사람에게 입 맞추는 게 잘못된 것이라고 엘로즈가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엘로즈만 모르게 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얄미울 정도로 깊이 잠들어 있었으니….

    ‘어떻게 이렇게 잘 자지….’

    다시 생각하니 또 얄미워져 르나르가 엘로즈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귓불을 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때, 엘로즈가 깨려는 건지 눈꺼풀을 찡긋했다.

    흠칫한 르나르가 얼른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그러고 잠시 참고 있으려니, 가까운 곳에서 엘로즈의 향이 느껴졌다.

    어젯밤 그녀의 어깨와 쇄골에서 느꼈던 베이비파우더 향이었다.

    ‘엘로즈의 체향….’

    그녀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향은 진득하게 르나르의 후신경을 파고들었다.

    아래쪽으로 피가 쏠릴 것 같았던 르나르는 결국 이제 막 일어난 척 눈을 떴다.

    “어? 일어났어요?”

    새가 지저귀는 것 같은 엘로즈의 맑은 목소리가 새벽 공기 속으로 종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품 안의 그녀를 내려다보는 르나르 눈매가 부드러워졌다.

    “집에 몰래 다녀올 생각인데 방법이 있을까요?”

    연보라색 눈동자를 반짝이던 엘로즈가 대뜸 물었다.

    르나르는 조금 허무해졌다.

    “그 질문을 하려고 계속 보고 계셨던 겁니까?”

    “어? 제가 보는 걸 알고 있었나요?”

    “깨우셔도 됐는데.”

    “그럴까 했는데… 잠을 잘 자지 못한 것 같아서요.”

    엘로즈가 르나르의 눈 아래를 쓸었다.

    그의 눈 밑이 연하게 푸르렀다.

    꼭 이 파란 새벽빛에 물든 듯.

    또 오두막집에서의 아침처럼.

    “워- 워…. 진정하세요.”

    르나르가 말 달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르나르 미간에 가벼운 주름이 졌다.

    엘로즈는 그런 르나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참을 수 있던 게 아니었던가?’

    스킨십 혐오증을 극복한 줄만 알았다.

    컨디션 때문에 입을 맞추겠다고 직접 말하기도 했고, 지난밤에는 잡아먹을 듯 그녀의 입술을 탐하기도 했으니.

    그런데 그러고 보니 엘로즈를 안은 르나르와 엘로즈 사이에 미세한 틈이 있었다.

    ‘역시 아직… 혐오증이 남아는 있는 건가…?’

    엘로즈가 씁쓸해했다.

    한편, 르나르는 머릿속으로 시를 읊는 중이었다.

    그의 몸 상태를 모르고 겁 없이 몸을 부딪쳐 오는 여자를 놀라지 않게 하려고.

    르나르가 보기에 저 여자는 그쪽으로 지식이 아예 없었다.

    마치 사과가 둥글고 빨간 과일인 건 아는데 그게 어떤 맛이고 얼마나 다양한 방법으로 그것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지는 모르는 여자 같았다.

    그러니 손가락을 빨고 어깨를 물어도 그저 애교부리는 고양이 보듯 눈만 깜빡이는 거겠지.

    한껏 열에 들떠 야한 얼굴을 하고도 인지하지 못한 채 무구한 연보라색 눈동자만 깜빡이던 그녀를 생각하면 르나르는 실소가 절로 흘렀다.

    실소만 흘렀으면 다행인데 몸이 또 반응했다.

    결국 르나르는 깊은 한숨을 엘로즈의 머리칼 사이에 풀어놓고 그녀를 품에서 놓고 몸을 일으켰다.

    지금은 아침의 종달새 같은 그녀의 질문에 답해줘야 하는 시간이었다.

    “꼭 몰래 다녀오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올렌도와의 사이도 틀어졌는데, 편하게 다녀오시죠.”

    “올렌도요? 이제 황자님이라고 부르지 않기로 한 거예요?”

    “그렇게 부르기… 싫어져서요.”

