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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44화 (44/100)

44화

눈빛

“다 알고 있었어? 내가 황자라는 거?”

“…….”

나는 순간 할 말을 잃게 됐다.

그런 날 가늘게 뜬 눈으로 노려보던 올렌도가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 쳤다.

“하, 재밌었어? 나 놀리는 거?”

“전하.”

“내가 널 가지고 노는 줄 알았더니, 네가 날 가지고 놀고 있었구나? 어때? 제국 황자를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논 기분이?”

“저는 전하께서 협조해달라고 하셨기에 협조해 드렸을 뿐입니다. 전하께서 진짜 황자님이신 건 폐하께서 전하를 대하시는 태도를 보고….”

“아니, 아니잖아! 너 내가 폐하를 아버지라 불러도 하나도 놀라지 않았잖아! 내가 황자인 것 이미 다 알고 있던 거잖아!”

“…….”

“그러면서…. 다 알고 있었으면서 내 신하랑 놀아났다고?”

‘놀아나?’

순간 이해가 가지 않았던 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르나르로 하여금 날 꼬시게 했던 게 올렌도가 아니었던가…?’

내가 올렌도의 연하늘색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차분히 보고 있으려니 얼기설기 얽힌 감정의 실타래가 들여다보이는 것만 같았다.

북부 성에서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한 본인의 무능력함에 대한 자기혐오.

황제에게 가지고 있는 두려움. 원망.

코웰 부인을 향한 분노.

그 모든 쓰레기 같은 감정이 나에게로 쏟아지고 있었다.

“……한심해.”

“…뭐?”

“당신, 한심하다고요.”

내가 올렌도의 상태를 한마디로 정의 내려줬다.

대공과의 약속을 어기고 레오를 몰래 치려 한 것에 대한 혐오까지 더한 정의였다.

그런데 그런 내 정의에 무척 공감되었던지, 올렌도가 비소를 흘리며 내게 다가섰다.

“겁이 없네, 다시 말해봐.”

“황자님께서 들으신 그대롭니다.”

“똑바로 다시 말해보라고!”

올렌도가 한 손으로 내 턱을 틀어잡았다.

“아…….”

생각보다 강한 악력에 신음이 절로 흘렀다.

하지만 나 또한 물러서진 않을 생각이었다.

‘레오를 건드리려고 했던 거, 나도 용서 못 해.’

“당신, 한심해 정말. 황제 폐하한테는 왜 이렇게 성질 안 부렸어? 내가 여자여서 만만하지?”

붕어 입이 된 상태라 발음이 다소 뭉개졌다.

그럼에도 최대한 또박또박, 나는 내 언어를 올렌도의 귓속에 박아 넣어줬다.

날 거칠게 대하는 올렌도가 자괴감을 느끼도록.

그런데 욱한 건지 날 잡고 있지 않던 올렌도의 손이 공중으로 올라갔다.

‘젠장… 나 맞는 건가…?’

숨을 참게 됐다.

아무리 쓰레기라도 설마 때릴 거라곤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다가올 고통의 크기를 가늠하며 눈을 감아버렸던, 바로 그때….

퍽-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날 쥐고 있던 손이 사라졌다.

눈을 뜨고 보니 침대 협탁과 엉겨 바닥을 뒹구는 올렌도가 보였다.

올렌도의 터진 입술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고, 그 앞에는 이성을 잃은 표정의 르나르가 서 있었다.

“너… 이게 무슨 짓이야…?”

올렌도가 르나르에게 날을 세웠다.

하지만 르나르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검집에서 검을 꺼내 올렌도를 향해 겨누었다.

올렌도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당황한 듯 실소했다.

“네가…, 네가 진짜 미쳤구나…? 당장 검 안 치워?!”

르나르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얼굴은 무표정했는데 눈매가 가늘어져 있었다.

꼭 다리를 부러뜨려 놓은 먹잇감을 어떻게 먹을지 고민하는 맹수 같은 모습이었다.

같은 인상을 받은 건지 올렌도의 이마에서 식은땀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더는 안 되겠다 싶었던 내가 르나르에게 다가섰다.

“르나르….”

그를 부르며 조심스럽게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내 손이 닿자 힘이 들어가 딱딱했던 르나르의 어깨가 조금 부드럽게 풀렸다.

르나르 시선이 내 쪽을 향해 움직였다.

그런데 어깨너머로 흘긋 나를 봤던 르나르가 이내 표정을 굳히더니, 내 쪽으로 몸을 반쯤 틀었다.

칼을 쥐지 않은 그의 손이 내 얼굴에 와 닿았다.

손끝이 일정 경로를 따라 움직이는 것을 보니 자국이 잘 남는 내 피부에 올렌도가 세게 쥔 손자국이 남은 모양이었다.

“아프지… 않으십니까…?”

르나르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러다 더 건드리기 미안한 것처럼 내 얼굴에서 자신의 손가락을 거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올렌도가 기가 차다는 듯 다시 한번 실소하고는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내게 물었다.

“대공녀, 왜 저 녀석이 널 건드는데 쳐내지 않는 거지? 황자가 아닌 것을 알고도, 저 녀석을 좋아하기라도 하는 거야?”

잘 됐다 싶었던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려 했다.

그런데 나보다 르나르가 빨랐다.

올렌도에게 다시 검을 들이민 르나르가 내 대신 대답했다.

“제가 좋아합니다.”

“……뭐…?”

“제가 대공녀님을 좋아합니다.”

그 순간, 올렌도가 얼이 빠져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는지 태연한 분위기로 입을 열었다.

“아니, 뭐…. 아예 눈치채지 못한 건 아니야. 내가 이전에도 네게 물은 적 있었잖아. 코웰 대공녀를 좋아하는 게 아니냐고. 그때 이미 어느 정도 눈치를…. 근데 말이야. 너나 나나 이미 알고 있잖아? 대공녀가 그렇게 정숙한 여인은 아니라는 사실?”

