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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39화 (39/100)
  • 39화

    절벽

    르나르의 입술 새에서 조소가 흘렀다.

    이내 그가 빙글빙글 웃기 시작했다.

    “수소는 고기 맛을 좋게 만들기 위해 송아지 시절부터 거세를 시킨다고들 하지. 근데 오늘 보니, 그 거세가 비단 송아지한테만 필요한 게 아니야.”

    르나르 말을 들은 도적 사내 표정이 험하게 일그러졌다.

    “도련님께서 지옥 구경이 하고 싶으시단다.”

    사내가 부하들을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그걸 신호로 열댓 명의 도적들이 각자의 무기를 일제히 꺼내 들었다.

    “혹시 사람 죽는 거 보는 거 싫어하십니까?”

    말에서 내리려던 르나르가 심상히 내게 물었다.

    본 적은 없었지만, 당연히 싫었다.

    누가 사람 죽는 거 보는 걸 좋아하겠는가.

    게다가 나는 중세 시대에 빙의된 현대인인데.

    ‘그러니까 내 대답은….’

    “우릴 쫓아오지 못하도록 팔다리 정도만 잘라도 될 것 같아요.”

    “관대하시네요.”

    새침한 내 대답에 르나르가 콧등을 찡긋하며 웃었다.

    다음 순간 르나르가 말 위에서 풀쩍 뛰어내렸다.

    그러곤 검집에서 검을 꺼냈다.

    잘 벼려진 검이 검집에 스치는 소리가 새하얀 입김 사이로 섞여들었다.

    사실 난 두려운 마음이 있었다.

    르나르의 실력을 직접 확인한 적이 없었고 상대가 여러 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르나르를 믿어보기로 했다.

    지금 이 순간 믿을 수 있는 게 르나르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곧 알 수 있었다.

    르나르가 믿을 수 있었던 건 르나르 그 자신이었다.

    “눈 감으세요.”

    도적들을 베던 르나르가 별안간 내게 말했다.

    내가 동그랗게 눈을 뜬 채 모든 장면을 멍하니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잔인하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현실감이 들지 않을 정도로 한쪽에서 다른 쪽을 전적으로 가지고 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르나르는 마치 칼춤을 추는 것 같았다.

    그는 그를 향하는 쇠붙이들을 유연한 자세로 피해가며 움직였는데, 그가 지나가고 나면 도적들이 신체 일부를 쥐고 종이 인형처럼 픽픽 쓰러졌다.

    그의 발자취를 따라 새하얀 눈밭에 크고 붉은 꽃들이 피어났다.

    그 광경이 너무도 기이해 나는 눈만 깜빡였다.

    그런데 너무 집중했던 것이 문제였을까?

    누군가 내 뒤에 다가섰다는 걸 느꼈을 시점엔, 내 망토 자락을 쥔 한 남자가 날 당겨 말에서 떨어뜨린 다음이었다.

    아까는 보지 못한 얼굴인 걸 보니 무리를 나눠 처음부터 뒤쪽에 숨어있었던 모양이었다.

    남자가 망토 후드를 잡더니 날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브로치로 단단하게 고정된 망토에 턱 아래가 걸렸다.

    발끝이 바닥에서 떨어졌다.

    숨이 턱 막히며 눈앞이 노래졌다.

    “대공녀님…!”

    나를 본 것인지 르나르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턱 끝에 뾰족하고 날카로운 것이 와 닿았다.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이 여자 목을 따버리겠어!!”

    나를 인질로 잡은 남자가 소리쳤다.

    목소리가 달달 떨리는 것을 보니 르나르가 제 동료들을 가지고 놀고 있는 현실에 많이 놀란 모양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인질로 잡힌 르나르도 마찬가지로 놀랐단 것이었다.

    제정신이 아닌 건지 르나르가 쥐고 있던 검을 놓으려 했다.

    ‘아, 안 돼…!’

    당황한 내 눈이 커졌다.

    검을 버리면 르나르가 위험해질 것이었다.

