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략남이 훅 들어왔어-41화 (41/100)
  • 41화

    눈밭에서 좀 뒹굴었습니다

    순간 달고 시원한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고개를 아래로 숙이니 보이는 것은 르나르의 벗은 몸.

    본능적으로 이 모습을 레오가 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른 일어나서 옷 입어요, 제가 시간을 끌어볼 테니.”

    “옷이요? 갑자기?”

    몸을 일으키던 날 르나르가 팔을 당겨 눕게 했다.

    그 뒤 단단한 그의 팔과 다리로 감쌌기에 나는 몸을 일으키기 전처럼 다시 르나르 품에 갇힌 꼴이 됐다.

    낡은 침대 스프링이 지난밤처럼 기이하게 삐걱대는 소리를 냈다.

    “우리가 밤새 같이 있었단 것도 레오가 알면 안 될 것 같긴 한데, 그건 어쩔 수 없을 것 같으니 일단 옷이라도….”

    “우리가…. 밤새…, 같이….”

    르나르가 침대 옆 창밖을 내다보며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이내 입매를 부드럽게 휘며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는 어쩐지 뿌듯해 보였다.

    당당하게 웃는 르나르 위로 북부의 새하얀 아침 햇살이 가볍게 내려앉았다.

    “놔줘요, 르나르. 지금 빨리 옷을…, 아앗…!”

    놀란 내가 작게 소리쳤다.

    날 안은 르나르가 빙글 몸을 돌리는가 싶더니 시야가 온통 그로 가득 찼기 때문이었다.

    양팔에 무게를 실은 르나르가 위에서 날 내려다봤다.

    그의 머리칼과 잘 짜인 몸 선을 따라 새하얀 북부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어젯밤엔 벗으라면서요.”

    “그건….”

    “근데 오늘 아침엔 입으라고?”

    “지금 상황이….”

    “나 어제 말 잘 들었는데. 오늘도 잘 들어야 하나?”

    “얼른 옷을….”

    “싫은데?”

    르나르가 장난스럽게 빙글빙글 웃었다.

    그사이 날 부르는 레오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엘로즈!!”

    문 쪽을 노려보며 눈초리가 가늘어진 르나르가 그대로 날 다시 안으려 하길래, 놀란 내가 아등바등 그를 밀어냈다.

    어깨를 몇 대 찰싹찰싹 때리고 나서야 나는 겨우 르나르 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옷 입고 나와야 해요, 알겠죠?! 꼭이요…!”

    르나르에게 단단히 당부한 내가 오두막 밖으로 내달렸다.

    “레오!!”

    “엘로즈!!!!!!!”

    오두막 밖의 날 발견한 레오가 말에서 뛰어내려 날 향해 달려왔다.

    레오는 간밤에 내가 르나르를 끌며 만들어놓은 자국을 따라 오두막을 향해 오던 중이었다.

    레오 뒤로 북부 성의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보였다.

    레오는 몇 달 전 봤던 것과 조금 달라진 모습이었다.

    키가 더 컸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원래도 큰 키에 근육이 더 붙었기 때문인지 키와 덩치가 예전보다 커 보였다.

    단정했던 머리는 꽤 많이 길어 하나로 묶고 있었다.

    보통 남자들이라면 그 머리가 참 안 어울렸겠지만, 잘생긴 레오한텐 그것마저도 잘 어울렸다.

    전속력으로 달린 내가 레오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레오가 그런 날 허리를 잡아 번쩍 들어 올리더니 공중에서 한 바퀴 빙글 돌렸다.

    그러곤 바닥에 내려준 뒤 숨이 막힐 정도로 끌어안았다.

    “엘로즈, 로즈……! 밤새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내가 북부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간밤에 산맥 쪽에서 소란이 있었단 얘길 듣고 직접 살피러 나왔는데, 우리가 붙잡은 도적들 물건 중에 네 브로치가 있는 거야. 내가 그걸 보고 정말 얼마나 놀랐는지……. 네가 알아……?”

