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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43화 (43/100)

43화

너덜너덜

‘내게 정이 든 걸까…?’

르나르가 캐스티나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기에 하게 된 생각이었다.

게다가 나 또한 르나르에게 어느 정도 정이 든 상태였으니 그런 르나르를 아예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나도 르나르를 위해 절벽 아래로 뛰어내릴 수 있을지 까진 미지수였지만.

그런데 그렇게 결론짓고 나니 머릿속에 문득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르나르에게… 이용당해주면 어떨까…?’

르나르의 애초 목적은 반역을 일으킨 뒤 우리 가문의 지지를 받아 황제가 된 그 자리를 공고히 하는 것일 터였다.

그걸 아는 내가 그를 도울 생각이 없었던 건, 오로지, 목적을 달성한 그가 코웰 가문을 배신할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원작에서 그레이시아나 황실, 귀족 세력에 모두 적대감을 가졌던 그가 차후 우리에게 어떤 태도를 보일지 미리 알 수 없었으니.

하지만 그가 긴급한 순간에 고민 없이 목숨을 던질 만큼 나에게 정이 든 상태였다면, 목적을 이뤘다고, 쉽게 코웰 가문을 배신하거나 위험하게 할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상황이 바뀌었다.

르나르가 아닌 우리 가문에서 먼저 일으킬 반역이었고 우리는 누군가를 황제의 자리에 앉혀야 했다.

물론 대공이나 오빠 중 누군가가 황제가 될 수도 있었다.

방계의 누군가를 황제로 세우는 것도 가능할 것이었고.

하지만 그래도 황제의 핏줄인 르나르가 차기 황제가 되는 게 제국민들이 받아들이기 쉬울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이 문제를 코웰 대공과 논의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내가 한참을 그렇게 힘겹게 머리 굴리는 동안, 방긋방긋 웃는 르나르의 시선은 내내 나를 향해있었다.

복수 같은 건 아예 잊고 즐겁게 사는 듯한 모양새였다.

원작의 르나르가 복수에 몰두해 한평생 살았던 것을 떠올리며 의아해진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먼저 들어가 보세요. 저는 잠시 들를 곳이 있습니다.”

나를 업고 황자의 저택 담장을 넘은 르나르가 내게 말했다.

나는 의아해졌다.

‘이제 막 도착했는데 어딜 또 가야 한다고?’

“급한 일인가요? 오래 말을 탔으니 좀 쉬셔야 할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르나르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늘은 좀 늦을지도 모릅니다. 먼저 저녁 드시고, 잠도 주무시고, 푹 쉬고 계세요.”

르나르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내 머리를 쓰다듬는 르나르 표정이 점점 깊게 가라앉았다.

마치 슬픔에 압도된 것처럼.

“혹시…. 정말 가기 싫은데 가야만 하는 곳인가요?”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르나르가 가볍게 웃었다.

“아뇨, 전혀요. 왜 그렇게 생각하셨죠?”

“지금 르나르 표정을 보니 그런 것 같아서.”

“아. 이건….”

르나르가 스스로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했다.

“대공녀님과 조금이라도 떨어져 있을 생각을 하니 싫어서요.”

“…….”

“안 믿는 표정이신 것 같지만 정말입니다.”

가볍게 웃은 르나르가 허리를 숙였다.

그러곤 내 입술에 촉-

입을 맞췄다.

놀란 내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르나르는 그런 내 표정이 재밌다는 듯 눈을 휘어 웃었다.

“바, 방금…?”

“야시장에서, 물속에서 대공녀님께 입을 맞춰보니 알겠더라고요. 대공녀님과의 스킨십은 악몽, 아픈 것에 뿐만 아니라 평소 컨디션에도 도움이 돼요.”

“평소… 컨디션에도요…?”

“피로를 잊게 해주죠. 안는 것보단 입맞춤 효과가 더 좋은 것 같고. 저는 지금 힘을 내야 하니 대공녀님 효과를 좀 얻고 가겠습니다. 대공녀님을 위해 북부 성까지 동행해 드린 제게 이 정도는 해주실 수 있죠?”

