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손수건
날 안은 르나르의 어깨너머로 주방으로 들어서는 올렌도가 보였다.
르나르가 올렌도의 기척을 미리 느끼고 내가 만든 불을 숨기기 위해 날 안은 모양이었다.
‘내가 마녀란 사실을 숨겨주기 위해.’
다행히 내가 만든 불은 르나르 몸에 가려 올렌도의 시선에서 숨겨졌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마음대로 불을 끄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마법을 다루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꺼지는 불꽃에 의존하고 있던 것이었다.
작지만 그렇다고 덜 뜨겁진 않은 불이 르나르의 가슴을 험하게 지졌다.
그의 품에서 벗어나고자 몸을 틀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르나르는 나를 더 꽉 끌어안을 뿐이었다.
‘분명 많이 아플 텐데….’
르나르는 앓는 소리 하나 내지 않고 그 고통을 온전히 참아냈다.
힘이 꽤 들어가 보이는 그의 턱선만이 그가 현재 어금니를 꽉 물고 있단 사실을 알려줄 뿐이었다.
올렌도는 르나르가 나를 안은 모습을 보고 당황했다.
잠시 허둥대던 그는 이내 주방 밖으로 사라졌다.
올렌도가 아무리 날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내가 그의 예비 약혼녀인 것은 맞는지라 혹시라도 난동을 부리지 않을까 염려했는데 참 다행인 일이었다.
내가 급하게 르나르의 품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경악했다.
잠깐 사이 르나르의 가슴께가 엉망이 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옷은 다 타버렸고, 선홍빛 진피층이 노출된 피부는 끔찍했다.
마치 피부 표피를 칼로 도려낸 것 같은 모습이었다.
거기에 물집이 잡히고 핏방울까지 맺힌 것을 보니 나는 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놀라서인지 손 위의 불꽃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아아…….”
충격으로 비틀대니 르나르는 오히려 나를 부축했다.
그리고 안심시키기 시작했다.
“괜찮습니다. 마법사라 치유 속도가 월등히 빨라서요. 대공녀님께 보여드릴게요, 이 상처가 어떻게 낫는지. 마력이 깨어나셨으니 대공녀님도 이제 웬만하면 상처는 흉터 없이 나으실 겁니다. 이걸 보고 나면 마녀인 걸 조금은 더 사랑하실 수 있게 될 겁니다.”
르나르가 웃었다.
마력의 효용성을 보여줄 수 있게 된 게 기쁘다는 듯.
하지만 르나르가 짓는 가짜 웃음의 의도는 사실 명확했다.
미안해하지 말라는 것.
나는 왜인지 심장 한쪽이 쓰리게 아팠다.
‘깨끗한 수건. 깨끗한 수건. 상처에 댈 만한….’
방으로 뛰어 들어간 내가 정신없이 주위를 두리번댔다.
르나르의 상처에 올릴 깨끗한 수건을 찾아야 했다.
상처의 열감을 식혀줄 수 있게.
그런데 내 방에 새 수건이 있었던가?
하녀들은 새 수건을 어디에 보관하지?
그때, 빨간색 리본으로 잘 포장된 연보라색 선물 상자가 내 눈에 들어왔다.
르나르에게 선물하려 샀지만, 줄 타이밍을 놓치고 지금껏 보관 중이던 손수건 상자였다.
“저거면 되겠다.”
내가 갈기갈기 찢는 수준으로 포장을 뜯었다.
그러곤 상자에서 손수건을 꺼내 욕실로 달려갔다.
손수건을 정성껏 빤 나는 찬물을 담은 은색 대야와 젖은 손수건을 르나르에게 가져갔다.
르나르는 그의 방 소파에 길게 누워 늘어지게 햇살을 맞는 중이었다.
내가 얼마나 급한 마음인지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셔츠 앞섶을 풀어헤친 채 나른한 표정을 지은 그는 꼭 일광욕 중인 재규어 같았다.
“아, 대공녀님?”
대야를 내려놓는 나를 발견한 르나르가 싱긋 웃었다.
“지금 그렇게 여유 부릴 때에요? 이렇게 다쳐서는….”
엉망이 된 그의 가슴이 속상해 내가 괜히 그를 타박했다.
