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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40화 (40/100)

40화

바지도 벗어요

탁- 타닥…, 타닥-

의식이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듣게 된 건 장작이 타는 소리였다.

휘이이잉-

밖에서 바람이 부나 싶더니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훑고 지나갔다.

오두막 창틀에서 바람이 새어드는 모양이었다.

오슬오슬 떨리는 것이 여전히 춥긴 했지만 그렇다고 곧 죽을 것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잔뜩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내가 눈을 뜬 곳은 오두막 구석에 놓인 낡은 철제 침대 위였다.

스프링이 녹슨 건지 침대는 내 작은 뒤척임에도 삐걱삐걱하는 소리를 냈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난로 앞에 무릎 꿇고 앉아 불쏘시개로 장작을 쑤시는 벗은 등판이 보였다.

하얗고 넓은 등판이었다.

그 등판엔 칼에 베인 흔적이 많았는데, 조각 같은 근육들이 적당히 위치에 탄탄히 자리 잡고 있어 그럼에도 보기가 좋았다.

예술품을 감상하는 기분이라 나는 멍하니 그 등판을 응시했다.

내 시선을 느낀 등판의 주인이 고개를 돌렸다.

차분히 가라앉아있던 적갈색 눈동자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반짝였다.

“일어나셨습니까?”

벌떡 일어선 르나르가 내게 다가왔다.

등판 못지않게 보기 좋은 근육들이었다.

그리고 선홍색의….

그것을 인지한 내가 도르륵 눈동자를 굴렸다.

멈칫한 르나르가 난로 근처에 놓여있던 셔츠를 급하게 주워 입었다.

똑-

똑-

셔츠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닥에 얼룩을 남겼다.

말린다고 말린 것 같았는데 셔츠는 여전히 푹 젖은 상태였다.

‘맞아, 우리 강에 빠졌었지. 그러고 보니 나도….’

젖은 옷을 입고 있겠구나, 싶어 옷을 내려다본 순간, 나는 경악하게 됐다.

내가 입은 옷은 젖은 드레스가 아닌 반팔의 넝마였다.

반팔이긴 해도 완전히 마른 옷.

꼭 현실 세계 남자 티셔츠를 원피스처럼 입은 모양새였다.

“이 집에 옷이라곤 그 옷 하나밖에 없더군요. 젖은 옷을 입고 계시면 안 되실 것 같아 갈아입혀 드렸습니다.”

타닥- 타다닥….

장작 타는 소리가 르나르와 내 사이 적막을 채웠다.

“르나르…가요…?”

“…눈은 감고 있었습니다.”

눈을 감고 어떻게 옷을 갈아입혔다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걸 따지고 들기엔 내 체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른 옷을 입고 있었음에도 대한민국 한겨울 못지않은 그레이시아나 제국 북부의 버려진 오두막 내부는 무척 추웠다.

물론 밖보다야 안이 백번 낫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안이 따뜻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덜컹덜컹-

바람을 따라 창문이 흔들렸다.

불투명한 창을 통해,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휘몰아치는 눈발이 보였다.

밖에 나가면 곧바로 눈사람이 되겠단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대공녀님께서 잠들어 계신 사이에 눈 폭풍이 왔습니다. 지금 북부 성 쪽으로 움직이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전하의 사병은 아침은 되어야 출발할 것 같으니, 저희도 눈 폭풍이 잦아들 때까진 이곳에 머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타닥- 타닥-

르나르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 폭풍 속에서의 추위를 상상하니 넝마 밖으로 드러난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벽난로의 미약한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팔을 내가 조심스레 그러안았다.

“흐음….”

“대공녀님?”

날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에 내가 감았던 눈을 떴다.

타닥- 타닥-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리니, 침대 끝에 걸터앉아 날 내려다보는 르나르가 보였다.

나는 앉지도 눕지도 않은 어정쩡한 자세로 침대 위에 쓰러져있었다.

