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남사스러운 스포츠
“손을 내미는 건 춤을 신청한다는 의미에요. 잠깐, 허리는 살짝 숙이시고요.”
“이쪽 손으로 제 이 손을 잡고…, 그쪽 손은 제 허리 위에 두세요.”
르나르의 울대뼈가 꿀렁 움직였다.
저도 모르게 긴장해 마른 침을 삼켰기 때문이었다.
역시 그는 그녀의 명령에 약했다.
스스로의 의지로 그녀에게 손댈 때는 거리낌이 없으면서.
“오른손은 허리 위에 두시라니까 왜 자꾸 손을 떼는 거죠?”
엘로즈 타박에 르나르가 어색하게 웃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긴 손가락이 다시금 엘로즈의 한 줌 허리를 감쌌다.
순간 르나르는 눈앞이 번쩍한 것 같았다.
‘…이러다 이성을 잃으면 어쩌지?’
르나르가 고민하는데, 엘로즈는 그런 그의 상태는 전혀 알지 못한 채 무서운 선생님의 눈으로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르나르의 몸짓을 신중히 탐색하고 있었다.
‘…몸치였나.’
“다음 동작은 제 겨드랑이 아래에 손을 넣은 다음에 절 들어 올리면 되는 동작이에요. 들 수 있겠어요? 절 든 다음에 그대가 돌면 되는데……. 르나르? 제 말 듣고 있어요?”
“…….”
사실 르나르는 이래라저래라 명령하고 군림하는 여자를 싫어했다.
그를 납치한 마담이 그런 여자였기 때문에.
하지만 엘로즈와 마담은 근본부터 다르다고 르나르가 생각하기 때문일까?
르나르는 그런 엘로즈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살면서 제 취향을 처음 의심하게 될 정도로.
마담은 어린 르나르를 힘으로 굴복시키려 했고 르나르는 그런 마담에게 끝내 굴복하지 않았고 그의 무엇 하나 결국 내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존중하는 엘로즈에게 르나르는 절로 무릎 꿇고 싶어졌다.
엘로즈의 명령 아닌 명령에 절로 정신이 혼탁해지는 중인 르나르였다.
‘이런 기분이 들었을 때가 또 있었던 것 같은데….’
르나르가 멍하니 과거를 되짚었다.
‘아. 로즈가 먼저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을 때.’
단순히 명령과 군림, 취향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그녀가 다가오는 것 자체에 약했다.
그녀에게 그가 다가가는 것은 당연하게 느꼈지만, 반대는 이상하다고 스스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런데 엘로즈가 마음먹고 그를 유혹하기라도 한다면?
르나르는 간부터 내줄지 쓸개부터 내줄지 고민할 것 같았다.
‘이런 내가 대체 누굴 유혹하려 한 건지….’
르나르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러다 문득 유혹하는 엘로즈를 상상하자 순간 숨을 쉬기가 어려워졌다.
“르나르?”
“……네?”
“괜찮아요? 얼굴이 창백해요.”
“숨….”
“네?”
“숨쉬기가 어렵습니다….”
진지한 눈빛에 놀란 엘로즈가 얼른 르나르에게 다가섰다.
그녀의 신체가 그의 신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르나르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가까이 있었다 보니 작은 움직임도 꽤 큰 자극으로 다가왔다.
르나르는 이미 그의 몸이 악몽 외적인 이유로 그녀를 욕망한단 걸 인정한 상태였다.
그에게도 욕정이란 게 있는 줄 르나르는 예전엔 미처 몰랐었다.
“대공녀님께선 춤을 누구에게 배우셨습니까?”
엘로즈와 떨어지려 일부러 그녀를 한 바퀴 돌리며 르나르가 물었다.
르나르와 맞잡은 손을 축 삼아 빙그르르 돈 엘로즈는 한 마리 나비 같았다.
“이엘르 백작 부인이요. 귀족들 사이에서 알아주는 가정교사세요. 근데 왜 그렇게 찡그리고 있어요? 그대가 보기에 제 춤 실력이 못마땅한가요? 이엘르 백작 부인은 훌륭한 가정교사셨고, 저도 나름 열심히 배웠는데….”
주름졌던 르나르 미간이 펴지는 동시에 그의 입꼬리가 슬쩍 휘어졌다.
‘내가 엘로즈를 좋아하는 건 아니야.’
르나르가 스스로 되뇌었다.
그럼에도 이런 남사스러운 스포츠를 엘로즈에게 가르친 게 남자였다면?
죽일 수야 없었겠지만 어디 한 군데는 실수인 척 부러뜨려놨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감히 여왕의 몸에 손을 대다니.
하지만 여자라니 그나마 만족스러웠다.
동전 뒤집듯 뒤집히는 제 기분을 순간순간 파악하며 르나르는 달콤한 무력감에 압도당했다.
