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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45화 (45/100)
  • 45화

    필요하다면 도울게요

    “저는 괜찮아요.”

    “제가 괜찮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근데 제가 괜찮다니까요?”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괜찮지가 않아서 그럽니다.”

    고요한 방안에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르나르가, 올렌도가 피와 침을 뱉어놓은 방에서 나를 재울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닦으면 되잖아요.”

    “닦아도 더럽습니다.”

    “그렇다고 저보고 여기서 자라고요?”

    주변을 가리킨 내가 어이가 없어 실소했다.

    르나르가 나를 데리고 온 곳은 그의 방이었다.

    방을 바꿔서 자자는 걸까?

    “제가 여기서 자면 르나르는 어디에서 자려고요.”

    “저는 대공녀님 옆에서 대공녀님 주무시는 걸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네?”

    잘못 들었나 확인하게 됐다.

    자신이 내 방에서 자겠다는 것도 아니고 나를 여기서 재우고 내가 자는 걸 지켜보겠다니….

    “누우십시오.”

    하지만 르나르는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는 듯 단호하게 내 어깨를 잡아 그의 침대 위에 눌러 앉혔다.

    “제가 이 침대를 쓰면 르나르는 어디 있으려고요.”

    “저는 여기 앉아 있으면 됩니다.”

    르나르가 침대 근처에 있던 마호가니 의자를 끌어 당겨와 앉았다.

    당당하게 팔짱을 끼는 모습을 보니 그러고 밤새워 지켜보기라도 할 모양이었다.

    “……침대가 넓으니 그냥 침대로 올라오세요.”

    잠깐의 고민 후 내가 말하자, 르나르의 몸이 묘하게 굳어졌다.

    “뭐 어때요. 이미 같이 누워본 사이에.”

    이미 오두막에서 한 침대를 썼던 사이였다.

    별스럽지 않게 생각한 이불 속으로 들어가 몸을 누이는데, 내가 자는 걸 밤새워 지켜보겠다던 호기로운 르나르는 어쩐 일인지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망설였다.

    “왜 안 올라와요?”

    “…진심이십니까?”

    “그럼 진심이죠.”

    “…….”

    잠시 조용했던 르나르가 혀를 내 아랫입술을 축였다.

    “…그럼 불을 끄겠습니다.”

    르나르가 말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불이 모두 꺼진 방안은 이내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였다.

    그나마 사물의 형체라도 구별할 수 있었던 건 닫힌 커튼 사이로 고집스레 스며든 달빛 덕이었다.

    황자의 저택 침대는 그 밤 오두막 침대처럼 삐거덕거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르나르가 올라오자 침대 매트리스는 르나르 쪽으로 조금 기울어졌고, 나는 이를 통해 르나르가 침대 위로 올라온 걸 알 수 있었다.

    그가 자리 잡고 눕자 기울었던 침대 매트리스가 원상 복귀됐다.

    쿵쿵-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 소리가 맑은 어둠 속을 낯설게 파고들었다.

    은은하게 풍겨오는 달고 시원한 향을 느끼며 내가 르나르에게 인사를 건넸다.

    “잘 자요, 르나르.”

    그러자 르나르가 당황스럽다는 듯 되물었다.

    “그냥 주무시는 겁니까?”

    “……네? 그냥 자지 않으면요?”

    “…….”

    “르나르?”

    “아닙니다, 대공녀님. 좋은 꿈 꾸세요.”

    르나르의 낮은 한숨 소리가 어둠이 깔린 적막 속으로 흩어졌다.

    풀벌레 우는 소리가 먼 곳에서 들려왔다.

    어느새 끝이 다가온 여름밤은 공기가 제법 선선했다.

    오두막에서 한 침대를 썼으니 그것과 다를 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두막에서의 밤과 지금의 밤사이엔 한 가지 큰 차이가 있었다.

    조금 피곤하긴 했지만 난 그때만큼 피곤하지는 않았고, 그렇기 때문인지, 그때만큼 쉬이 잠들지가 않았다는 것.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데 아까보다 가까운 곳에서 달고 시원한 향이 느껴졌다.

    왜인지 날 보는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 가만히 입 모양으로 르나르를 불러보니,

    “네, 대공녀님.”

    르나르의 대답이 곧바로 들려왔다.

    “…….”

    “대공녀님?”

    내가 눈을 떴다.

    이미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 가득 옆으로 누운 채 머리를 손으로 받친 르나르가 보였다.

    “설마 계속 그러고 나를 보고 있었던 거예요?”

    “…….”

    “자라고 했잖아요.”

    “대공녀님께선 잠이 오십니까?”

    “…….”