    고개를 들고 보니 다시 떠올리는 것조차 끔찍하다는 듯 말하는 레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셔있었다.

    “게다가 고문 끝에 놈들이 널 강으로 던져버렸단 소릴 들었을 땐 내가……, 정말…….”

    레오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의 밤하늘처럼 푸른 눈동자에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담겨있었다.

    “레오? 나 봐봐, 레오. 나 괜찮지? 봐봐, 아주 멀쩡하잖아. 그러니까 울지 마. 울지 마, 울지 마. 뚝.”

    엄마처럼 달래는 내 모습에 레오가 작게 웃었다.

    “밤새 눈 폭풍이 왔었는데 괜찮았어?”

    “응. 다행히 버려진 오두막을 찾아서 옷도 갈아입고 난로도 쬐고 있었어.”

    “그러고 보니 네 옷이….”

    내가 입고 있던 반팔 넝마를 레오는 그제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내 동생 춥겠다.”

    레오가 본인이 고통스러운 듯 신음을 흘리더니 입고 있던 망토를 얼른 벗어 망토로 내 몸을 둘둘 감쌌다.

    그러곤 병사들 쪽을 향해 명령했다.

    “제대로 된 옷을 입히고 음식을 먹여야겠어. 당장 성으로 출발한다.”

    병사 중 하나가 미리 성에 소식을 알려 놓으려는 건지 먼저 출발했다.

    “우리도 가자.”

    나를 내려다본 레오가 빙긋 웃었다.

    그 위로 르나르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잠깐, 레오. 가…같이 갈 사람이 있어.”

    “같이 갈 사람?”

    그때, 르나르 목소리가 들렸다.

    “대공녀님?”

    고개를 돌리고 보니 오두막 뒤쪽에서 르나르가 돌아 나오고 있었다.

    어디서 구한 건지 양팔 가득 새 장작을 들고.

    “명령하신 대로 장작을 더 구해왔습니다.”

    레오가 본능적으로 칼자루를 쥐는 걸 본 내 등허리가 저릿해졌다.

    “이 장작도 혼자 쓰실 거죠? 절 밤새 눈 속에 혼. 자. 두시고 벽난로도 혼. 자. 독차지하시다니. 정말 너무한 거 아니십니까? 근데…, 누구시죠…?”

    르나르가 레오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마치 정말 모르겠다는 듯.

    하지만 그의 입꼬리에 약간의 장난기가 서려 있다는 걸 나는 불현듯 눈치 챌 수 있었다.

    레오의 입술이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살짝 열렸다.

    하지만 이내 다물어졌다.

    잠시 생각에 잠긴 눈빛을 한 레오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흑발에 붉은색 눈동자네요.”

    “정확히는 적갈색입니다만.”

    “우리 로즈를 구하기 위해 강물에 뛰어들었다는 사람이 당신이 맞습니까?”

    도적들에게서 간밤의 얘길 전해들은 모양이었다.

    르나르는 잠시 눈을 깜빡거리다가 잊고 있던 사실을 기억해낸 듯 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지난밤에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긴 하네요.”

    “로즈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한 건데요, 뭐.”

    르나르가 시큰둥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 순간 레오의 눈빛에 담기던 미약한 호의를 나는 긴가민가하면서도 느낄 수 있었다.

    “밤새 밖에 계신 겁니까? 일단 저희와 같이 성으로 가시죠.”

    르나르를 아래위로 훑은 레오가 말했다.

    레오가 르나르와 내가 탈 말을 준비시키려는 건지 병사들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 틈을 타 재빨리 르나르에게 다가섰다.

    르나르의 상태가 엉망이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옷 다 마른 거 아니었어요?”

    젖은 옷을 몸에 걸친 채 입술이 파랗게 질린 르나르를 보고 내가 황당해하며 물었다.

    이에 르나르가 레오 쪽을 슬쩍 보더니 날 향해 싱긋 웃었다.

    “눈밭에서 좀 뒹굴었습니다. 심하게.”

