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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38화 (38/100)
  • 38화

    말로 태어날걸

    르나르의 한쪽 눈썹이 비뚜름하게 올라가 있었다.

    마치 내가 지금 무슨 생각 중인지 다 안다는 것처럼.

    “황자 전하께선 지금 사병 준비로 정신이 없을 겁니다. 아침은 되어야 출발하겠죠. 제가 황자보다 일찍 도착해 레오 대공자님을 대피시키겠습니다.”

    르나르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나를 직시했다.

    믿음이 갔다.

    ‘르나르라면.’

    올렌도 보다 일찍 도착할 수 있을 것임이 자명했다.

    하지만 나는 르나르를 막았다.

    도착만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기에, 내가 가는 것이 효율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저는 북부 성의 성주인 이든 메이슨 대공작 각하와 안면이 있는 사이입니다. 그대가 가면, 그대가 레오의 편이라는 것부터 다시 증명해야 할 겁니다. 그러니 제가 가는 게 낫죠. 게다가 전 북부 성으로 가는 지름길도 알고 있습니다. 적어도 몇 시간은 도착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 겁니다.”

    내 말은 사실이었다.

    설마 꿈은 아니었겠지 싶을 정도로 희미해진 기억이긴 했지만, 예전에 레오를 만나러 간 북부 성에서 걸었던 길이 어렴풋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검은 현무암이 가득한 북부에서 유난히 눈에 띄었던 붉은 현무암 지대.’

    그곳을 지나 나왔던 길이 북부 성으로 가는 지름길이란 얘길 들었었다.

    그 붉은 현무암 지대를 찾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멀리서도 시선을 끌 정도로 인상적인 색이었으니.

    “제가 가겠습니다.”

    내가 단호하게 선언했다. 그러자,

    “그럼 대공녀님께서 가시고 제가 대공녀님을 수행하는 건 어떨까요?”

    르나르가 제안했다.

    마치 협상안인 듯.

    하지만 어조만 제안하는 어조였지 그의 눈빛은 통보하는 눈빛이었다.

    나 혼자는 절대 보내주지 않을 생각인 모양이었다.

    ‘왜 저렇게까지….’

    이해할 수 없었다.

    르나르는 우리 가문과 전혀 상관없는 남이었으니.

    이쯤 되니 르나르가 황제가 될 수 있게 코웰 가문에서 지지해줘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내 호감을 사려 저렇게 헌신적인데….’

    사실 르나르와 함께 갈 수 있단 것은 나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이득이었다.

    가는 길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데, 소드 마스터와 함께라면 안전할 테니.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든든해졌다.

    “그럼 저는 이 저택에 도련님과 대공녀님께서 안 계시는 걸 숨기는 데 주력하고 있겠습니다.”

    더글라스가 전의를 다졌다.

    “알렌, 너는? 황자와 황자의 사병들과 같이 오는 건가?”

    르나르가 소년에게 물었다.

    “네. 제가 북부 출신이라 길잡이 역할을 맡기로 했습니다. 도는 길을 택해 걸음을 최대한 늦춰보겠습니다.”

    막 깔리기 시작한 어둠 속에서도 눈빛을 빛내며 소년이 말했다.

    그렇게 우린 하나의 팀이 됐다.

    * * *

    “사병단을 지체시키는 것도 좋지만 너무 무린 하지 마. 오히려 네가 위험해질 수도 있어.”

    백마 위에 올라탄 르나르가 알렌을 슬쩍 내려다보곤 말했다.

    아직 어린 알렌이 다치게 되진 않을까 신경이 쓰이는 르나르였다.

    사실 몇 달 후면 성인이 되는 알렌이었지만, 평소 충분히 먹지 못했기 때문인지 알렌은 또래와 비교하면 훨씬 어린 느낌을 줬다.

    그럼에도 살기 위해 익힌 검술 실력은 소년의 것이라고 얕볼 수 있을 실력은 결코 아니었다.

    그럼에도 걱정되는 르나르였다.

