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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34화 (34/100)
  • 34화

    야시장

    북쪽 숲까지 간다더니 르나르는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말을 몰았다.

    흑마의 움직임을 따라 르나르의 단단한 팔 근육, 가슴 근육들이 내 몸에 와 닿았다.

    이럴 때 나는 그가 평범한 인간이 아닌 걸 실감할 수 있었다.

    그의 근육들은 나의 근육과 재질부터가 다르겠단 생각을 문득문득 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꽤 한참을 달리고 나서야 르나르와 나는 북쪽 숲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잎이 무성한 나무가 많은 북쪽 숲은 달빛이 스며들지 않아 무척 어두웠다.

    나는 조금 불만스러워졌다.

    공기는 맑았지만 제대로 보이는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까운 외출 기회를 허비했단 생각이 들었을 때쯤, 먼 곳에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렸다.

    내가 움찔 놀라자 낮게 웃은 르나르가 뒤에서 허리를 감싸왔다.

    “무서우세요?”

    그의 부드러운 숨결이 귓가를 간질였다.

    “이제 돌아가요. 바깥 공기는 충분히 마신 것 같아요. 이 숲은 위험해요.”

    “대공녀님께는 이 숲보다 이게 더 위험하실 것 같은데….”

    알 수 없는 소리를 한 르나르가 말고삐를 잡은 손으로, 내 허리를 감싼 그의 팔 위 내 손을 톡톡 건드렸다.

    늑대 소리를 듣고 놀란 내가 무의식중에 잡고 있던 것이었다.

    잡는 것만으로 의지가 되는 단단한 팔이었으니….

    “어? 안 놔주시네?”

    “…….”

    “지금 유혹하시는 거예요?”

    “오해하지 말아요.”

    “계속 안 놔주시면 오해할 것 같은데.”

    “…….”

    “그래도 안 놔주시네…. 많이 무서우세요?”

    르나르가 걱정스러운 듯 내 가까이 허리를 숙였다.

    여름 공기와 뒤섞인 그의 숨결에 열기가 느껴졌다.

    “겁먹으셨네요. 속도를 좀 높이겠습니다. 영 어두워서 저도 자꾸 나쁜 생각이 드네요, 빨리 밝은 곳으로 가야지…. 저 늑대를 만나기 전에 최종 목적지에 도착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대공녀님께선 이 늑대만 조심하시면 됩니다.”

    내가 뭐라 묻기도 전 르나르는 말을 재촉했다.

    그가 마음먹고 빠르게 모는 말은 정말 빨랐다.

    르나르의 품에 매달리다시피 안겨있다 고개라도 들게 된 건 은은한 달빛이 숲속에 스며들며 흑마의 속도가 느려진 다음이었다.

    “다 왔습니다.”

    바람에 엉겨 헝클어진 내 머리를 손끝으로 살살 빗겨주며 르나르가 내게 말했다.

    르나르가 고갯짓으로 가리킨 곳을 향해 내 시선이 움직였다.

    그곳엔 돌벽이 있었다.

    돌벽 한가운데는 커다란 버드나무 한 그루가 벽에 박힌 듯 자라고 있었는데, 나무가 늘어뜨린 가지와 이파리 사이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흑마가 익숙한 듯 몸을 움직여 버드나무 이파리 사이를 통과했다.

    흑마의 머리 위로 연녹색 이파리 타래가 주렴이 갈라지듯 갈라졌다.

    그리고 나는 넋을 놓게 됐다.

    “……와.”

    야시장이었다.

    시냇물 건너에 알록달록한 가판대가 가득한 딴 세상이 있었다.

    조용한 듯 소란했고, 가판대 사이사이로는 반딧불들이 날아다녔다.

    마치 별들이 구경 중인 시장 같았다.

    동화책 삽화 같은 그 풍경에 살짝 입을 벌리고 있으려니 뒤에서 작게 웃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마음에 들어 하실 줄 알았습니다. 예쁜 거 좋아하시잖아요.”

    르나르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런데 그가 허리를 많이 깊이 숙여 그의 입술이 내 이주(耳珠)에 닿는 바람에 나는 몸을 움츠리게 됐다.

    내가 움츠리자 내 허리를 감싸 안은 르나르 팔에 힘이 들어갔다.

    어쩐지 내게 닿은 르나르 몸이 뜨거워졌다.

    “…르나르? 혹시 아파요?”

    잠시 후 마른 침 삼키는 소리와 함께 르나르가 내게서 멀어졌다.