“제가 좋아한다고 말씀드렸었나요?”
“뭘요?”
“대공녀님을요.”
“…….”
최근 인사처럼 자주 듣게 된 고백이었다.
르나르는 마법사의 맹세 이후 이렇게 틈만 나면 고백을 해댔다.
그의 마음을 엘로즈가 다신 잊지 않게 하겠다며.
“지금은 갑자기 또 왜….”
“좋아하니까요. 제가 대공녀님을.”
“뭐……, 근 한 달 동안 한 주에 네 번씩은 말한 것 같긴 해요.”
“……그랬군요.”
모호한 표정의 르나르 고개를 비뚜름 기울였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백을 이렇게 무덤덤하게 받는 여자가 이 세상에 이 여왕 말고 또 있을까?
진심이 아닌 고백임을 알고 있을 리도 없을 텐데.
“…….”
뭐, 상관없었다.
그녀는 그에게 결국 이용당할 것이었고, 지금 그의 품에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으니.
“르나르, 지금은 놔줘야 하는데…, 다음 동작이 이게 아닌데…!”
팔을 뻗어 멀리 보내줘야 할 시점에 르나르가 오히려 그녀를 당겨 안자 엘로즈가 당황했다.
르나르가 못 들은 척 가까워진 엘로즈의 머리칼에 입술을 묻었다.
“제가 좋아합니다. 대공녀님을요. 기억하시라고요.”
그녀의 명령이 아닌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움직이는 르나르의 모든 행동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다시는… 잊으시면 안 됩니다.”
본인도 진심인 줄 모르는 르나르의 절절한 고백이 맑은 어둠과 뒤섞이기 시작한 노을빛 속으로 산산이 부서져 스며들었다.
*
르나르는 처음엔 내 허리에 손도 잘 못 올릴 정도로 춤을 어색해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배움에 속도를 붙였다.
머리가 좋은 건지 몸이 날렵한 건진 몰라도 배우는 속도가 남다르다는 것 하나만은 분명했다.
두 달은 배워야 하는 춤곡들을 2주 만에 마스터했으니.
웬만한 무도회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겠단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그를 가르친 것이 꽤 뿌듯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르나르는 내게 밤 산책을 제안했다.
“저도 이제 춤을 좀 출 수 있게 되었으니 은혜를 갚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밤 어떠세요?”
저택 밖으로 내보내 주겠다는 말이었다.
‘오늘 밤….’
좋을 것 같았다.
보름달이 뜨는 날이었기에 밤길도 꽤 밝을 것이었으니.
창밖 풍경을 바라보던 내가 르나르 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밤에 뵙겠습니다.”
르나르가 그런 날 마주 보며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어느 순간부터 고개를 돌릴 때마다 볼 수 있는 르나르의 적갈색 눈동자였다.
*
추웠다.
마치 한겨울에 비라도 맞은 것처럼 체온이 공중으로 흩날려 흩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살짝 스쳐 지나가는 공기조차 살을 에는 칼바람인 것만 같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내가 발을 딛고 있는 곳은 양쪽으로 높은 습곡이 둘러싸고 있는 골짜기였다.
평소에도 눈이 많이 내렸던 건지, 습곡 바위 이곳저곳에는 틈마다 눈이 쌓여 얼어 있었다.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닥에는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는데, 점성이 전혀 없는 눈인 건지 눈은 밟을 때마다 가루처럼 흩어지고 버석거렸다.
습곡을 따라 조금 걷다 보니 여러 갈래로 나뉘는 길이 나왔다.
나는 그중 가장 오른쪽 길을 택해 계속 걸었다.
걷다 보니 오두막 한 채가 보였다.
‘저 집은 뭐지?’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저 집에 들어가 봐야지.’
생각한 내가 걸음을 떼는 순간, 눈을 한 번 깜빡였을 뿐인데 내 시야를 가득 채운 건 골짜기의 오두막집이 아닌 침대 천장.
황자의 저택, 내 방 침대 천장.
‘뭐지…, 꿈…?’
르나르와의 밤 산책 전, 사용인들을 속이기 위해 자는 척을 하다 정말 깜빡 잠이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꿈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생생했다.
마치 르나르와 입 맞추는 꿈을 꾸었을 때처럼.
나도 모르게 입술을 만지게 됐다.
르나르의 입술이 닿았던 느낌이 여전히 선명했다.
입속을 휘젓던 혀의 느낌도….
“…일어나야겠다.”
잠들어 버리는 바람에 약속 시각 전까지 준비를 마치려면 서둘러야 했다.
*
“대공녀님,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더글라스가 방에서 조용히 나온 나를 르나르에게로 이끌었다.
르나르가 나를 기다리고 있던 곳은 큰 나무가 맞닿아있는 담장 앞이었다.
‘내가 넘어 도망치려 했던 곳.’