르나르는 그런 내 손을 언제 가져갔는지 새끼손가락을 가만가만 만지는 중이었다.
“괜찮아요. 지금 이 순간도 낫고 있는걸요. 대공녀님께서 입 맞춰주시면 더 빨리 나을 것도 같고….”
순간 갈등하게 됐다.
‘입 맞춰줄까…?’
그런 내 눈빛을 캐치한 르나르가 손가락을 만지던 행동을 멈추고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마치 자신은 준비가 되었다는 듯.
순간 바람이 불어 들지 않았다면 그대로 입을 맞춰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 이 순간도 낫고 있다는 르나르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의 상처는 처음 생겨났을 때와 비교해 확실히 점점 나아지고 있었다.
마력을 가지고 있단 것은 생각보다 꽤 대단한 일 같았다.
그럼에도 가벼운 상처는 아니었기에 치료는 여전히 필요해 보였다.
나는 일단 가져온 손수건으로 상처의 열감을 식혀주기로 했다.
대야에 담갔다 짜낸 손수건을 조심스레 상처 위에 올리자 르나르가 손수건을 봤다.
그러더니 별안간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남자…, 손수건이네요…?”
심상치 않은 목소리가 의아해 내가 르나르를 봤다.
날 마주 본 르나르 표정이 어두웠다.
르나르가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입을 벙긋벙긋했다.
하지만 이내 입을 다물어버리길래 내가 그를 재촉했다.
“왜요, 뭔데요. 뭐 때문에 그런 표정을 짓는 건데요.”
“황자님께서….”
“황자님께서?”
“예전에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대공녀님께서 남자 손수건을 사는 것을 보셨다고. 선물용으로.”
전하께 드릴 선물이라도 샀냐더니, 기어코 매장까지 들어가 내가 뭘 샀는질 알아낸 모양이었다.
뭐, 상관은 없었다.
깜짝 선물로 준비한 것이긴 했지만 르나르가 알게 되었다고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으니.
‘어차피 지금 상황에선 선물의 의미가 약하기도 했고.’
“네, 맞아요. 선물용이었죠. 제때 주진 못했지만.”
“저 때문에 열게 되었네요. 선물의 주인에게 미안해서 어쩌죠?”
르나르가 전혀 미안해 보이지 않는 얼굴로 내게 말했다.
그의 얼굴은 미안하기보단 속상한 사람 같았다.
‘왜 저런 얼굴을 하는 걸까? 나까지 속상하게.’
“그럼 스스로에게 미안해하면 되겠네요. 르나르가 선물의 주인이니.”
“…네?”
“?”
“저한테요? 저한테 주려고 사신 거였다고요?”
손수건과 나를 번갈아 보며 르나르가 눈을 깜빡였다.
뭐가 그렇게 믿기 어려운지 믿지 못하겠는 모양이었다.
“르나르 주려고 산 거예요. 르나르가 신경 써서 저를 집에 보내준 게 고마웠고, 마녀가 아니라고 심하게 선 그은 게 미안했고. 사실은 마녀가 맞았으니…. 참 우습죠? 어쨌든 그대 주려고 산 게 맞아요. 그대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은요? 숨겨진 애인이라든지….”
“숨겨진 애인이요? 나랑 거의 매 순간 붙어있으면서 그런 걸 물어요? 제가 그런 게 있을 리가….”
내 말에 어두웠던 르나르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한밤중에 전구가 켜진 것만 같았다.
르나르는 이내 가슴에서 손수건을 떼더니 이리저리 돌려보기 시작했다.
“어머, 그걸 왜 움직여요! 당장 내려놔요!”
“여기 수놓인 은실이 꼭 대공녀님 머리카락 색 같습니다. 대공녀님을 닮은 손수건이네요, 이 손수건을 보면 대공녀님 생각이 날 것 같습니다. 정말 마음에 듭니다.”
신기했다.
나는 르나르를 떠올리며 이 손수건을 샀는데, 르나르는 오히려 손수건을 보며 나를 떠올리고 있었으니.
하지만 르나르가 상처에서 손수건을 떼고 있는 것을 계속 봐줄 수 없었다.
“당장 내려놔요. 안 그러면 뺏어갈 거예요.”
“어어…? 줬다 뺏는 게 어딨습니까? 줬다 뺏는 건 나쁜 거예요.”