르나르가 난로 앞에서 옷을 말리는 것과 창밖을 번갈아 보던 중이었는데 그사이 나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제대로 누워서 눈을 좀 붙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르나르가 날 걱정했다.

그런데 르나르가 날 걱정하는 게 무색할 정도로 난 르나르가 걱정됐다.

여전히 젖은 옷을 입고 있는 그의 입술이 파리하게 질려있었기 때문이었다.

“…셔츠 다시 벗는 게 어때요? 체온을 계속 빼앗기고 있는 것 같아요.”

타닥- 타다닥….

르나르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새어들었다.

부끄러운 걸까?

자기는 내 옷도 갈아입혔으면서.

“제가 있는데 옷을 벗고 있는 게 물론 거북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지금 르나르가 춥잖아요. 일단 살아야죠.”

내가 타박하자 르나르가 내 시선을 피해 눈동자를 굴렸다.

벽난로 불빛이 내려앉은 그의 양 볼이 어쩐지 붉었다.

“거북한 게 아닙니다. 단지….”

“단지?”

“……아닙니다.”

입을 다문 르나르가 뒤돌았다.

젖은 셔츠가 살갗을 때리는 소리와 함께 드러난 그의 어깨 위로 벽난로 불빛이 일렁였다.

이내 철벅하며 셔츠가 바닥에 떨어짐과 동시에 물기에 촉촉이 젖은 르나르의 하얀 등판이 드러났다.

나는 우습게도 잠시 숨을 멈추게 됐다.

“바지도…, 벗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전하자 르나르가 눈을 크게 떴다.

타닥- 타닥-

장작 타는 소리와 함께.

똑-

똑-

르나르의 바지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휘이이잉-

창밖의 바람 소리가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고요를 어루만졌다.

“…걱정하지 말아요. 바지 벗으면 이거 줄게요.”

내가 덮고 있던 모포 담요를 르나르 쪽으로 내밀었다.

“그대를 위한 거예요.”

“알아요. 아는데, 대공녀님을 위해서는…….”

말하던 르나르가 아랫입술을 물었다.

르나르의 울대뼈가 느리게 움직였다.

그러더니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쉰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게 흘리듯 말했다.

“…눈 감아요.”

르나르 손이 그의 바지 허리 밴드 위로 올라가는 것을 본 내가 급하게 눈을 감았다.

다음 순간 물에 젖은 바지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고,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내 몸이 기우뚱 르나르 쪽으로 기울었다.

르나르는 그런 날 제 품으로 받치면서 내가 덮고 있던 담요 안으로 들어왔다.

“담요가 큰 편이니 같이 덮으면 되겠네요. 저 주지 마시고.”

그리고 다음 순간, 르나르가 담요 안에서 나를 부드럽게 안더니 침대 위로 몸을 뉘었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있던 내가 그의 품에서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개를 들자 이미 눈을 감고 잘 준비를 마친 르나르가 보였다.

그의 촘촘하고 긴 속눈썹의 그림자가 흰 눈이 반사시킨 빛 아래서 아롱아롱 춤을 췄다.

“…주무세요. 저도 잘 거니까.”

나긋나긋 건네진 목소리에 체온 어린 숨결이 더해졌다.

그 숨이 어쩐지 달고 습했다.

그래서 간지러웠다.

그럼에도 르나르와 눕게 된 것은 사실 좋았다.

르나르가 미세한 틈을 나와의 사이에 두고 누워있었는데도 나 혼자 있던 것보다 훨씬 따뜻했기 때문이었다.

그와 붙고 싶단 충동이 자꾸 들었다.

옷을 말리며 난롯불의 온도를 몸에 담고 온 것 같은 그에게.

물론 르나르가 여자와 몸이 닿는 걸 싫어하는 게 걱정은 됐다.

하지만 평소에도 악몽을 꾸지 않기 위해, 날 유혹하기 위해, 르나르는 잘 참아내지 않았던가?

‘오늘 한 번쯤 더 참는다고…, 하늘이라도 무너질까?’