    「그래도 황자 전하예요, 우리가 전하를 이렇게 대하면 안 돼요.」

    르나르 머릿속에 올렌도가 황자인 걸 분명히 인지하던 엘로즈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르나르 표정이 의미심장해졌다.

    “이참에 아예 집에 머무시는 건 어떠시겠습니까? 어제 일을 겪고 보니 제가 없을 때 올렌도가 또 저택에 들이닥칠 수 있겠단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건 아버지와 오빠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거예요. 제가 아예 집에 가버리면 올렌도 황자가 가만있지 않을 텐데, 반역 준비 중에 큰 싸움이라도 벌어지면 미리 세워둔 계획에 분명 차질이 생길 테니….”

    때가 되기 전까지는 현 상태를 유지하고 싶단 얘기였다.

    때가 되어 사냥감의 숨통을 확실히 조르게 될 수 있기 전까지는.

    르나르는 이성적으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맞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감성적으로는 아니었다.

    어제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는 꼴은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귀가가 조금만 늦어졌으면 어떻게 됐을까?’

    그 생각이 들면 아찔했다.

    이에 르나르는 침묵을 지키며 엘로즈 의견에 동조해주지 않았다.

    대신 의외의 부탁을 했다.

    “대공녀님, 대공 각하를 뵈러 가시는 거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저도 각하를 뵐 수 있을까요?”

    * * *

    레오로부터 편지를 받고 내가 곧 방문할 것을 예상한 오빠들은 이른 새벽부터 저택을 찾은 날 반갑게 맞아줬다.

    하지만 오빠들이 반갑게 맞이한 건 나뿐이었다.

    르나르까지가 아니라.

    “이 자식이 왜 여기 있어? 너. 내가 로즈 봐도 모른 척하라고 했지. 근데 왜 같이 있는 거야? 기억력이 없어?”

    르나르를 보자마자 에반이 대뜸 시비를 걸었다.

    내 곁에 틈 없이 붙어선 그가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르나르는 제 잘못이 뭔지 모르겠다는 듯 에반을 향해 예쁘게 방긋방긋 웃을 뿐이었다.

    “안녕하세요, 에반 대공자님. 예전에도 잘생기셨지만 오랜만에 뵈니까 더 잘생겨지셨네요.”

    불쑥 칭찬하는 말에 에반이 당황해 입만 벙긋거리는데 뒤이어 나타난 미르엣이 이해가 안 된단 표정을 지었다.

    “르나르…, 경…? 자네가 왜 로즈와…. 내가 지금 꿈을 꾸나…? 그러고 보니 흑발에 적색 눈동자…? 북부에서 로즈를 구했다는 사내가 설마?”

    “정확히는 적갈색이지만요.”

    르나르가 가볍게 웃었다.

    그런 르나르를 대공과 함께 나타난 겔리온이 호기심과 경계심이 동시에 담긴 눈빛으로 봤다.

    그렇다면 대공은?

    대공은 르나르를 보고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대공은,

    “오늘은 또 무슨 일이지?”

    “또 뵙게 되었네요.”

    라고 르나르와 인사 비슷한 것을 나눌 뿐이었다.

    놀랍게도 두 사람은 서로를 알고 있었다.

    * * *

    “말해주세요, 저에 관해. 토씨 하나. 빠짐없이.”

    단호한 내 요구에 새하얀 아침볕이 들기 시작한 코웰 가문 응접실에 은근한 긴장감이 조성됐다.

    르나르를 보며 곤란해하는 네 쌍의 벽안을 인지한 내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괜찮아요, 저 사람도 알고 있어요. 제가 마녀라는 걸 말이죠.”

    “전 마법사입니다.”

    르나르가 대뜸 말했다.

    코웰 가문 남자들이 당황했다.

    내가 괜찮겠냐는 눈빛으로 르나르를 보자, 르나르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내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 * *

    한참 이야기를 듣고 났을 때 사위는 어느새 여름 끝자락의 선연한 햇살로 가득 차 있었다.

    내 입은 작게 벌어진 채 다물릴 줄 몰랐다.

    듣게 된 내용들이 꽤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에드워드 코웰 대공은 내 친아버지가 아니었다.