    소드 마스터가 마력을 담을 수 있는 무기는 검뿐이었으니.

    본능적으로 불을 만든 내가 불길이 이는 손으로 남자의 칼 쥔 손을 잡았다.

    “으악…!”

    갑작스레 뜨거운 것이 닿자 놀란 남자가 쥐고 있던 칼을 놓쳤다.

    하지만 다른 손에 잡고 있던 날 놓치진 않았다.

    그래도 남자가 칼을 놨기 때문에 행동이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나는 망토 양쪽을 고정하고 있던 브로치를 풀어버렸다.

    다음 순간, 망토에서 분리된 내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나는 그 길로 르나르를 향해 달리려 했다.

    그런데…….

    “……!”

    강한 통증과 함께 내 몸이 뒤로 젖혀졌다.

    남자가 내 머리칼을 움켜쥐고 당긴 것이었다.

    내 몸이 남자 쪽을 향해 무너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시야가 뒤집혔다.

    왜인지 바닥이 보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보인 건 하늘이었다.

    중심을 잃은 나를, 남자가 들어 올린 뒤 절벽 밖으로 던져버린 것이었다.

    “엘로즈!!”

    르나르의 절박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을 때 나는 이미 추락하는 중이었다.

    모든 혈기가 머리를 향해 쏠리는 감각이 거북했다.

    죽을 때가 되어 돌아보니, 책 속의 삶은 꽤 행복한 삶이었다.

    사실 ‘꽤’가 아니라 ‘아주’.

    ‘많이.’

    여전히 쉽게 신뢰하지 못했고 사랑하지도 못했지만, 코웰 가문 가족들만큼은 믿고 사랑하게 됐다.

    그리고 사랑한 것보다 더 큰 사랑을 받았다.

    이것만으로도 현실 세계 삶보다는 충분히 행복한 삶이 아니었을까?

    내가 죽으면 가족들이 슬퍼할 것이 좀 걱정이었다.

    ‘바위에 머리를 부딪치면 아플까?’

    그런 생각도 문득 들었다.

    두개골이 산산이 부서질 것을 상상하니 조금 끔찍했다.

    아니, 조금 많이.

    그때, 공중에서 나를 낚아채 당기는 강한 힘이 느껴졌다.

    그 힘은 제 품으로 나를 붙이더니 으스러지도록 안았다.

    강한 바람에 거칠게 나부끼는 흑색 머리칼이 보였다.

    루비 같은 적갈색 눈동자는 내가 아닌 아래쪽을 향해 있었다.

    “엘로즈, 숨 참아.”

    ‘숨?’

    이해한 내가 급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다음 순간, 르나르가 내가 하늘을 향하도록 몸을 뒤집음과 동시에, 고막을 찢어놓을 것 같은 굉음과 함께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물살이 르나르와 나를 빨아들이는 속도는 르나르가 모는 흑마보다 빨랐다.

    절벽 아래 흐르는 강은 급류였고, 대비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물속에서의 숨은 금방 갈급해졌다.

    더는 견디지 못하고 참았던 숨을 내뱉자 르나르가 품속의 내게 입을 맞췄다.

    나는 그가 만들어준 공간에서 조금의 숨을 마실 수 있었다.

    하지만 끊어질 것 같은 의식으로 가까스로 마신 숨은 생각보다 금방 동났고, 가물가물한 눈으로 급류를 거슬러 헤엄치려 애쓰는 르나르를 눈에 담으며, 나는 일순간 정신을 잃었다.

    * * *

    얼마나 그렇게 의식을 잃었을까.

    바늘이 찌르는 것 같은 추위와 가슴을 압박하는 통증을 느끼며 내가 천근만근이 된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쿨럭-

    짧고 강한 기침과 함께 내 입에서 뜨거운 것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내가 마신 강물이었다.

    ‘르나르……. 르나르……?!’

    놀란 내가 허겁지겁 몸을 일으키려니 날 누르고 있던 단단하고 무거운 팔이 느껴졌다.

    근데 그 팔이 무척 차가웠다.

    꼭 죽은 자의 팔처럼.

