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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31화 (31/100)
  • 31화

    미치죠

    ‘파…혼….’

    내가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르나르를 봤다.

    르나르가 그런 나를 마주 봤다.

    “대공녀님께선 황궁에서 절 만났을 때부터 파혼을 언급하셨죠. 하지만 사실 그땐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대공녀님께서 진심으로 파혼을 원하고 계신다는 것을 말이죠. 처음 만나는 황자의 호감을 얻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하시는 것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그런데 지금 대공녀님 표정을 보니 알겠습니다. 대공녀님께선 이 약혼을 정말 원치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제가 돕겠습니다. 파혼이 성사되면, 대공녀님께선 자유의 몸이 되십니다. 그럼 발목을 잃을 걱정 없이 집에 가실 수도 있게 됩니다. 절 한 번만 믿어주세요. 제가 대공녀님을 꼭 파혼시켜 드리겠습니다.”

    ‘파혼.’

    그것은 참 달콤한 제안이었다.

    안 그래도 올렌도와의 파혼은 언젠간 꼭 이루어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도와주는 사람이 생긴다면?

    일은 한결 수월해질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어떻게 절 파혼시켜주겠단 거죠? 이건 황제 폐하께서 원하시는 약혼입니다. 나 또한 이것을 거부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대가 무슨 수로….”

    “황자 전하께서는 대공녀님 말씀을 시험해보고 싶어 하셨습니다. 황후 자리에 욕심이 없다는 대공녀님 말씀 말입니다. 그래서 제게 명령하셨습니다. 대공녀님께서 절 좋아하게 만들라고요.”

    “……하.”

    “그러니 파혼을 위해서는 추후 때가 되었을 때, 대공녀님께선 저를 좋아하는 척 연기해 주시면 됩니다. 그럼 제가 파혼할 수밖에 없을 상황을 만들겠습니다. 저도 대공녀님을 좋아한다고 말하겠습니다. 이게 황제 폐하의 마음을 움직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폐하께선 제… 아닙니다. 이건 차차 말씀드리는 게 낫겠네요.”

    그 또한 황제의 핏줄인 걸 이용할 모양이었다.

    하기야, 터넛 황제의 목적은 날 며느리로 들이는 것이었다.

    그의 아들과 결혼만 한다면 그 아들이 누가 될지는 상관없어할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르나르가 황제의 아들인 것도 아는 내가 몰랐던 사실이 하나 있었다.

    ‘나를 꼬시라고 올렌도가 르나르에게 명령을 내렸었다니….’

    아무리 망나니 황자라지만 자기 예비 약혼녀까지 꼬셔내라고 명령을 했을 줄은.

    나는 안 그래도 미웠던 내 예비 약혼자가 더 얄미워졌다.

    그럼에도 그런 미운 행동을 빌미로 약혼을 파할 수 있다면 나로서도 나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우려되는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르나르의 배신이었다.

    이 제안이 나에겐 득 될 것이 많았는데 르나르에겐 득 될 것이 없다 보니, 나는 더욱 르나르를 믿을 수가 없게 됐다.

    “거절하겠습니다.”

    내 거절은 예상치 못한 건지 르나르 얼굴에 일순 당황의 기색이 스쳤다.

    나는 그런 르나르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제 표정에서 티가 났다니 숨기진 않겠습니다. 네. 저는 황자 전하와의 파혼을 원합니다. 그러니 전하와의 파혼은 제게 분명 득이 되는 일이겠죠. 그런데 경의 지금 제안은… 아무리 생각해도 경에겐 이득 될 게 없습니다. 근데 제 파혼을 돕겠다고요? 혹시 가짜 약속으로 저를 눌러 앉힐 생각인 건 아니고요?”

    사실 나와 이런 약속을 한 르나르가 추후 모른척해도 나는 억울해하는 것 말고는 별 방법이 없을 것이었다.

    만약 그 순간이 온다면 나는 후회하게 될 것이었다.

    그때 르나르 말을 듣지 말고 도망쳤어야 했는데 하고.

    아마 앞으로는 오늘처럼 쉽게 나갈 시도를 하긴 어려울 것이니.

    몰래 나가려 한 나에 대한 경계가 강화될 것이 불 보듯 뻔했기에.

    그때, 르나르가 내 치맛자락을 잡은 손의 손등에 턱을 괴었다.

    그러더니 입꼬리를 휘어 웃으며 날 올려다봤다.

    그의 눈빛이 꼭 내 머릿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이내 입을 연 그가 믿지 못할 말을 했다.

    “그렇게 제가 못 미더우시다면 마법사의 맹세를 해드리겠습니다.”

    ‘마법사의… 맹세…?’

    마법사의 맹세.

    그것은 마법사들로 하여금 약속을 지키게 만드는 일종의 계약이었다.