    정확히는 코웰 가문 남자들 모두 나와는 혈연적으로 아무 관련이 없었다.

    내 친모는 플루토나 제국에서 온 세리나라는 마녀, 친부는 플루토나 제국에서 마녀와 마법사의 반란을 주도한 마법사라고 했다.

    두 사람 모두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그래도 레오와 나는 세리나를 진짜 어머니로 여겼었어. 제니퍼 코웰 대공작 부인이 아니라.”

    과거를 회상하는 겔리온의 벽안이 깊어졌다.

    자신의 자리를 하녀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한 제니퍼 코웰 대공작 부인은, 코웰 가문의 아이가 차기 황제가 된단 신탁을 얻고 대공과 결혼한 것이라고 했다.

    비록 정략결혼이긴 했지만 대공을 사랑하는 척 연기하며, 신탁 얘긴 비밀로 했었다고.

    하지만 에반까지 낳고 대공이 반역에는 뜻이 없음을 알게 되자, 게다가 그 시기 황후가 결혼 10년 만에 올렌도까지 임신하자, 9살, 8살에 불과했던 레오와 겔리온을 학대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러다 코웰 대공에게 들키자 자살했다고.

    “목을 맸지. 나와 레오 눈앞에서.”

    겔리온 벽안이 쓸쓸한 빛으로 가라앉았다.

    세리나는 날 임신한 상태에서 코웰 대공을 따라 그레이시아나 제국으로 왔다고 했다.

    제니퍼 코웰 대공작 부인이 목을 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임신한 상태라 정이 더 많았던 그녀는 갓 어머니를 잃은 레오와 겔리온을 진짜 어머니처럼 보살펴줬다고 했다.

    당시 1살이었던 미르엣과 갓 태어난 에반은 세리나를 기억하진 못했지만, 그들 또한 레오와 겔리온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그녀를 어머니처럼 느끼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세리나가 날 낳고 죽어가며 대공, 레오, 겔리온에게 날 맡겼을 때, 그들은 코웰 가문의 딸로 날 키우겠다고 세리나에게 약속했다고.

    “왜, 내게….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은 거야….”

    내 목소리가 떨려왔다.

    “핏줄 같은 것과 상관없이 우리는 널 친동생으로 생각하니까…!”

    미르엣이 거의 소리치듯 다급하게 말했다.

    뒤이어 에반이 잔뜩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말 못 해서 미안해. 하지만 말을 하면……, 너와 우리 사이에 벽이 생길 것만 같아 너무 무서웠어. 하지만 그 벽을 우린 정말 원치 않았어. 그래서 네가 아무것도 모르고 자라주길 바랐는데……. 그게 우리 욕심이었다면……, 정말 미안해…….”

    또르르. 에반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욕심……. 욕심이라니…….’

    내가 마음 편히 클 수 있도록 내 출생의 비밀을 숨긴 것을 내가 어찌 그들의 욕심이라 할 수 있겠는가.

    “아냐, 욕심이라니…. 오히려 내가…, 고마워……. 진짜 동생도 아닌데 나를 이렇게 잘 키워줘서…. 사랑해줘서….”

    콧잔등에 짠한 감각이 밀려오더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엘로즈, 네가 왜 우리 동생이 아니야! 피를 나눠야만 진짜 남매라고 누가 그래!”

    눈시울이 붉어진 겔리온이 날 향해 소리쳤다.

    뒤이어 에반이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래, 로즈!! 누가 뭐래도 넌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내 동생이야!! 로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에반이 눈물을 펑펑 쏟으며 달려와 날 안았다.

    에반을 토닥이며 살펴보니 미르엣의 벽안이 곧 눈물을 쏟아낼 듯했다.

    겔리온 또한 연신 눈가를 두드리는 중이었다.

    그때, 잔뜩 거칠어진 코웰 대공의 목소리가 들렸다.

    “로즈, 내 피가 섞였든 아니든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란다.”

    대공까지 그렇게 말하자 나는 더눈물을 참을 수가 없게 됐다.

    내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나는 이 세계에서 무척 사랑받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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