    “르나…, 르나르……!”

    내가 의식 없는 르나르를 정신없이 흔들었다.

    하지만 급류 속에서 나를 끌고 나오느라 힘을 모두 써버린 건지 르나르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때마침 차가운 바람이 불자 남은 체온이 공중으로 흩날려 흩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살짝 스쳐 지나가는 공기조차 살을 에는 칼바람인 것만 같았다.

    젖은 옷을 당장 벗어버리지 않으면 르나르도 나도 목숨이 위험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내가 발을 딛고 있는 곳은 양쪽으로 높은 습곡이 둘러싸고 있는 골짜기였다.

    평소에도 눈이 많이 내렸던 건지, 습곡 바위 이곳저곳에는 틈마다 눈이 쌓여 얼어 있었다.

    ‘잠깐, 여…, 여기는……?’

    낯설지 않은 장소였다.

    숲속 야시장에 갔던 날, 내가 꾸었던 꿈.

    그 꿈속에서 보았던 장소였다.

    마력을 가진 내가 예지몽을 꾼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꿈에 따르면 이 습곡 어딘가에 분명 오두막집이 한 채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을 위해 그때 그런 꿈을 꾼 것이 틀림없었다.

    확신이 생긴 나는 의식이 없는 르나르를 등에 지고 가기로 했다.

    멀리서 보면 늘씬해 보여 몰랐는데, 키가 크고 근육이 단단한 르나르는 내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무거웠다.

    몸이 좋은 르나르를 처음 원망하게 된 순간이었다.

    조금 걷지도 않았는데 다리에 힘이 풀려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 버리고 가면 르나르가 죽을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에, 나는 이를 악물고 르나르를 옮겼다.

    어느 정도 걷자 몸에 열이 올라 조금 숨이 쉬어졌다.

    거기다 르나르의 미약한 체온까지 더해지니 조금은 더 버틸 만한 상태가 됐다.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닥에는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는데, 점성이 전혀 없는 눈인 건지 눈은 밟을 때마다 가루처럼 흩어지고 버석거렸다.

    르나르 다리가 바닥에 끌리고 있었기에 눈은 내가 걷는 방향을 따라 옆으로 파헤쳐지며 긴 흔적을 만들었다.

    습곡을 따라 걷다 보니 역시 여러 갈래로 나뉘는 길이 나왔다.

    나는 그중 가장 오른쪽 길을 택해 계속 걸었다.

    꿈속에서 그 길을 택해 걸었기 때문이었다.

    걷다 보니 오두막 한 채가 보였다.

    꿈에서 봤던 것과 꼭 같은, 나무로 만들어진 낡은 오두막이었다.

    잠금장치가 고장 나 있던 것인지 오두막 현관문은 잡아당기자 덜컹 소리를 내며 힘없이 열렸다.

    잠겨 있었다면 들어가지 못했을 테니 참으로 다행인 일이었다.

    안으로 발을 들이고 보니 알 수 있었다.

    그 집은 버려진 집이었다.

    창문은 언제 마지막으로 닦은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먼지가 껴 불투명한 상태였고, 천장 귀퉁이엔 잘 짜인 거미집까지 보였다.

    그래도 사람이 살던 곳은 맞는 건지 침대 근처에 벽난로가 있었다.

    벽난로 안엔 타다 남은 장작도 있는 듯했다.

    장작을 보는 순간 힘이 났다.

    르나르를 옮기며 어느새 거칠어진 숨을 진정시키던 나는, 남은 힘을 끌어올려 르나르를 난로 근처 침대에 눕혔다.

    그 뒤 난로 앞에 꿇어앉아 불덩이를 만들었다.

    불덩이를 조심스레 장작 쪽으로 옮기자 불덩이가 장작을 삼키기 시작했다.

    이내 벽난로에서 피어오른 온기가 차가운 공기 사이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코끝에 가장 먼저 닿는 온기를 느끼며 나는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눈앞이 핑 도는 것을 느끼며 르나르 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순간,

    까무룩.

    나는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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