여전히 나와 눈을 마주친 그가 눈을 살며시 가늘게 뜨고 능글맞게 씩 웃었다.

너무도 당당한 그 태도에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게 됐다.

“그럼 이만 들어가세요. 저도 가봐야 합니다.”

가볍게 손을 흔든 르나르가 내게서 멀어졌다.

그가 이내 담장을 넘어 사라질 때까지 나는 여전히 멍한 상태였다.

르나르는 나에 관한 이득을 확실히 보기 위해 스킨십 혐오증을 완전히 극복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 * *

코웰 대공저로 향하던 르나르가 가만히 입술을 만졌다.

그의 입술에 엘로즈의 입술 느낌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당장 다시 돌아가 키스를 퍼붓고 싶은 기분이 들어 르나르는 여러 번 깊은숨을 들이마셔야 했다.

입술에서 손을 뗀 르나르가 무심코 손끝을 응시했다.

그러다 손을 뒤집어 본 그는 크게 놀랐다.

마담이 남긴 흉터가 흐려져 있었다.

* * *

쫓겨나듯 북부 성에서 나온 올렌도는 머리끝까지 화가 난 상태였다.

돌아버리기 일보 직전의 상태.

“아악!!!”

올렌도가 소리를 지르자 그를 수행하던 기사단이 움찔했다.

올렌도의 정보통은 북부 성을 기습하면 반란에 관련된 자료들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했었다.

하지만 올렌도가 들이닥쳤을 때, 레오는 반란 준비는커녕 검술 수련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었다.

올렌도는 반란에 관해서는 티끌만 한 증거조차 찾을 수 없었다.

올렌도의 기사단이 성에서 키우는 사냥개 무리 밥그릇까지 빠짐없이 뒤졌지만 그랬다.

게다가 북부 성의 성주 이든 메이슨 대공작은….

“황자 전하, 지금 저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제가 이 열악한 북부 영지를 일구며 제국을 위해 바친 시간이 황자 전하께서 살아오신 시간보다 깁니다!! 그런데 이런 충신의 충심을 의심하시다니요!!!! 이번 일은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황제 폐하께 지금 이 상황을 있는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라고 불같이 화를 내며,

올렌도가 수색을 마무리 짓고 북부 성을 떠나기도 전 황성에 전령을 보냈다.

수색 결과 무언가 건진 것이 있었다면 올렌도도 당당하게 그의 아버지를 마주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억지로 뒤진 북부 성에서 올렌도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고, 이로써 조용한 벌집을 들쑤셔 놓은 대가를 올렌도는 그대로 마주하게 될 예정이었다.

올렌도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두려워하는 아버지를 대면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올렌도가 치러야 할 대가였다.

게다가 터넛 황제는 르나르가 아닌 올렌도가 저택에서 엘로즈와 함께 지낸다고 알고 있었다.

올렌도는 일단 그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젠장…!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야. 대체 어디서 정보가 샌 거야……!”

코웰 대공작에게 처음부터 수가 모두 읽히고 있었단 사실을 알지 못하는 올렌도는, 중간에 정보가 유출된 것이란 생각에 울분이 차올라 이를 아득 갈았다.

* * *

올렌도가 저택에 들이닥친 것은 자정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더글라스!!”

“황, 황자 전하…?”

“대공녀는? 엘로즈 코웰 대공녀는 지금 어디 있지?!”

잠옷으로 갈아입고 막 불을 끄려 했던 나는 어렴풋이 들리는 대화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잠시 후, 누군가 쿵쿵거리며 내 방으로 가까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름이 오싹 돋았다.

나는 급하게 침대 위에 놓여있던 가운을 집어 걸쳤다.

그리고 가운을 걸친 순간, 방문이 열렸다.

“지, 지금 이게 무슨…!”

내가 얼굴을 붉혔다.

올렌도가 노크도 없이 내 방에 들이닥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올렌도는 예의를 차릴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대공녀, 협조 좀 해줘야겠습니다.”

내 손목을 덥석 잡은 그가 나를 침대 밖으로 끌어냈다.

“놓으세요!! 지금 이게 무슨 무례입니까!! 더글라스!!”

내가 다급하게 더글라스를 불렀다.

