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그 처음을 이렇게 가져간다고?
엘로즈를 연못가에 세워둔 르나르는 커다란 굴참나무를 찾았다.
그 나무 근처에 효력 좋은 마법약을 파는 노점상이 있단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네가 릴리안이야?”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릴리안이 고개를 들어 르나르를 봤다.
그러곤 얼굴을 붉혔다.
‘첫눈에 반한다는 건 이런 느낌일까?’
릴리안이 생각했다.
“제 이름을 어떻게 아시나요?”
릴리안이 르나르에게 물었다.
하지만 르나르는 그런 릴리안의 질문엔 대답하지 않은 채, 그가 그녀를 찾게 된 이유를 곧장 밝혔다.
“마력을 가진 게 틀림없는데 그 능력이 드러나진 않는 사람이 있어. 내가 봤을 땐 누군가 마력을 일부러 재워놓은 것 같은데… 혹시 그걸 깨울 수 있는 약도 있나?”
“그런 경우라면 이 약을 먹으면 효과가 있을 거예요. 마력을 억제하는 것도 보통은 마법약을 통해 이루어지니, 반대로 풀어주는 것도 약을 통해 가능…… 아악, 손님……!”
릴리안이 경악했다.
그녀에게서 약병을 건네받은 르나르가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던 중 그걸 일부 마셔버렸기 때문이었다.
르나르는 사실 이 약을 엘로즈에게 먹일 생각은 없었다.
다만 혹시 나중에 필요한 일이 생길까 싶어, 이곳까지 온 김에 사놓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엘로즈가 먹을 가능성 있는 약의 안전을 확인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문제 있는 약이라면, 그 문제는 바로 여기서 나타나야 했다.
약을 파는 이 여자가 바로 해결할 수 있도록.
놀라는 릴리안의 표정을 보며 르나르는 미리 맛보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르나르는 온몸을 휘감아오는 열감을 느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한 번에 불이 붙어버린 것 같았다.
“……!”
커다란 고통을 느낀 르나르가 가판대를 짚었다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이 과정에서 마법약 몇 개가 바닥으로 떨어졌고, 약병 깨지는 소리를 들은 사람들의 시선이 르나르 쪽으로 향했다.
쓰러진 르나르 주변으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였다.
“손님! 괜찮으세요, 손님?! 이 약은 잠든 마력을 깨워주는 약이라 이미 마력이 강한 사람은 먹으면 절대 안 되는데……!”
릴리안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자 모인 사람 중 누군가가 릴리안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아가씨, 정신 차려. 진정제 가지고 있는 거 없어? 마력이 날뛰고 있는 거면 진정제로 진정시켜야 할 것 아냐.”
그 말을 들은 릴리안이 ‘아하,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으며 가판대 아래쪽으로 허리를 숙였다.
다시 허리를 편 그녀의 손엔 맑은 청록색 액체가 든 약병이 들려있었다.
릴리안은 그 청록색 액체를 입안에 머금은 다음 쓰러진 르나르 옆에 앉았다.
그 후, 르나르의 머리를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렸다.
그녀는 날뛰는 마력으로 정신이 없을 르나르에게 직접 진정제를 먹일 생각이었다.
한편, 잠시 의식을 잃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르나르는 잔뜩 뻑뻑해 떠지지 않는 눈을 애써 떴다.
눈꺼풀이 무거워 눈이 자꾸 다시 감기려 했다.
그런데 그 와중, 약을 팔던 여자가 두 눈을 꼭 감은 채 그에게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르나르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 건가 싶었다.
‘설마 저 여자…, 나한테 입을 맞추려는 건가…?’
르나르는 그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실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여자와 입을 맞춰본 적이 없었다.
손가락 가득 상처가 생기면서도 끝끝내 지켜낸 몸이었다.
‘그런데 그 처음을 이렇게 가져간다고?’
그때, 두 눈을 꼭 감은 엘로즈 모습이 르나르의 눈에 들어왔다.
르나르의 입술 새로 허탈한 웃음이 흘렀다.
‘아무리 날 좋아하지 않는다지만…, 막아주지도 않으려고?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니야?’
입꼬리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질 듯한 아픔을 이겨낸 르나르가 몸을 일으켰다.
꽉 쥐면 부서질 듯 가녀린 엘로즈의 손목을 그는 욕심껏 쥐었다.
그러자 아픔이 조금 사라졌다.
놀란 엘로즈가 눈을 떴다.
“르나….”
엘로즈가 말을 마치기도 전 르나르가 그녀를 당겼다.
뜨겁게 달아오른 손바닥으로는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그의 입술 위로 닿는 그녀의 입술 감촉이 느껴졌다.
황홀해진 르나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온몸이 순식간에 편안해졌다.
약을 마시기 전보다도 편안해진 느낌이었다.
거기서 멈춰야 했다.
만약 르나르가 엘로즈의 몸을 원하는 이유가 단순히 악몽 때문이라면.
혹은 신체적 아픔 때문이라면.
이제 아프기는커녕 마력이 신나 널뛰어 기력이 넘쳐 주체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으니.
하지만 르나르는 멈출 수가 없었다.
그동안 긴가민가 해온 감정 하나가 확실해졌다.
엘로즈라서 몸이 닿아도 괜찮은 게 아니었다.
엘로즈라서 닿고 싶은 것이었다.
닿을 수 있을 만큼 끝까지.
그에게 허락되는 만큼 끝까지.
르나르는 닿고 싶었다.
넣을 수 있는 건 다 넣고 싶었다.
본능에 충실해진 르나르의 혀가 엘로즈의 입술 새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르나르는 자신이 잠든 마력을 깨우는 마법약을 먹었었단 사실을 기억해냈다.
