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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37화 (37/100)
  • 37화

    제가 가겠습니다

    별채 청소를 마친 사용인들이 돌아오고, 엘로즈와 르나르가 크림과 딸기로 케이크를 장식하고 나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선연한 노을빛에 물든 엘로즈가 완성된 케이크를 직접 포장해 더글라스에게 건넸다.

    더글라스가 케이크를 코웰 저택까지 배달되게 하는 임무를 맡았기 때문이었다.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특히 좋아하는 에반을 생각하는 엘로즈 입꼬리에 은은한 미소가 어렸다.

    “끝나면 다시 와요. 같이 먹어요.”

    엘로즈가 테이블 위 케이크를 가리켰다.

    만드느라 함께 고생한 르나르와 먹기 위해, 그녀가 르나르의 방으로 가져온 케이크였다.

    단 것을 좋아하는 더글라스가 아기자기한 분홍색 케이크를 보고 입맛이 동해 웃었다.

    그러다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졌다.

    엘로즈의 등 뒤에서, 그에게 손짓으로 이야기하는 르나르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르나르는 먼저 검지를 들더니 더글라스를 가리켰다.

    그다음엔 그의 옆 빈 의자를 가리켰다.

    그러곤 앉으면 안 된다는 듯 손가락을 까딱까딱.

    그다음엔 다시 더글라스와 빈 의자를 한 번씩 가리키고는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앉으면 죽는다 그 소리였다.

    엘로즈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으니, 돌아오지 말고 빠지라는 것이 틀림없었다.

    뚱해진 더글라스를 이상하게 느낀 엘로즈가 뒤돌아 르나르를 봤다.

    제 목을 긋던 손가락을 어느새 등 뒤로 감춘 르나르는 엘로즈를 보며 천사처럼 웃었다.

    더글라스의 깊은 한숨이 진홍빛 노을 속으로 흩어졌다.

    *

    “혹시 아까 더글라스한테 뭘 한 거예요?”

    좋아하는지도 몰랐던 케이크를 무척 잘 먹는 르나르에게 내가 물었다.

    “뭘 하다니요?”

    르나르가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 무구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갑자기 표정이 안 좋아지길래….”

    “글쎄요. 왜 그랬지? 전혀 모르겠네.”

    어깨를 으쓱한 르나르가 싱긋 웃었다.

    혹시 케이크를 혼자 독차지하고 싶었던 걸까?

    저렇게 잘 먹는 걸 보면.

    “본인 사람한텐 잘 해줘야죠. 맛있는 게 있으면 나눠 먹기도 하고.”

    사실 어련히 잘 해주겠거니 생각하면서도 나는 괜히 르나르를 타박하게 됐다.

    더글라스가 르나르에게 잘해주길 바랐는데, 르나르가 더글라스에게 잘해줘야 더글라스도 르나르한테 잘해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더글라스가 르나르에겐 거의 유일한 가족이니….’

    나는 르나르가 외로운 게 싫었다.

    그때, 르나르가 케이크 한 조각을 포크로 찍어 내 앞에 내밀었다.

    “…뭐하는 거예요?”

    “제 사람한텐 잘 해주라면서요. 맛있는 게 있으면 나눠 먹기도 하고. 나눠 먹고 있는데?”

    고개를 까딱하며 웃는 르나르 위로 테라스를 배회하던 붉은 노을빛이 쏟아졌다.

    “아니, 제가 아니라 더글….”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 르나르가 손을 뻗어 한 손으로 내 턱을 가득 움켜쥐었다.

    르나르 한 손에 내 얼굴이 거의 다 들어간다는 건 오늘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르나르가 부드럽게 내 볼을 누르자 내 입이 자연스럽게 벌어졌다.

    르나르가 그 안으로 쏙, 케이크 조각을 넣었다.

    “케이크 먹는 모습이 예쁘시네요.”

    루비 같은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근데 여기…, 크림 묻었다.”

    르나르가 톡톡, 그의 오른쪽 입꼬리를 두드렸다.

    내가 냅킨으로 내 오른쪽 입가를 문지르니, 르나르가 낮게 웃으며 내게 다시 손을 뻗었다.