“내놔요.”
“로즈…!”
르나르가 드물게 하는 하대로 내 이름을 부르더니, 내가 멈칫한 사이 얼른 손수건을 다시 상처 위에 올렸다.
그러곤 뾰루퉁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그 모습이 말 잘 듣는 대형견 같아 나는 조금 즐거워졌다.
창문 틈으로 불어온 여름 바람이 싣고 온 장미 향이 향긋했다.
*
머무는 저택으로 돌아간 올렌도는 쉬지 않고 방안을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
“르나르…. 르나르한테 넘어갔단 말이지…?”
올렌도는 몸만 조금 움직였을 뿐 르나르를 밀어내지 않던 엘로즈를 생각하는 중이었다.
두 사람이 머무는 저택을 찾은 것은 소피아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소피아에게 저택 감시를 맡겨놓은 뒤로 몇 번 편지를 주고받은 것을 빼곤 그녀와 교류가 없었는데, 소피아가 이를 퍽 섭섭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올렌도는 사실 소피아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다.
소피아를 처음 유혹하게 된 건 엘로즈가 황자의 저택에 머물기 시작하기 전 엘로즈의 평판을 망치기 위해.
엘로즈를 위해 올렌도가 준비한 작은 선물이었다.
소피아는 하녀들 사이에서 거짓 소문을 퍼뜨림으로써 그 일을 아주 잘 해내 주었다.
엘로즈는 만나보지도 못한 하녀들 사이에서 이미 성질이 아주 고약하고 모시기 어려운 손님이 되어있었다.
그 후 올렌도는 르나르와 엘로즈를 감시하는 일까지 소피아에게 추가로 맡겼다.
사정이 이랬다 보니, 소피아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던 올렌도는 소피아를 만나기 위한 시간을 굳이 내고 싶지가 않았다.
오로지 이용하기 위해 만든 인연이었다.
하지만 제대로 이용하려면 지나치게 섭섭하게 만드는 것은 곤란했다.
때문에 간 것이었는데, 르나르가 성공한 모습을 직접 보게 될 줄이야.
‘르나르가 대공녀를 꼬시다니. 대공녀가 르나르한테 넘어갔다니.’
기뻐야 했다.
올렌도의 계획이 실현된 것이었으니.
이제 르나르에게, 그가 진짜 황자가 아니라고 엘로즈에게 밝히라고 명령만 하면 됐다.
농락당한 엘로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구경은 가 줘야 도리겠지?
근데 좋아야 할 기분이 무척 나빴다.
마치 연인의 외도를 목격한 것 같은 더러운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은 올렌도의 저택이었고, 올렌도의 공간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의 수하와 예비 약혼녀가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다.
그게 올렌도는 무척 화가 났다.
물론 올렌도는 자신의 그 감정이 매우 불합리하단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엘로즈를 꼬시라고 르나르에게 명령한 것이 그였으니.
‘하지만 그래도 내 장소에서…, 내 것을 건드리면 안 되지.’
올렌도가 이를 아득 갈았다.
코웰 가문 막내딸을 제 것이라 여기게 될 줄도 몰랐으면서.
‘분명 크게 다툰 것 같다고 소피아가 말했었는데…. 대체 언제 또 그렇게 사이가 좋아진 거지? 설마 벌써….’
둘 사이를 상상하는 올렌도의 마음속에서 다시금 분노가 일었다.
화풀이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엘로즈를 다시 빼앗아올 것과 별개로 화풀이할 곳이 필요했다.
‘르나르?’
하지만 르나르를 벌줄 순 없었다.
줄 수 있다면 줬겠지만, 아무리 올렌도라도 자신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 중인 수하에게까지 벌줄 명분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올렌도의 분노의 화살은 아직 건드릴 생각이 없던 곳으로 내리꽂혔다.
“코웰 가문 첫째 아들이 숨어든 곳이 어디라고 했지?”
올렌도가 곁을 지키던 수하 알렌에게 물었다.
“북부 성입니다.”
“북부 성을 불시에 쳐야겠어. 지금 당장 사병을 준비해.”
놀란 알렌이 침을 꿀꺽 삼켰다.
올렌도의 연하늘색 눈동자에 기이한 불꽃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