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여왕님
서재의 창문 앞 벤치 끝에 앉아 책을 읽던 중이었다.
“여왕님, 제가 같이 있어 드릴까요?”
다정한 물음에 고개를 드니 정오의 햇살에 물들어 날 내려다보는 르나르가 보였다.
그는 싱긋 웃더니 내가 대답도 하기 전 맞은편 벤치 끝에 냉큼 앉았다.
“왜 자꾸 여왕이라고 부르는 거죠?”
마법사의 맹세를 한 그날 이후 르나르는 종종 나를 여왕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애칭이에요.”
“애칭이 왜 하필 여왕이에요. 친근하게 부르고 싶은 거면 차라리 ‘로즈’라고 불러요, 제 가족들처럼.”
“그렇게는 이미 가끔 부르고 있었는데. 모르셨습니까?”
“…모르진 않았지만…….”
“그냥 이렇게 부르고 싶어졌습니다. 그리고 제 목숨 줄도 쥐고 계시는데 제게 여왕이 아니시겠어요?”
르나르가 뻔뻔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정오의 햇살이 그런 르나르가 재밌는 듯 그에게 반짝임을 더해줬다.
“그건 그렇고 여왕님, 대답해주세요. 저 옆에 있어요, 말아요?”
“이미 앉은 거 아니었어요?”
“아직 대답 안 하셨잖아요.”
“말아요.”
“있겠습니다. 기사는 지켜야 하는 여왕 곁을 떠나는 게 아니니까요.”
“그럴 거면 왜 물어봤어요?”
“그냥요, 말 걸고 싶어서. 책에만 너무 집중하시길래.”
턱 끝으로 내가 읽던 책을 가리킨 르나르가 능글맞게 웃었다.
여왕이라 종종 부르는 것 말고도 르나르는 마법사의 맹세 이후 달라진 점이 또 하나 있었다.
도통 내 곁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저택에 발이 묶인 내가 심심할 것이 염려된다나 뭐라나.
최근 한 달간, 나의 하루는 르나르로 시작되어 르나르로 끝나는 중이었다.
일단 아침은 르나르의 꽃 배달로 시작됐다.
“대공녀님, 오늘의 꽃입니다. 꽃집 아가씨가 이렇게 말했던 것 같은데. 맞죠?”
마법사의 맹세 다음 날, 르나르는 그렇게 물으며 내 방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의 다음 날도.
노크 소리에 문을 열어 주면 매일 다른 꽃들을 든 르나르가 문 앞에 서 있곤 했다.
아침을 신선한 꽃향기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은 꽤 기분 좋은 일이었다.
꽃을 가져다준 고마움을 전하고 나면 르나르와 나는 자연스럽게 아침 식사를 함께했다.
르나르는 식사 후 나의 아침 산책에도 동행했다.
저녁은 원래 같이 먹었는데 아침까지 같이 먹게 되었으니 점심만 따로 먹는 것도 이상해, 결국 우리는 세 끼를 모두 함께 먹게 되었다.
게다가 밤엔 악몽 때문에 그의 방에 들르고 있었으니 사실상 르나르와 함께 하는 시간이 함께 하지 않는 시간보다 많을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르나르는 틈만 나면 저택 어딘가의 날 찾아내 ‘제가 같이 있어 드릴까요?’ 라고 묻곤 했다.
마치 지금처럼.
‘가라고 해도 가지도 않을 거면서….’
“말이 걸고 싶은 걸 보면 르나르가 심심한 거 아니에요? 내가 심심할 게 걱정되는 게 아니라?”
“사실 제가 심심합니다. 그러니 놀아주시겠어요?”
“심심하면 더글라스나 좀 도와줘요. 이유는 몰라도 요즘 많이 바빠 보이던데. 최근에 저택에서 더글라스 얼굴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오늘… 날이 좀 덥네요. 오렌지 셔벗 드시겠어요?”
르나르가 괜히 셔츠 앞섶을 펄럭대며 말을 돌렸다.
그가 이렇게 한량처럼 지낼 수 있는 건 더글라스 덕분일 터였다.