    내 얼굴을 재차 감싼 르나르가 엄지로 내 왼쪽 입꼬리를 쓸었다.

    입꼬리뿐 아니라 입술까지.

    순간 르나르의 적갈색 눈동자가 깊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노크 소리와 거의 동시에 더글라스가 방안으로 들이닥쳤다.

    내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물리자 르나르가 날카로워진 눈으로 더글라스를 봤다.

    르나르는 무척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황자님, 알렌이 왔습니다. 황자님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나중에.”

    “지금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제가 언뜻 들어도…, 지금 들으셔야 하는 내용인 것 같습니다.”

    말하던 더글라스의 시선이 잠시 내 쪽을 향했다.

    ‘갑자기 날 왜 보지?’ 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쯤, 르나르 역시 이를 이상하게 여긴 건지 고개를 끄덕였다.

    방 밖으로 나간 더글라스는 백발에 적안을 가진 소년과 함께 돌다왔다.

    소년은 나를 보더니 흠칫 놀랐다.

    하지만 언제 놀랐냐는 듯 금세 표정을 가다듬었고, 나를 제외한 르나르, 더글라스, 소년 세 사람은 르나르의 방에 딸린 응접실로 들어갔다.

    소년을 마지막으로 응접실 문이 닫혔다.

    그때,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내 시야에 테이블 위 케이크가 들어왔다.

    르나르한테만 맡겨놓으면 르나르가 더글라스에게 케이크를 먹이지 않을 것 같았다.

    방금 더글라스를 보던 르나르 눈빛을 보았을 때.

    나는 세 사람이 함께 먹을 수 있도록 케이크를 가져다주기로 했다.

    ‘방금 방에 들어갔으니 설마 벌써 얘기를 시작하지는 않았겠지.’

    서둘러 케이크 접시를 챙긴 내가 응접실 문 앞에 섰다.

    노크를 하기 위해 손을 들었던, 바로 그 순간,

    “레오 코웰 대공자님께서 위험하십니다.”

    안에서 작게 들려오는 소리에 나는 그대로 굳을 수밖에 없었다.

    *

    알렌이 전한 갑작스러운 소식에 르나르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때,

    달칵—

    응접실 문이 열렸다.

    그곳엔 르나르만큼이나 굳은 표정의 엘로즈가 서 있었다.

    당황한 르나르의 입이 벌어졌다.

    엘로즈가 이미 들은 것이라 확신한 더글라스의 눈도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하지만 이들이 놀란 것도 알렌만큼은 아니었다.

    알렌은 르나르의 자객 자작극에서 자객 역할을 맡은 뒤 르나르가 수하로 고용하게 된 소년이었다.

    그런데 엘로즈가 그게 자작극이었단 걸 바로 눈치챘단 얘길 듣고, 알렌은 그녀를 무서워하게 됐다.

    자신에게 허점이 있어 엘로즈가 눈치챘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르나르는 알렌의 실력을 인정하고 고용했기 때문에, 알렌은 르나르의 수하로서 올렌도를 지켜보는 협잡꾼 노릇을 맡게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또다시 마주친 엘로즈에게 자신의 모자란 부분을 들킬까 봐 알렌은 두려웠다.

    고아인 그는 르나르가 그를 거둬준 것을 상당히 고맙게 받아들이는 중이었기에.

    하지만 엘로즈는 이런 알렌의 마음 까지 헤아려줄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레오가 위험하단 얘기에 모든 의식이 집중된 상태였다.

    “르나르에게 하려던 얘기, 말해요, 나한테. 토씨 하나 빼놓지 말고.”

    드물게 사용하는 명령조로 말하는 엘로즈가 풍기는 위압감에, 겁먹은 어린 알렌이 어깨를 잘게 떨었다.

    *

    “올렌도 황자가 레오 코웰 대공자님께서 계신 북부 성을 기습하겠다고 했습니다. 지금 사병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공녀님을 이 저택에 보내는 대공 각하의 조건이 레오 대공자님을 건들지 말라는 것이었을 텐데.”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외출에서 돌아온 뒤로 심사가 굉장히 뒤틀려 보였습니다.”