‘내가 정숙한 여인이 아니라고?’

저건 또 무슨 소리인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내가 올렌도 같은 망나니에게 저런 평가를 받을 만한 행동을 한 적이 있었던가?’

상당히 억울했던 차, 르나르가 피식 웃더니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혹시 이거 말씀이십니까?”

르나르가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손수건이었다.

정확히는 내가 그에게 선물하기 위해 시장에서 구입한 은실이 수놓인 네이비 색 손수건.

‘저게 어딜 갔나 했더니….’

르나르의 상처 위에 손수건을 올려줬던 날, 빨아 말려주기 위해 손수건을 찾았을 때, 어딜 간 건지 나는 손수건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게 르나르가 챙겼기 때문이었다니….’

게다가 저렇게 매일 들고 다녔을 줄은 더더욱 몰랐었다.

‘참 별거 아닌 선물인데….’

“제 겁니다. 대공녀님께서 제게 선물하신 겁니다.”

르나르가 은근히 자랑하듯 올렌도에게 말했다.

나는 오늘 몰랐던 사실을 하나 알게 됐다.

르나르는 생각보다 선물 받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르나르가 낯설었던 건지 이번엔 올렌도의 표정이 복구 불가능할 정도로 심하게 일그러졌다.

“너……. 대체 날 어디까지 속인 거야.”

“일부러 속인 건 아닙니다. 대공녀님 사정으로 선물을 조금 늦게 받게 되었을 뿐입니다.”

“내가 그때도 말했지? 나는 너에게 코웰 대공녀를 좋아하라고 명령한 적이 없다고.”

“파혼해주십시오.”

“뭐……?”

“대공녀님과 파혼해주십시오. 올렌도 황자님.”

르나르가 올렌도에게 말했다.

예의를 차리듯 말했으나 한없이 오만하고 당당한 분위기를 풍기면서.

스스로를 무기력하게 느낀 듯 올렌도의 표정이 잠시 공허하게 변했다.

그러다 이내 자조적인 웃음을 띄운 채 올렌도가 르나르에게 물었다.

“내가 파혼해주지 않으면…, 날 베어 버리기라도 하려고…?”

“필요하다면요.”

르나르가 무심히 검을 들이밀자 검날에서 시퍼런 빛이 번쩍했다.

“하, 미쳤군!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 가문도 없는 네까짓 게 감히…! 그레시아나 제국 황자의 약혼녀를 넘보겠다고?!”

올렌도의 외침에 르나르의 미간이 구겨졌다.

올렌도의 가문 언급이 르나르를 화나게 한 모양이었다.

잘 벼려진 검신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르나르, 자, 잠깐…!”

놀란 내가 르나르 앞을 가로막았다.

사실 솔직한 심정으론 그냥 모른 척하고 싶기도 했다.

나에게 손찌검하려 한 올렌도였고, 원작에서 코웰 가문을 멸문시키는 원흉인 올렌도였으니.

하지만 대공과 레오의 반역 준비는 아직 진행 중인 상황이었다.

지금 르나르가 올렌도를 건드려 황실과 전쟁이라도 벌어지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 도저히 예상할 수가 없었다.

전쟁은 때가 될 때까진 벌어져선 안 됐다.

플루토나 제국을 점령하고 우리 가문이 확실히 유리한 입장에 서기 전까진.

게다가 아무리 싫더라도 올렌도는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이었다.

‘남자 주인공이 죽어버린 소설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 또한 알 수 없었다.

이 세계가 사라지는 것은 안 됐다.

대공과 코웰 형제들이, 그리고 르나르가 존재하는 세계였으니.

그래서 올렌도를 살리기 위해, 나는 올렌도를 살려야 하는 이유를 급하게 만들어내야만 했다.

올렌도도 르나르도 들어도 괜찮을 이유로.

“그래도 황자 전하예요, 우리가 전하를 이렇게 대하면 안 돼요.”

그런데 그런 내 말을 들은 르나르의 표정이 갑자기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황자 자리가…, 대공녀님께도 중요한 거였군요…?”

르나르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뜻 모를 질문을 했다.

무언가 오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일단 상황을 정리해야 했던 나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르나르가 검을 내렸다.

어쩐지 자괴감이 드는 듯 느껴지는 표정이 처연했다.

상황을 살피던 올렌도가 르나르의 기세가 잦아들자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잠시 머리 굴리는 듯싶더니 본인이 불리한 입장이었던 적이 전혀 없었던 것처럼 기세등등한 목소리로 르나르에게 선언했다.

“파면이다, 르나르.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꼭 그가 자비를 베푼다는 듯한 태도였다.

내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자 올렌도가 입안의 피를 그러모아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그 모습을 본 르나르가 다시 한번 검을 쥐며 몸을 움찔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내가 르나르를 막았다.

“르나르…. 조금만 참아요…. 조금만….”

르나르를 진정시킨 나는 올렌도를 향해 몸을 돌렸다.

“어서 돌아가시죠, 황자님.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집니다.”

“대공녀가 나를 도왔다고?”

“…….”

“쳇, 정말 웃기지도 않는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올렌도 또한 자리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는지 이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혼자선 르나르를 절대 상대할 수 없다는 걸 올렌도 또한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방을 나서기 직전, 올렌도가 갑자기 몸을 돌렸다.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나의 시선과 올렌도의 시선이 공중에서 충돌했다.

그런데 날 보는 올렌도의 시선이 이상했다.

목마른 듯한 눈빛.

탐내는 듯한 눈빛.

나는 그것이 내가 잘못 본 것이길 간절히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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