‘아마 더글라스에게 모든 일을 맡겨놓은 것이겠지.’
더글라스가 불쌍했지만, 그래도 르나르가 이렇게 내 곁을 맴도는 게 나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사실 르나르가 없었으면 나도 무척 심심했을 터였다.
따로 사업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독서나 차 마시기밖에 할 일이 없는 것이 이곳 귀족들의 생활이었다.
물론 사교활동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코웰 저택에서부터 나는 파티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대공과 오빠들이 날 사교계에 내보내는 걸 내켜 하지 않기도 했고.
성인이 되었는데도 아직 데뷔탕트를 치르지 않은 지경이었으니.
“대공녀님? 정말 셔벗 안 드시겠어요?”
확실하게 말을 돌리고 싶은 건지 르나르가 날 재촉했다.
“저는 괜찮아요. 마시던 차만 마저 마시고 이따 점심 먹으려고요.”
내가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찻잔 속 차를 저었다.
그런데 르나르의 고개가 별안간 기울기 시작했다.
그는 차를 젓는 내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깜빡이는 그의 눈동자 안으로 황금빛 햇살이 고여 들었다.
고요하지만 멍한 르나르는 조금 귀엽기도 했지만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기도 했다.
“뭐예요?”
“뭐가요?”
“그 얼굴이요. 가끔 나 그런 얼굴로 보잖아요.”
“지금 제 얼굴이 어떤데요?”
“음…, 바보 같은 얼굴…? 저 그 얼굴 알아요. 제가 뭐 먹을 때 저 그렇게 보잖아요.”
“바보 같은 얼굴…, 아. 알고 계셨습니까?”
르나르가 멋쩍은 듯 웃었다.
르나르가 창문 밖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날렵한 그의 콧날을 타고 정오의 햇살이 미끄러져 내렸다.
그의 입술 새로 노랫가락 같은 말소리가 흘렀다.
“저는 대공녀님께서 코웰 대공작 가문 막내딸인 걸 특히 느낄 때가 있습니다. 예컨대 대공녀님께서 젓는 차는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을 볼 때나, 우아하게 걷는 대공녀님의 모습을 볼 때요. 그럴 때 뭐랄까 저는 좀…, 떨립니다.”
“…….”
뜨거웠다.
창문을 관통한 햇살이.
여름 햇살이라 그런 모양이었다.
‘왜 아까는 몰랐지…?’
오늘 볕이 이렇게 뜨겁다는 걸.
그런데 르나르가 나를 보며 떨려야 할 이유까지 있어야 할까 싶었다.
귀족 예법이라면 그 또한 훌륭했기 때문이었다.
“칭찬 고마워요. 하지만 그대의 예법 또한 훌륭합니다.”
“저는 황자님을 곁에서 지켜보며 눈으로 익힌 것들을 따라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제 예법은 흉내 내기에 불과하죠. 제대로 배우고 평생을 익히신 대공녀님과는 다릅니다.”
“그렇게 따지면 저도 가정교사를 따라 하며 배웠을 뿐인걸요.”
귀족들을 혐오하면서도 귀족적인 것을 배우고 싶어 했던 원작의 르나르가 지금 내 앞의 르나르 위에 겹쳐 보이는 듯했다.
“아. 제가 아예 알지 못하는 영역도 있는데.”
“아예 알지 못하는 영역이요?”
“따라 하고 싶어도 따라 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럼 제가 그것도 따라 할 수 있게 대공녀님께서 절 가르쳐주시면 어떠시겠습니까?”
내내 창밖을 보던 르나르가 고개를 돌렸다.
여름 햇살의 사랑을 받은 그의 적갈색 눈동자가 보석처럼 반짝 빛났다.
*
황자의 저택 내부에 있는 무도회장은 예스러우면서도 화려했다.
천장화 속에서는 아기 천사들이 웃고 있었고, 그 아래로는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반짝였다.
새하얀 무도회장 벽은 고운 노을빛이 주황색으로 물들인 상태였다.