    “…북부 성이 기습당하면 대공자님께 타격이 클까? 내가 황자 전하 곁에서 지켜볼 때만 해도 대공자님의 반역 준비엔 증거가 거의 없었는데.”

    “그때보다는 뭔가 알아낸 것 같긴 합니다. 전에는 기습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는데, 이번엔 기습하면 꼬리를 잡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거든요.”

    르나르와 알렌이 대화를 이어갔다.

    나는 내 눈치를 살피는 더글라스를 애써 무시하며 그 대화를 들었다.

    내 앞에서 르나르를 꾸역꾸역 황자라고 부르더니, 내가 르나르가 올렌도가 아닌지 안다는 사실을 더글라스는 몰랐던 모양이었다.

    머리가 핑핑 돌았다.

    레오가 반역을 준비하는 줄은 까맣게 몰랐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레오는 지금 거기 있어야 해.」

    차라리 레오를 넘겨주자는 미르엣에게 겔리온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땐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레오가 황궁에 갇히게 되면 반역 준비에 차질이 생기니 그건 안 된단 소리였던 모양이었다.

    대공은 물론 형제들 모두 레오의 반역 준비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이 분명했다.

    아니, 어쩌면 레오가 주체가 아니라 대공이 주체가 되어 레오에게 지시한 일일 수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레오가 있는 북부 성 성주인 이든 메이슨 대공작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도 레오가 아닌 코웰 대공이었다.

    레오는 어렸을 적 검술 수련을 위해 북부 성에서 지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메이슨 대공에게 레오를 맡긴 것이 코웰 대공이었다.

    메이슨 대공과 코웰 대공은 과거 전쟁터를 함께 누빈 전우 사이였다.

    황제에게 약점이 잡혔다는 코웰 대공이 위험을 무릅쓰고 반역을 준비할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날 파혼시켜 주려고….’

    레오가 북부에 간 시점이면 내가 황궁으로 황제를 만나러 갔을 때와 일치했다.

    이때 나는, 황제의 계략으로 그의 부름에 응할 수밖에 없었었다.

    우리 가족은 아마 내가 그렇게 황실에 휘둘리며 평생을 살길 바라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래서 무너뜨려야겠단 생각을 하게 된 것이겠지. 황실을.’

    나에겐 날 위해 그런 위험을 감수하기로 한 그들을 보호할 책임이 있었다.

    “레오에게 당장 이 사실을 알려야 해요. 집에 편지를 보내겠어요.”

    내가 앉아있던 응접실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날 막아선 건 의외로 알렌이었다.

    “그건 안 됩니다. 대공녀님께서 코웰 저택으로 보내시는 최근 편지들은 모두…, 철저하게 검열받아 왔습니다. 코웰 저택에 사용인 중에 올렌도 황자에게 편지 내용을 전달하는 첩자가 있습니다. 대공녀님께서 편지를 쓰시면, 그 내용은 결국 올렌도 황자에게 들어가게 될 겁니다.”

    내 입이 벌어졌다.

    전혀 알지 못했다.

    ‘내 편지가 검열받고 있었다니….’

    그동안 편지를 써도 아무 문제가 없던 것은, 내가 편지에 일상적인 얘기밖에 쓰지 않아서인 모양이었다.

    편지가 검열받고 있다면 올렌도가 북부 성을 칠 테니 레오를 대피시키란 말을 편지에 쓸 순 없었다.

    ‘르나르나 더글라스를 코웰 가문으로 보내 직접 말을 전하게 할까?’

    그런데 만약 첩자가 두 사람의 얼굴을 알고 있다면?

    그 후 레오가 사라진다면?

    르나르나 더글라스가 올렌도의 의심을 살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올렌도의 편인 척 올렌도 곁에 머무르는 것일 텐데.

    ‘그럼…, 어떻게 하면 좋지…. 아, 그래. 내가 북부로 직접.’

    결심이 선 순간이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단호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고개를 돌린 내 시선과 적갈색 눈동자의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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