    알렌의 나이였을 때 르나르는 지금의 알렌보다 실력이 훨씬 뛰어났지만, 그럼에도 르나르 또한 다칠 때가 종종 있었으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알렌이 르나르를 안심시키기 위해 부러 당차게 말했다.

    자신을 걱정하는 르나르에 감동 받은 알렌의 적안은 밤하늘 작은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제가 다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르나르 님께서도 아무쪼록 가시는 길 돌아오시는 길 무사하셔야 합니다.”

    “그 ‘님’ 자는 듣기 간지러우니 좀 빼지?”

    “‘님’으로 불리기 싫으셨으면 다 죽어가던 절 검투장에서 구해주지 마셨어야죠.”

    알렌이 소년답게 씩 웃었다.

    르나르가 알렌을 만나게 된 그 또한 갇힌 적 있던 검투장에서였다.

    그곳에서 알렌은 싸울 상대보다 실력이 뛰어났음에도 상대에게 배팅한 이들이 준비한 약을 잘못 먹고 싸움 중 몸이 굳었었다.

    이때 난도질당할 뻔한 알렌을 구한 게 르나르였다.

    알렌은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눈앞이 아찔해졌다.

    당당한 알렌에 르나르 눈썹 한쪽을 삐쭉 올라갔다.

    “너는 올렌도 황자도 ‘황자’라고만 부르면서 나한텐 그러면….”

    “르나르 님께서도 원래는 올렌도 황자에게 존칭 쓰지 않으시잖아요. 대공녀님 앞에서만 예의를 차리시는 거, 맞죠?”

    “…….”

    정곡을 찔린 르나르가 할 말을 잃었다.

    알렌이 그 순간 저택에서 나오고 있던 엘로즈를 봤다.

    “예쁜 분이십니다. 르나르 님께서 왜 좋아하시는지 알 것 같습니다. 아, 그렇다고 제가 마음이 있다는 건 아니고요!”

    순간적으로 찌를 듯 날카로워진 르나르 눈빛을 본 알렌이 놀라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낮게 한숨 쉰 르나르 시선이 엘로즈에게로 움직였다.

    이제 그녀는 르나르를 닮은 흑마 위에 올라타는 중이었다.

    “…말로 태어날 걸.”

    르나르의 작은 중얼거림에 알렌이 제 귀를 의심하며 르나르를 봤다.

    하지만 르나르의 표정은 그가 엘로즈를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을 대할 때처럼 한결같이 건조했다.

    ‘…저 여자를 위에 태우면 어떤 느낌일까?’

    르나르는 제 흑마의 인생이 난생처음 부러워졌다.

    한편 엘로즈가 흑마 위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자 더글라스가 모포처럼 보이는 망토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받자마자 무게감이 느껴질 만큼 두꺼운 망토였다.

    “뭔가요, 이게?”

    “북부에 가까워질수록 추워지실 겁니다. 이곳은 여름이지만 녹지 않는 빙벽 근처인 그곳은 늘 겨울이니까요. 도련님께서 챙겨드리라고 했습니다. 아, 그리고. 이것도요, 대공녀님.”

    더글라스가 다음으로 내민 것은 브로치였다.

    “고정은 그걸로 하시면 됩니다. 하녀를 시켜 대공녀님 방에서 가져왔습니다.”

    푸른빛 사파이어 브로치 안쪽으로 비쳐 보이는 코웰 가문의 방패 위 장미 문장(紋章)을 엘로즈가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녀 이름에 장미가 들어가는 이유가 거기 있었다.

    엘로즈는 대공과 코웰 형제들에게 코웰 가문의 상징이었다.

    “고마워요, 더글라스.”

    “저희 도련님 잘 부탁드립니다. 의외로 사고를 많이 치고 다니셔서요.”

    말은 그렇게 해도, 더글라스 눈빛이 르나르에 대한 걱정으로 물들어 있다는 것을 엘로즈는 눈치챌 수 있었다.

    “걱정 마요. 더글라스의 도련님은 제가 무사히 데리고 다녀올게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저희 도련님만큼 저 월급 많이 주실 분은 이 수도엔 없을 것 같아서요. 아니, 이 제국이려나?”