결국, 나는 온기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르나르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르나르. 양 알죠, 양.”

“양이요? ‘늑대와 양’ 할 때…, 그 양이요?”

눈을 뜬 별안간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르나르가 품 안의 나를 내려다봤다.

내가 그런 르나르를 마주 봤다.

르나르의 울대뼈가 또 아래위로 움직였다.

“네, 그 ‘양’. 동물 ‘양’. 그 양이란 동물은 지독히 이기적이라 여름엔 붙고 겨울엔 떨어진대요. 여름엔 자기가 더워도 다른 양이 시원한 꼴을 못 보기 때문이고, 겨울엔 자기가 추워도 다른 양이 따뜻한 꼴을 못 보기 때문이라는데, 참 멍청하죠?”

“……무슨 뜻이십니까?”

“지금 저희 사이에 틈이 있는 게 양 같은 짓이라는 거죠. 멍청한 짓. 완전히 붙으면 더 따뜻할 수 있는데.”

르나르가 별안간 미간을 찌푸렸다.

“……미치겠네.”

그 뒤로 그가 나직이 욕설을 흘렸다.

나는 순간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자기가 악몽을 꾸는 게 싫어 나한테 닿는 건 참을 수 있는데,

날 유혹하기 위해 닿는 것도 참을 수 있는데,

내가 추워 닿고 싶다는 건 그렇게 견디기 끔찍한 걸까?

어쩐지 코끝이 시큰해지는데 바로 다음 순간 르나르가 날 안았다.

그의 몸에서 훅 하는 열기가 풍겼다.

어쩐지 르나르의 체온은 바로 조금 전보다도 훨씬 높아진 상태였다.

르나르가 으스러질 정도로 날 꽉 안아 숨이 막힐 지경이었는데도 그 품이 하도 따뜻해 나는 나른해졌다.

“졸려……요…….”

반쯤 감긴 눈으로 내가 중얼거리자 르나르가 내 머리카락 사이로 얼굴을 비볐다.

내 귀를 아프지 않게 깨무는 르나르 입술 사이로 뜨거운 바람이 흘러나왔다.

“대공녀님, 지금 잠이 오시죠? 제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시면서……….”

이미 의식이 혼미해진 내 귓등에 르나르의 목소리가 부딪혀 흩어졌다.

* * *

“으음….”

따뜻했다.

“…….”

몸은 좀 아팠다.

강한 힘이 날 안았다 풀어주는 행위를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힘이 나를 당기면 달고 시원한 향이 코끝에 와 닿았다.

간지러워 미소 지으니, 입술에 열기를 담은 것이 촉 하고 닿았다 떨어졌다.

날 감싼 품이 더 따뜻해져 내가 그 품을 파고들었다.

“……? 하, 정말. 후…….”

내 머리 위로 길고 긴 날숨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꼭 금욕 생활을 하는 신부의 깊은 한숨 소리 같았다.

잠깐 깬 듯한 잠은 이내 다시 깊어졌다.

‘향이…, 좋아….’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편안함을 느끼며 나는 다시 한번 그 품을 파고들었다.

곧 다시 의식이 아득해졌다.

* * *

입술 위에 닿은 입술의 감각이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모르겠다.

얼마나 오래 잠들어 있었던 걸까?

“엘로즈…!!”

별안간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아주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이것 역시 꿈?

“엘로즈!!”

그런데,

꿈이라고 하기엔 목소리가 지나치게 선명했다.

‘게다가 내가 아는 목소리….’

“엘로즈!!”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리자 눈을 가늘게 뜨고 현관문을 노려보는 르나르가 보였다.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한 것일까?

르나르의 눈 밑이 파랬다.

“어딨는 거야 대체, 대답해 엘로즈!!”

날 찾는 목소리가 어느새 밝아진 오두막 아침을 휘저었다.

그리고 그 순간, 목소리의 주인을 깨달은 내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내 첫째 오빠, 레오 코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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