    “아니신 것 같은데. 대공녀님께서도 지금 못 주무시고 계시잖아요.”

    르나르가 슬쩍 미소 지은 채 삐죽,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순간 나는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생겼다.

    “혹시 오두막에서 제게 입을 맞추셨었나요?”

    꿈인 듯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었다.

    특히 아주 가까운 곳에서 코끝을 간질였던 그 달고 시원했던 향을 떠올려보면.

    “알고…, 계셨습니까…?”

    내내 당당하던 르나르에게서 약간의 당황스러움이 묻어나왔다.

    잠든 사람에게 입을 맞추는 게 잘못이란 걸 본인도 알긴 아는 모양이었다.

    “…르나르 마음은 이해해요. 사실 아까 르나르 얘길 듣고 더욱 깨닫게 되었어요. 악몽 때문에, 아픔 때문에, 혹은 컨디션 때문에. 르나르는 나와 닿아야 할 수밖에 없겠구나. 그게 좋든 싫든 간에 말이죠.”

    “…….”

    “필요하다면 도울게요. 사실 나도 르나르와 입을 맞추고 나면 컨디션이 좋아지는 걸 느꼈었어요. 마력이 안정되고 강해지는 것 같더라고요. 하지만 그래도 적어도 입을 맞추는 건 제가 깨어있을 때 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잠들어 있을 때는 뭔가 당한 것 같은 느낌이라….”

    내 말이 끝나자 르나르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천천히 눈을 깜빡이다 이내 내게 진지한 표정으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잠들어 계셨을 땐 제가 참았어야 했는데….”

    기가 죽은 그 모습이 꼭 토끼나 다람쥐 같았다.

    그런 아주 작은 초식동물.

    올렌도를 마주하고 맹수 같던 그가 이렇게도 보일 수 있는 게 신기했다.

    나는 그에게 조금 더 관대해질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 아무튼 기억해줘요. 잠든 사람에게 입을 맞추는 건 잘못된 거예요.”

    초식동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초식동물이, 갑자기 육식동물의 안광을 빛내며 내게 물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깨어있는 분한테는요?”

    “…….”

    “깨어있는 분한테는 괜찮은 거 맞죠?”

    당황한 내가 눈을 깜빡였다.

    내 입으로 도울 수 있다고 말하긴 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훅 들어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때, 르나르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내 옆으로 팔을 짚는 그를 피하다 몸이 뒤로 기울어지며 나는 어느새 그의 아래 깔린듯한 자세가 됐다.

    “…그거 아십니까? 제 몸의 흉터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정말이요?”

    “악몽은 거의 꾸지 않게 된 지 이미 좀 되었지만…. 흉터에는 지금껏 영향이 없었거든요?”

    “…….”

    “그런데 대공녀님과 밤을 보낸 그 날 이후 흉터들이 옅어지기 시작했습니다.”

    “…….”

    “이 정도면 충분할까요? 제가 지금 깨어계신 분한테 입을 맞춰야 하는 이유? 같이 밤을 보내고 싶은 이유?”

    내가 내 옆을 짚은 르나르 커다란 손을 내려다봤다.

    어둠 때문에 흉터가 잘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뜬 내가 손을 뻗어 르나르의 손가락 위 흉터를 훑었다.

    르나르 말이 진짜인지, 흉터가 정말 사라지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그런데 그때, 르나르가 나직한 욕설을 내뱉었다.

    당황한 내가 눈을 홉뜨는데 숨소리가 거칠어진 르나르가 조급하게 입을 맞춰왔다.

    “……!”

    놀란 내가 그의 어깨를 잡자 르나르는 내 손목을 잡고 날 뒤로 눌렀다.

    뒤통수에 침대 매트리스가 닿았다.

    커진 눈을 깜빡이는데 뿌리가 뜨거운 무언가가 내 입속으로 들어왔다.

    ‘밀어내야 하는데….’

    밀어낼 수가 없었다.

    마력이 깨어났기 때문인지 내게도 그의 입맞춤이 무척 유혹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생경한 감각이었다.

    흥분시키면서도 진정시키는 느낌.

    르나르가 혀를 얽어주자 이따금 내 몸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느껴지던 마력이 잠잠해졌다.

    이물질이었던 것이 마치 내 혈액의 일부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마력은 약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해진 것 같았다.

    생명력을 내뿜으며 내 온몸을 순환하는 그것은 날 고양되게 만들었고, 또 안정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 느낌과는 별개로 온몸이 찌릿해지는 감각도 있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황홀’.

    ‘이것 역시 마력의 작용인 걸까…?’

    르나르를 밀어내려던 손은 그의 단단한 어깨 위를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내가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면서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르나르가 다시 한번 욕설을 뱉었다.