아마 혀에 약의 일부가 남아있을 것이었다.
깨닫고 당황해 눈이 커진 순간 쓰러진 엘로즈가 그의 품에 안겼다.
놀란 르나르의 얼굴이 이제 막 밝아오기 시작한 새벽의 푸른 하늘보다 더 파래졌다.
*
“신이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계신다면 로즈를 깨워주세요. 로즈가 깨어난다면 계신 줄로 믿겠습니다. 그냥 깨워주기 싫으시면…. 그래요, 저를 대신 데려가셔도 되니 대신 로즈를 부디….”
중얼중얼.
누군가의 쉬지 않는 속삭임이 듣기 좋은 노래 선율처럼 이어졌다.
내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시야가 흐릿했다.
내 손을 양손으로 꼭 잡고 그 위에 이마를 맞댄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초점을 잡기 위해 뻑뻑한 눈을 깜빡이고 있으려니 그 형체가 달려들 듯 내게 가까워졌다.
“로즈, 정신이 들어?!”
빛을 받아 반짝이는 르나르의 적갈색 눈동자가 점점 선명해졌다.
“제가…, 어떻게 된 거죠…?”
내가 몸을 일으키자 르나르가 나를 부축해 침대 헤드에 기대앉도록 도와줬다.
“가만있어 봐. 열이….”
내가 괜찮다는 것을 충분히 살피고 나서야, 르나르는 안도의 한숨을 깊게 내쉬곤 다시 예전 같은 말투와 태도로 나를 대하기 시작했다.
“기절하셨습니다. 제가 대공녀님께 입을…, 맞춘 뒤에…. 아마 제가 대공녀님께 입 맞추기 직전에 먹은 약 때문인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대공녀님.”
‘약?’
대체 무슨 약을 먹었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연못가에서 만난 여인이 몸이 닿는 정도가 심해지면 아파질 수 있다고 했으니, 굳이 약 때문이 아니라 르나르와 입술이 닿았기 때문에 기절한 것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잠들어 있다는 마력이 깨어나고 싶어 날 아프게 한 것이 분명했다.
강화제인 르나르의 영향을 받아.
‘설마 벌써 깨어난 걸까?’
“몸은 좀 어떠십니까? 어제 밤새도록 열이 내리지 않아 걱정 많이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하루 새 르나르가 많이 초췌해 보였다.
그의 눈 아래 그늘이 짙었다.
그게 또 나름의 매력적으로 보였다는 게 참 아이러니했지만.
몸 상태를 느끼기 위해 잠시 눈을 감았더니 르나르가 손을 뻗어 내 이마를 짚었다.
그러자 온몸이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쁘지 않은 느낌이라 움직이지 않고 멈춰있는데, 르나르가 오히려 혼자 놀라며 손을 뗐다.
“죄송합니다. 이제 함부로 손을 대지 않으려 했는데…, 저도 모르게….”
마음대로 입을 맞췄다 내가 기절하는 바람에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아직 미열이 있으십니다. 다른 아픈 곳은 없으세요?”
르나르가 가까운 곳에서 눈으로만 나를 살피며 물었다.
‘이마에 손 좀 올려줬으면 좋겠는데. 그럼 안 아파질 것만 같은데….’
“글쎄요, 열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있는 건가….”
내가 아쉬운 대로 르나르의 손 대신 내 손을 이마에 대려 했다.
르나르 손이 내 몸에서 사라지고 나니 어쩐지 아픈 것 같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내 손이 이마에 가까워지던 바로 그 순간.
“어…, 앗…!”
갑작스러운 열감을 느끼고 앞을 본 내 시야에 시뻘겋게 이는 불꽃이 보였다.
놀란 르나르가 내 손을 얼른 이마에서 멀어지게 했다.
설마 지금….
내 손에서 불길이 일어난 걸까…?
나와 같은 광경을 목격한 르나르의 입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
*
“제가 대공녀님의 진정제 겸 강화제라는 노파의 말은 사실인 것 같네요.”
“노파가 아니라 나이든 여인이었어요.”
“…같은 뜻 아닙니까?”
“여인에게 예의를 지켜요, 르나르.”
르나르와 나는 함께 주방에서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만드는 중이었다.
둘만의 대화를 위해 저택 고용인들을 모두 별관에 대청소를 보내놓은 상태였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여인에게 들은 강화제, 진정제 이야기를 르나르에게 해주었다.
잠자리 궁합 얘기는 물론 제외하고.
불필요한 정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나는 비교적 수월하게 내가 마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애써 인정하지 않았을 뿐 이미 예전부터 느껴왔던 데다, 내 앞에 마법사인 르나르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질감이란 게 이런 것일까.
내 곁에 르나르가 있는 게 의지가 됐다.
내가 조심스럽게 두 손을 모아 작은 불덩이를 만들어냈다.
눈덩이만 한 작은 불이 손위에서 이리저리 춤을 추는 게 신기했다.
“이걸로 케이크를 구울 수도 있을까요?”
“불을 만들 수 있는 특별한 재주를 케이크 굽는 데 사용하시려는 분은 대공녀님밖에 없을 겁니다.”
“특별한 재주….”
르나르가 그렇게 봐주는 게 좋았다.
이런 걸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밖에 나가면 목이 잘릴 명분밖엔 되지 않았으니까.
새삼 지금 르나르가 내 곁에 있는 게 또 다행으로 느껴졌다.
그때, 손 위의 작은 불을 여전히 살피던 나를 르나르가 품에 안았다.
“……!”
놀란 내 눈이 커졌다.
마음대로 끌 수 없는 불이 르나르의 가슴께에 닿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르나르가 나를 안은 이유를 바로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