    “나온 건 어떻게 나온 건데요? 어떻게 오두막 뒤쪽에서 나왔죠?”

    “창문도 문입니다, 대공녀님.”

    르나르가 내 쪽으로 허리를 숙이더니 한쪽 눈을 찡긋했다.

    원작 계략남은 철두철미했다.

    나는 귀여운 사기꾼과 눈을 맞춘 채 헛웃음을 흘렸다.

    르나르와 내 사이로 조금 다정해진 북부 바람이 간지럽게 불어 들었다.

    * * *

    북부 성 식당 테이블엔 평화로운 아침부터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고소한 냄새, 맛있는 냄새가 유혹적으로 내 허기를 자극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 해질 때쯤 먹은 케이크가 마지막 식사였다.

    내 앞에 놓인 음식들이 빠르게 내 식도 너머로 사라졌다.

    레오는 다소 정신없이 먹는 날 만족스러움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렇게 맛있어?”

    “응. 북부 음식 정말 맛있다.”

    “천천히 먹어, 체해.”

    “응응.”

    “황자의 저택에서 굶고 지내는 건 아니지?”

    “음…. 그런 건 아닌데…….”

    “너답지 않게 소스까지 묻히고 먹고 말이야.”

    레오가 냅킨으로 내 입가에 묻은 스테이크 소스를 정성스레 닦아줬다.

    순간 까득, 뼈를 씹던 르나르의 입속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레오가 피식 웃었다.

    그 순간, 낯설면서도 익숙한 이든 메이슨 대공이 식당으로 들이닥쳤다.

    “엘로즈 코웰!! 허허, 오랜만이구나!!”

    백발에 새하얀 수염, 다부진 체격을 가진 메이슨 대공은, 예전에 봤을 때보다 나이는 좀 더 든 것 같았지만 여전히 위풍당당했다.

    제국 북쪽 경계선에 창궐하는 오랑캐로부터 대대로 제국을 지켜온, 능력 있는 군벌다운 모습이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내가 대공에게 안부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대공은 어쩐지 꽤 흥분한 상태였다.

    “성으로 오는 지름길에 자주 출몰하는 도적 떼가 혼쭐이 났단 소문이 있던데. 엘로즈, 네 작품이냐?”

    대공이 작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물었다.

    내가 레오에게서 검술을 배웠고 사실 나도 검은 제법 다루는 편이었기에, 내가 도적 떼를 소탕한 줄로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르나르의 실력에 비하면 내 실력은 새 발의 피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었다.

    내가 르나르를 봤다.

    내 시선을 따라 대공이 르나르를 봤다.

    스테이크를 큼직하게 썰던 르나르가 메이슨 대공과 눈이 마주치자 당황했다.

    첫눈에 르나르 실력을 눈치챈 대공의 눈빛에 격한 애정이 담겨있었기 때문이었다.

    르나르가 다치게 한 도적들도 이미 살폈을 테니, 그의 실력을 눈치채는 것도 무리는 아닐 터였다.

    “자네, 레오와 함께 이곳에서 수련하다 가는 것이 어떻겠는가? 북부는 성을 노리는 오랑캐를 무찌르며 매일같이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검술 실력 향상을 위해서는 최적화된 곳이지…!”

    대공이 체육관 홍보를 하는 관장처럼 내겐 ‘살기 힘든 곳’이라 들리는 그의 북부 영지를 자랑했다.

    르나르도 같은 생각이었던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하지만 이내 잘 재단된 영업용 미소를 얼굴에 그려 넣으면 말했다.

    “감사한 제안입니다만, 대공녀님과 제가 오늘 이곳에 온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대공녀님?”

    르나르가 화제를 돌리기 위해 날 불렀다.

    안 그래도 이 말을 꺼내기 위해 메이슨 대공을 기다리고 있던 나는 얼른 그 기회를 잡았다.

    “올렌도 황자가 북부 성을 기습하러 오고 있어요.”

    갑작스러운 내 말에, 레오와 메이슨 대공의 서로를 향한 시선이 공중에서 맞부딪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