    “아뇨, 괜찮습니다. 말을 거칠게 몰았더니 좀 덥네요. 이곳은 마녀와 마법사들의 야시장입니다. 여기 상인들도, 손님들도, 자신이 마녀나 마법사라는 것을 애써 밝히진 않지만, 서로가 그렇다는 걸 암묵적으로 알고 있죠. 이런 방식으로라도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겁니다.”

    르나르가 내게 설명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이곳은 단순한 시장이 아니었다.

    연대의 장소였다.

    그레이시아나 제국에서 마녀 혹은 마법사라는 것을 들키면 결과는 둘 중 하나였다.

    단두대 혹은 화형.

    때문에 마력을 가진 이들은 자신이 마녀 혹은 마법사라는 사실을 숨길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면서도 궁금했을 것이었다.

    자신과 같은 존재들이 아직도 남아있는지.

    만약 있다면 그 수는 얼마나 될지.

    자신이 속한 무리의 안전을 파악하고 싶어 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었다.

    때문에 이런 시장을 만들어서라도,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었다.

    그런 배경을 알게 되니 어쩐지 마녀와 마법사들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마력을 가지고 있을 뿐, 그들 또한 나와 같은 감정을 가진 인간이란 사실이 분명하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르나르는 나를 노점들이 모인 장소에 내려준 뒤 말을 맡아 주는 상인에게 말을 맡기러 갔다.

    돌아온 그의 손엔 꼬치 하나가 들려있었다.

    막대 하나에 딸기와 포도알 여러 개가 꽂힌 과일 꼬치였다.

    “겉엔 설탕과 버터를 녹인 물을 입힌 건데 맛있습니다. 여기서만 파는 것이니 드셔보세요.”

    현실 세계의 탕후루 비슷한 간식인 모양이었다.

    내가 그것을 먹으며 눈이 커지는 모습을 르나르가 즐거워하며 바라봤다.

    “딸기가 굉장히 신선해요! 혹시 딸기만 따로 사갈 수도 있을까요?”

    고개를 끄덕인 르나르는 나를 꼬치를 산 노점으로 데려갔다.

    그러곤 상인에게 금화 몇 개를 쥐여 준 뒤, 그가 꼬치 재료로 가지고 있던 딸기들을 전부 사버렸다.

    가판대 뒤쪽 수레를 한가득 채운 딸기들을 무심코 본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저걸 다 산 거예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딸기는 저희가 가져갈 필요는 없고, 상인이 내일 아침까지 저택 앞으로 가져다 놓겠다고 했습니다.”

    “아니, 옮기는 것 때문이 아니라…, 저렇게 많이는 필요 없는데…. 고마워요.”

    “아. 별말씀을요.”

    르나르가 나를 보며 선선히 웃었다.

    여름 바람과 섞인 그의 미소에서 신선한 딸기 향이 나는 듯했다.

    알록달록한 노점들이 빼곡히 모인 장소를 돌아본 뒤 나는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연못에서 그 위를 낮게 나는 반딧불들을 구경했다.

    르나르가 잠시 혼자 들를 곳이 있다며, 나를 그곳에 두고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곳은 야시장 안 휴식처 같은 곳이었다.

    가판대 대신 돗자리를 깔고 물건을 파는 상인들이 드문드문 있었고, 나처럼 휴식을 취하는 이,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이 있었다.

    그때,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이쪽으로 와 봐요. 점 한 번 안 봐 보실 텨?”

    연못 근처에 돗자리를 깐 나이 든 여인이었다.

    “아뇨, 저는 괜찮습….”

    “아직 예쁜 손님을 못 받아서 그래. 예쁜 아가씨를 손님으로 받아야 그날 장사가 잘된다고. 설마 이 늙은이가 오늘 장사를 망쳐 쫄쫄 굶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협박 아닌 협박을 건네는 여인에 내가 은화를 꺼내 여인에게 내밀며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자 여인은 그녀의 얼굴보다 더 큰 수정 구슬을 들어 올려 그것을 통해 나를 들여다봤다.

    그러더니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설마 했는데 정말이구먼. 아가씨, 마력이 잠들어 있어.”

    “……?”

    “그냥 썩히긴 아까운 마력인데 왜 이렇게 재워둔 거지? 이미 성인인데 아직 잠들어 있는 건 억지로 재워둔 게 아니면 불가능한데….”

    알 수 없는 소리였다.

    「대공녀님께서는 혹시 마녀이십니까?」

    르나르가 과거 내게 던졌던 질문이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때의 나는 르나르 질문에 강한 부정을 했었다.

    하지만 사실 어렴풋이는 느끼고는 있었다.

    내가 마녀일지도 모르겠다는 것.