마치 백색 도화지 위에 그려진 주홍빛 수채화 같았다.
그 그림을 배경으로 르나르가 걸어와 내 앞에 섰다.
내가 그에게 춤을 가르쳐주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제게 춤을 가르쳐주세요.”
오늘 서재에서 르나르가 내게 말했다.
“춤은 갑자기 왜….”
“그게 제가 아예 알지 못하는 영역입니다. 황자님 사교댄스 수업 시간엔 제가 들어가지 않았거든요. 게다가 황자님께서 얼굴을 숨기셔야 해 무도회나 사교 파티에 가실 수 없으셨으니… 저도 따라가 보고 배울 기회조차 없었죠. 하지만 항상 배우고 싶었습니다. 제국의 귀족 남자들은 모두 사교댄스를 배운다면서요? 대공녀님 같으신 분과 춤출 수 있는 영광을 얻기 위해.”
르나르의 마음은 이해가 됐다.
원작에서도 올렌도가 배우는 것이라면 모두 배우고 싶어 했던 르나르였으니까.
하지만 나는 르나르에게 춤을 가르쳐주는 것을 망설이게 됐다.
마법사의 맹세 이후, 어쩐지 그와 몸이 닿는 것을 꺼리게 됐기 때문에.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물론 죽어도 닿기 싫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전처럼 길고양이가 비비는 것으로 느껴지지 않아, 가능하면 최대한 그와 닿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갑자기 없던 스킨십 혐오증이라도 생긴 것인지.
참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제가 남자 쪽 춤을 출 줄 아는 건 아니라서요….”
거짓말이었다.
사실 나는 남자 춤도 출 줄 알았다.
가족들이 유난스러워 나는 여성 가정교사에게 무도회 춤을 배워야 했는데, 그 탓에 교사와 역할을 바꾸며 배움을 진행하다 남자 춤까지 출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모르신다면 어쩔 수 없죠.”
르나르는 의외로 순순히 물러났다.
남자 춤까지 추는 여자는 상상하기 어려우니 쉽게 납득해버린 모양이었다.
그런데 르나르 그 순수한 믿음이 나로 하여금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했다.
그에겐 거짓말하지 말라고 해놓고 나는 이렇게 쉽게 거짓말한 것에 대한 가책.
“혹시…, 어느 정도로 전문적으로 배우고 싶은 거죠? 대략적인 움직임 정도라면….”
“!”
“가르쳐드릴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결국 불편한 마음을 이기지 못한 내가 우물쭈물 말을 건넸다.
긴 속눈썹이 촘촘하게 박힌 르나르의 루비 같은 눈이 눈에 띄게 커졌다.
“전문적이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저는 그저 무도회에서 춤출 수 있을 정도로만 알아두고 싶을 뿐입니다.”
작은 소망이라는 듯 말했지만 르나르의 적갈색 눈동자는 이제 산타를 마주친 아이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와 신체가 닿는 것에 대한 심리적 부담을 르나르에게 무언가를 얻어내며 덜어보기로 했다.
나도 그에게 얻는 것이 있으니 그와 닿는 건 꽤 괜찮은 일이라고 스스로 정당화하기 위해.
“밖으로 나갈 수 있게 해주세요.”
“밖으로요? 이 저택 밖으로요?”
“몰래, 잠깐이라도 괜찮아요.”
굳이 코웰 저택에 가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저 한 달이란 시간 동안 같은 장소에 갇혀만 있다 보니 외출이 간절해졌던 것이었다.
꽤 정적인 성격을 가진 나조차 참기 어려워졌을 정도로 한군데만 머물며 지내는 건 답답한 일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르나르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을 것 같습니다. 지난 한 달간 황자님 관심도 상당히 수그러드신 것 같으니…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저랑 함께 나가셔야 합니다.”
내가 좋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좋았다.
소드 마스터인 르나르와 함께 가면 어딜 가도 안전할 테니.
그래서 르나르는 그렇게 내게 춤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노을빛이 공기까지 붉게 물들인 이 무도회장 안에서, 르나르와 내가 한 뼘 거리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