    “그 말은 르나르를 많이 좋아한다는 말인가요?”

    “대공녀님께선 독심술을 쓰시는 게 아니신지 가끔 무섭습니다.”

    엘로즈가 미소 짓자 더글라스가 따라 웃었다.

    그 풍경을 질투한 르나르가 출발을 서둘렀기 때문에, 여정은 바로 다음 순간 시작되었다.

    엘로즈와 르나르가 탄 흑마와 백마가 탄 두 필의 말이 북부로 향했다.

    * * *

    수도 외곽에서 포털을 통과해 몇 개의 지역은 뛰어넘고도 한참은 더 달렸기에 북부 안델슨 산맥에 도착했을 때 르나르와 나는 매우 지쳐 있었다.

    7시간을 꼬박 말을 탄 직후였다.

    말의 체력을 위해 중간에 잠시 속도를 늦춘 것 외엔 한시도 제대로 쉬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도 그렇게 달렸기에 안델슨 산맥만 넘으면 바로 북부 성이었다.

    게다가 이 산맥에서의 지름길은 내가 알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4시간은 더 걸려야 하는 여정을 한두 시간 안에 끝낼 수 있는 길이었다.

    “편한 길은 아니긴 한데 그래도 위험하진 않을 거예요.”

    붉은 현무암 위에서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는 백마를 바라보던 내가 시선을 돌려 르나르에게 말했다.

    확실히 편한 길은 아니었다.

    길의 한쪽이 절벽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길 자체가 좁은 편은 아니었고 르나르는 물론 나도 말은 잘 탔기 때문에 충분히 안전할 것으로 생각됐다.

    단, 그것은 그 길 위에 우리를 방해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의 이야기였다.

    “이 길을 이용하고 싶으면 통행료를 내야 하는데?”

    한동안 달리다 길 한 가운데를 막고 선 도적 무리를 마주하게 되었을 때, 나는 무섭다는 생각보다 짜증이 먼저 일었다.

    그만큼 피곤했기 때문이었다.

    르나르도 나와 같았는지, 별다른 대꾸 없이 망토 속에서 작은 자루를 꺼내든 그가 자루를 그들을 향해 던졌다.

    자루가 짤랑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도적 중 하나가 휘적휘적 걸어오더니 자루를 집어 안을 확인했다.

    그러곤,

    “오, 대장…!”

    눈이 커져서는 저들의 우두머리를 찾았다.

    방정맞게 뛰어간 그가 금화가 가득한 자루를 열어 보이자 대장이라 불린 사내가 눈썹을 치켜떴다.

    사내는 한쪽 눈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흉터를 얼굴에 가지고 있었다.

    흉터 때문인지 험악한 인상이었다.

    그제야 나는 등허리가 조금 오싹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거, 이거, 귀한 집 도련님과 아가씨인가 보시군요. 곱게 보내드리긴 어렵겠습니다.”

    사내가 허리춤에서 철퇴를 꺼내 들었다.

    어둠 속에서 은빛의 철퇴가 번쩍했다.

    문득 두려워진 내가 르나르를 봤다.

    하지만 르나르는 귀찮은 벌레를 보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곱게 보내주지 않으면 어쩔 건데?”

    “글쎄요. 도련님은 털어보면 귀한 게 더 많이 나올 것 같으니 양말까지 벗겨 털어보고…. 아가씨께서는…, 꽤 귀하게 자라셨을 것 같으니 새로운 세상을 알려 드릴까요?”

    금으로 된 앞니를 드러내며 웃은 사내가 자신의 아랫도리를 두어 번 툭툭 쳤다.

    그리고 그 순간,

    르나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한쪽만.

    싸늘하게 가라앉은 르나르의 적갈색 눈동자에 나는 이제껏 그에게서 느껴보지 못한 한기를 느낄 수 있었다.

    “르나르….”

    내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하지만 르나르 귀엔 정말로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사내를 보고 있었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르나르가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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