그런데,

바로 그때,

“황제…, 폐하…?”

내 부름에 급하게 방으로 뛰어들다 별안간 뒤돌아본 더글라스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황제라는 더글라스의 말에 나와 올렌도가 동시에 숨을 멈췄다.

나와 그의 눈이 똑같이 커져 있었다.

황제가 방 안에 모습을 드러낸 건 그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오랜만에 보게 된 황제의 등장에 당황한 것도 잠시.

황제의 눈에 나는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올렌도를 발견한 황제가 곧바로 그를 향해 뚜벅뚜벅 걸었다.

그러곤 그대로 손을 올려 올렌도의 따귀를 내리쳤다.

짝-

선명한 마찰음이 램프 빛이 은은하게 채운 방안을 가득 울렸다.

올렌도의 고개가 터넛의 강한 힘에 맥없이 돌아갔다.

“아, 아버지…….”

“아버지?! 네가 방금 날 아버지라 불렀느냐?! 너처럼 무능한 녀석이?!?!”

올렌도의 뺨이 순식간에 발갛게 부풀어 올랐다.

“북부 성을 들쑤셔 놓은 것으로도 모자라 코웰 대공까지 협박해?! 내가…, 내가 그동안 대공에게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터넛을 이용해 올렌도를 눌러놓겠다더니, 메이슨 대공이 꽤 세세한 내용을 터넛에게 전한 모양이었다.

이성을 잃은 터넛에게 대들어 봤자 좋을 것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이미 뺨을 맞고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건지, 올렌도는 지지 않고 터넛에게 마음속 울분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대체 언제까지 대공, 대공 하실 겁니까!! 아버지께서 그깟 공작 가문 하나를 그리 싸고도시니, 공작부인 따위가 황후를 농락하고 황실을 우습게 보았던 게 아닙니까!!”

‘공작부인이 황후를 농락했다고?’

처음 듣는 얘기였다.

원작엔 나와 있지 않았던 내용이었다.

“공작부인이 우습게 봤던 것이 황실이었던 줄 아느냐?! 황후일 뿐이었다!! 너같이 나약하고 무능력한 아들을 낳은 황후였기 때문에…!!”

“폐하!!!”

올렌도의 목소리가 찢어졌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올렌도의 연한 하늘색 눈동자에 투명한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하지만 황제는 그런 올렌도의 나약함도 꼴 보기 싫었던 건지 다시 손을 올렸고, 나는 나도 모르게…,

“폐하, 진정하세요…!”

황제 앞을 막아서게 됐다.

“…….”

“…….”

램프 빛과 달빛이 교차하며 일렁이는 방안에 일순 적막이 찾아왔다.

여전히 손을 올린 황제가 당황한 듯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그러다 상황이 파악된 듯 손을 내렸을 때, 황제는 만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휘어 웃고 있었다.

“대공녀, 지금 제 아들을 보호해준 겁니까?”

“…….”

“둘 사이가 생각보다 좋은 것 같군요,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네요.”

황제가 코웃음을 치며 웃었다.

“폐하, 전하를 제게 맡겨주세요. 제가 전하와 이야기 나눠 보고 싶습니다.”

“오오, 대공녀가요?”

“예, 폐하. 그러니까 폐하께선 이만 궁으로 돌아가 보시는 게 어떠실까요? 밤이 꽤 깊었으니….”

내가 긴장해 터넛을 봤으나, 터넛은 이곳에 온 목적도 잊은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약혼식도 올리지 않았는데 벌써 이렇게 황후 노릇을 톡톡히 하다니 짐의 마음이 흡족합니다. 그럼 뒷일은 대공녀에게 맡기도록 하죠.”

웃음을 남긴 터넛이 떠났다.

더글라스가 터넛을 배웅하기 위해 따라나서는 걸 보는데 온몸에서 힘이 풀렸다.

옆에서 올렌도가 나직이 숨을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전하께서도 이만 돌아가시죠, 시간이 늦었는데.”

내가 올렌도에게 제안했다.

그러자 올렌도가 별안간 나를 봤다.

올렌도의 연하늘색 눈동자가 분노에 잠식된 듯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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