    그러더니 내 어깨를 아득 물었다.

    “……아!”

    너무 아파 눈물이 핑 돌 것 같았다.

    대체 어깨는 왜 무는 거지?

    화가 난 내가 도끼눈을 뜨는데, 르나르는 물었던 내 어깨를 거쳐 내려간 빗장뼈에 이리저리 입을 맞추고 있었다.

    어쩐지 숨이 가빠지며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그 순간, 르나르의 뜨거운 손이 내 허벅지에 닿았다.

    그의 손이 내 잠옷 치마 아래로 들어왔던 것이었다.

    당황한 내가 치마 위로 그의 손을 눌렀다.

    르나르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맑은 적갈색 눈동자가 혼탁한 열기로 잔뜩 흐려져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대공녀님?”

    “왜냐뇨, 지금 손이…!”

    “손이 왜요? 손 여깄는데?”

    르나르가 내 뒷목을 붙잡고 있던 손을 들어 내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아, 아니…. 그 손 말고…….”

    흐려지는 내 말끝을 따라 르나르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입술 새론 정돈 안 된 숨이 흐르고 있었다.

    “필요하면 도우시겠다면서요.”

    “지금 필요해요?”

    “전 언제나 대공녀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제가 말한 도움은 입맞춤….”

    “정말 그게 끝이라고요? 그런 얼굴을 하고?”

    열띤 얼굴의 르나르가 피식 웃으며 실소를 흘렸다.

    ‘왜? 내 얼굴이 어떤데?’

    당황한 내가 거울을 찾기 위해 두리번댔다.

    그러자 르나르가 내 턱을 붙잡아 그를 보게 했다.

    꼭 지금 봐야 하는 건 자기뿐이라는 듯.

    “곤란한데요, 그 얼굴을 하고 이렇게 선을 그어버리시면.”

    “…제 얼굴이 어떤데요?”

    “예뻐요. 아주 예쁜 얼굴. 다른 사람들은 몰랐으면 하는 얼굴.”

    르나르가 허리를 숙여 내게 다시 입을 맞췄다.

    입술끼리만 닿았을 뿐인데 느낌이 이상해 내가 몸부림치니, 르나르가 살짝 입술을 떼고 날 노려보며 말했다.

    “입맞춤은 된다면서요.”

    “하지만 지금 이건…. 뭔가 이상….”

    “잠깐. 가만있어요. 몸부림치면 닿잖아.”

    르나르가 아랫입술을 물었다.

    그런데 얼마나 꽉 물었는지 내가 다 아픈 느낌이 났다.

    “…아, 잠시만요. 피 나요, 그러다.”

    내가 손을 들어 르나르 아랫입술을 눌렀다.

    이미 입술이 패여 피가 맺혀있었다.

    그러자 르나르가 내 손가락을 물었다.

    마치 우리가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났을 때처럼.

    하지만 그때와 달리, 르나르는 내 손가락을 사탕 굴리듯 입안에서 굴리기 시작했다.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가 마침내 내 손가락을 놓아주었을 때, 그의 입술과 내 손가락 사이엔 기다란 은색 실이 생겨 달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대공녀님, 이런 거……. 다른 사람들에겐 허락해주시면 안 됩니다.”

    “……이런 거요?”

    “이런 거요.”

    쪽-

    “이런.”

    쪽쪽-

    “거.”

    쪽-

    르나르 입술이 내 손가락에 연이어 닿았다 떨어졌다.

    내가 나도 모르게 눈매를 찡그리자 르나르가 입가를 휘어 웃었다.

    “아예 못 느끼시는 건 아닌가 보네요. 혹시나 했는데.”

    이해 못 한 내 고개가 모로 기울어지는데 숨소리가 조금 안정된 르나르가 부드럽게 나를 안아왔다.

    “이 정도는 괜찮은 거죠? 이상하지 않잖아요.”

    “이것도 조금 이상….”

    “쉬이…잇.”

    달래는 듯한 르나르의 속삭임이 내 귓속을 간질였다.

    혼란에 휩싸인 내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짓 안 할게요. 대신 움직이지 마세요. 움직이시면 장담 못 할 것 같으니.”

    르나르가 재워주려는 듯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몸속 마력이 신나게 널뛰었다.

    레오의 위로를 받았을 때와 비슷했다.

    북돋워지며 강해지는 느낌.

    하지만 어쩐지 완전히 같은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르나르의 달고 시원한 향이 여름 햇빛에 잘 마른 이불 냄새에 섞여들었다.

    차분한 숨이 남은 르나르와 내 위로 은은한 달빛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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