    그게 아니면, 아픈 르나르가 나와 닿으면 괜찮아지는 것을 사실 설명할 도리가 없었기에….

    “…저와 닿으면 날뛰는 마력이 잠잠해지는 사람이 있어요.”

    “있을 수 있지.”

    “그건 왜 그러는 걸까요?”

    “두 사람의 마력이 상성이 잘 맞아서 그래. 가지고 있는 마력들이 잘 어우러지는 성질이면 종종 그런 일이 생기지. 이 경우엔 잠자리 궁합이 참 예술인데 말이지.”

    여인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하던 내 눈이 순간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설마 아직 해보지 않은 거야?”

    여인이 그런 나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희귀한 경우는 아니지만 아주 흔한 경우도 아니라 내가 젊었을 때 그런 사람이 옆에 있었으면 나는 그 사람과 아주 1년 365일을 밤낮으로….”

    “그, 그만이요! 날뛰는 마력 얘기를 더 해 주세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닌데.”

    “부탁드려요…!”

    내가 금화를 쏟아놓자 여인이 ‘오’ 하는 입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이내 그녀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휘어졌다.

    “이 아가씨가 노인네 입을 열게 할 줄 아는구먼. 허허, 아무튼 그런 사람이 옆에 있다면 두 사람은 서로에게 진정제 겸 강화제인 거야. 두 사람 중 한 사람 마력이 강해져 날뛰면 상대방이 진정시켜줄 수 있고, 반대로 약해진 마력도 상대방이 끌어올려 줄 수 있지.”

    “……세상에.”

    “근데 아가씨의 경우엔 마력이 약해진 것도 아니라 아예 잠들어 있어서…. 강화제가 함께 있으면 마력이 깨어나려고 해 몸이 아팠을 텐데, 괜찮았어? 꽤 많이 아팠을 텐데?”

    그 순간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열병으로 크게 앓았던 11살, 그때는 가출했다가 르나르를 만나게 된 직후였다.

    성인이 되어 그를 만난 뒤엔 한동안 미열에 시달리거나 손바닥 혹은 손가락이 간지럽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엔 그런 일이 없었는데….’

    “예전엔 아플 때가 있었어요. 하지만 요즘엔 아픈 적이 없었어요. 그 사람이 정말 제 강화제라면, 그 사람과 닿으면 저는 항상 아파져야 하는 게 아닌가요?”

    “어떻게 항상 아프겠어. 강화제와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아가씨 마력도 조금씩 깨어나며 적응한 거지. 근데 몸이 닿는 정도가 갑자기 심해지면 또다시 그렇게 아파질 수가 있어. 저기 굴참나무 보이지?”

    “네.”

    “저 나무 뒤로 돌아가면 릴리안이란 아가씨가 마법약을 파는 좌판이 있을 거야. 그쪽에 사정 얘기를 하고 약을 하나 사가도록 해, 아프려고 할 때 도움이 될 테니. 아가씨 같은 얼굴을 옆에 둔 사내 인내심이 그렇게 길지는 않을 것 같으니 미리 대비를 해둬야지. 아이고 아가씨, 얼굴 빨개졌네?”

    여인이 나를 놀리는 게 재밌다는 듯 클클 웃었다.

    나는 몰랐던 정보를 알려줘 고맙단 의미로 여인에게 금화 몇 닢을 더 쥐여 준 후, 여인이 말한 굴참나무 쪽으로 향했다.

    르나르와 지금까지 해온 것 이상의 신체 접촉을 할 생각이 있던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왕 여기까지 온 김에 약은 사 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무 쪽으로 다가갈수록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보니 바닥에 누운 남자를 둘러싼 사람들이 웅성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바닥에 누운 남자는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르나르!”

    놀란 내가 사람들 무리를 헤치고 르나르의 옆에 무릎 꿇었다.

    르나르 눈이 곧 감길 듯 가물가물했다.

    그는 내가 처음 보는 여자 허벅지를 베고 누워있었다.

    그리고 왜인지, 여자는 그런 르나르에게 입을 맞추려 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감게 됐다.

    르나르의 입술과 여자의 입술이 닿는 것을 보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누군가 내 손목을 강하게 쥐는 것이 느껴졌다.

    깜짝 놀라 눈을 뜨니 어느새 몸을 일으키고 나를 불만스럽게 보고 있는 르나르가 보였다.

    “르나….”

    말을 마치기도 전, 그가 나를 당겼다.

    뜨겁게 달아오른 그의 양손이 내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내 입술 위로 그의 입술 감촉이 느껴졌다.

    다음 순간,

    온몸을 휘감아오는 열기에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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