나무 기둥에는 이미 긴 사다리가 세워져 있었다.
르나르는 내가 밖으로 나가기 위해 쓰려 했던 방법을 그대로 이용할 모양이었다.
“꽤 괜찮은 방법이었던 것 같아서요.”
그에게 다가서는 나를 내려다본 르나르가 싱긋 웃었다.
이내 르나르는 나무 기둥을 몇 번 짚더니 먼저 나무 위로 올라갔다.
사다리는 쓰지도 않고.
‘소드 마스터란 참 편하구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사다리 위로 발을 디뎠다.
하지만 사다리를 몇 계단 오르지도 않았을 때 르나르는 나를 번쩍 들더니 그가 앉아있던 가지 위에 앉혔다.
나는 조금 무기력한 기분이 들었다.
“이럴 거면 아예 절 들고 나무를 오르지 그랬어요….”
“맞네요, 그렇게 좋은 방법이?”
그저 날 놀려주고 싶은 게 분명했을 르나르는 능글맞게 웃더니 담장 밖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당황한 내 입이 벌어졌다.
맨몸으로 뛰어내리기엔 높은 높이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상관없는 걸까?
그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완벽하게 멀쩡한 르나르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뛰세요. 받겠습니다.”
“…그럴 거면 절 안고 뛰지 그러셨어요….”
“대공녀님께서 절 신뢰하신다는 걸 보고 싶어서요.”
르나르가 웃었다.
달빛도 반할 만큼 예쁜 웃음이었지만, 나는 순간 르나르의 얼굴에서 터넛 황제의 얼굴을 겹쳐봤다.
계략적인 사람의 얼굴.
“더글라스, 밧줄 없어요?”
내가 담장 안쪽 더글라스에게 물었다.
더글라스는 곤란한 듯 어색한 웃음만 지어 보였다.
“대공녀님, 빨리요. 저 팔 아파요.”
“이거 지금 굉장한 악취미에요. 날 무섭게 만들고 있잖아요.”
“한 번만 믿어보세요. 절 믿어도 된다는 걸 보여드릴게요.”
“…….”
단순한 장난이었다면 뛰어내리지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알 것도 같았다.
내가 그를 믿지 않는다는 걸 그가 알기에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약간의 죄책감이 든 내가 뛰어내렸다.
르나르가 그런 나를 공주님 안기로 받았다.
그리고는 기분이 좋은지 그 자리에서 한 바퀴 빙글 돌았다.
“이대로 목적지까지 걸어갈까요?”
“목적지가 어딘데요?”
“수도 북쪽 숲이요.”
“수도 북쪽 숲이요? 여기서 거기까지…, 밤새 걸어가려고요?”
“괜찮을 것 같은데요. 생각해봤는데…, 이대로 대공녀님과 함께 도망치는 것도 저는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사랑의 도피 어떠세요?”
“친구끼리 무슨 사랑의 도피에요.”
“친구…요…? 아, 또 머릿속에 그것만 남으셨구나?”
“그리고 도피하면 어디 가서 뭐 먹고 살려고요? 저는 이제 사치 부리는 생활이 익숙해져서 안 돼요.”
“대공녀님께서 무슨 사치를 부리신다고 그러십니까? 같이 지내보니 영 사치를 부리지 않으셔서 오히려 놀랐는데…. 그리고 대공녀님께서 사치 부리신다 해도 괜찮습니다, 저.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이 사실인 걸 알기에 나를 내려다보며 싱긋 웃는 르나르에 나는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지금 계속 저 안 내려주고 있는 거 알죠.”
“아, 들켰네요?”
르나르가 장난스레 웃으며 그냥 걸어가려다 내가 몸을 뒤틀자 나를 바닥에 내려줬다.
그런데 담장 밖에 준비된 말이 한 필밖에 없었다.
자주 보아 익숙해진 르나르의 흑마.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돌아보니 르나르가 흑마를 빤히 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말 두 필로 움직이면 사람들 시선을 두 배로 끌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대공녀님과 제가 입은 로브 색이 같으니, 한 필로 움직이면 어둠에 묻혀 몸집이 큰 남자 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고요. 그편이 훨씬 나을 겁니다. 한밤중 말을 타고 돌아다니는 남자는 이상하게 보지 않지만, 여자는 다시 한번 살펴보는 것이 이곳 제국 사람들이니까요.”
듣고 보니 이해가 가는 말이었다.
그런데 내게 설명하는 르나르가 지나치게 진지해 오히려 의심이 갔다.
“근데 변명으로 들리는 건 왜일까요?”
“또 들켰네요?”
르나르의 진지한 표정이 순식간에 지워지며 남은 것은 코를 찡긋하며 웃는 매력적이고 잘생겼으며 능글맞은 남자였다.
그런 르나르는 순식간에 나를 들어 흑마 위에 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