    원작을 읽은 나는 마법사의 맹세가 무엇인지 알았다.

    맹세를 한 마법사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이상 자신이 맹세할 때 걸었던 그 무엇을 잃게 되어있었다.

    때문에 마법사의 진심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마법사의 맹세만 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마법사들은 쉬이 마법사의 맹세를 하려 하지 않았다.

    약속이란 것은 때론 지키지 못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었는데, 마법사의 맹세를 하게 되면 마법사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이상 맹세에 건 그 무엇을 잃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약속을 지킬 생각이 아니라면 단연 할 수 없을 일이었다.

    “표정을 보니 마법사의 맹세가 뭔지 이미 잘 아시는 것 같으니….”

    “왜요, 그대의 발목이라도 거실 생각입니까?”

    “목숨을 걸어드리겠습니다.”

    “…장난치지 마세요.”

    “장난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대공녀님 파혼에 걸겠습니다. 제 목숨.”

    허공에 오렌지 빛깔의 작은 빛이 나타났다.

    빛은 폭죽처럼 자신의 일부를 주변으로 탁탁 튀기더니, 이내 빠른 속도로 르나르의 목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르나르의 목에 빛의 선이 초크처럼 생겼다.

    ‘르나르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저 빛이 르나르를 죽이는 걸까….’

    “마법사의 맹세입니다.”

    그 말에 르나르 목 주변을 감쌌던 빛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의식이 끝난 것이었다.

    원작에서 읽었던 마법사의 맹세가 확실했다.

    ‘마법사의 맹세를 거짓으로 할 수가 있던가…….’

    그럴 리가 없어 아무리 머리를 쥐어 짜보아도, 르나르가 목숨까지 걸면서 내 파혼을 도와야 할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기껏 이득이라고 해봐야 내 호감을 좀 더 얻을 수 있겠다는 정도?

    이런 내 혼란을 이해한 건지 르나르가 손등에 다시 얼굴을 괴고 설핏 웃었다.

    내 혼란이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뭐가 그렇게 이해가 되지 않으십니까?”

    “정말 없잖아요, 제가 황자 전하와 파혼하게 되었을 때 그대가 얻게 될 이득이.”

    “왜 제가 이득이 없을 거라 말씀하십니까? 이미 말씀드렸잖아요. 제가 대공녀님을 좋아했다고요. 대공녀님께선 제 첫사랑이시고, 지금도 전 대공녀님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친구로 지내기로 했다고 해도 이 마음까지 없애지는 못하겠습니다.”

    “…….”

    “설마 제 고백… 잊고 계셨던 건 아닌 거죠?”

    르나르 미간이 조금 접혔다.

    사실 거의 잊고 있었다.

    그와 내가 친구가 되었단 사실만 머릿속에 강하게 남았던 건지….

    르나르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곤 내 표정을 관찰했다.

    그러다 이내 정말 서운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설마 진짜 잊고 계셨던 겁니까? 이 정도까지 절 신경 쓰지 않으셨을 줄은…. 그동안 제 품에 그렇게 많이 안기셨으면서 말이죠.”

    “그건 르나르가 절 안았으….”

    “다 잊어도 이거 하나만 기억해주세요. 제가 대공녀님을 좋아하기 때문에 대공녀님의 파혼은 분명 제게 이득이란 것을요. 좋아하는 여자의 다른 남자와의 약혼을 막을 수 있다는데 마다할 사내가 어딨겠습니까? 이 세상에 저보다 대공녀님 파혼을 원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날 보는 르나르의 표정이 진지했다.

    그의 적갈색 눈동자에 달빛이 섞인 진심이 담겨있는 것만 같았다.

    ‘르나르는 정말 연기를 잘 하는구나.’

    내가 생각했다.

    르나르가 내게 스킨십 하는 것은 악몽 때문이었다.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은 날 이용하기 위한 연기일 뿐이었고.

    그럼에도 밤바람에 실려 온 그의 속삭임이 사랑에 빠진 음유시인의 진지한 사랑 고백처럼 느껴졌다.

    감상하듯 고개를 기울이던 내 머리가 물리적으로 정지했다.

    머릿속에 문득 스쳐 지나간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근데 의도야 어찌 됐든… 목숨을 걸었잖아…?’

    나는 르나르를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와 올렌도를 파혼시키지 못하면 그는 죽은 목숨인 건 분명했다.

    대신 난 밑질 것 없는 장사였다.

    잔인한 저울질을 마친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르나르는 이제야 좀 만족스럽다는 듯 웃어 보였다.

    살짝 휜 그의 입꼬리에 부드러운 달빛이 서렸다.

    “대공녀님 신뢰는 목숨 정돈 걸어야 얻을 수 있는 거였군요. 그래도 대공녀님 신뢰를 조금은 얻은 것 같으니 그건 좀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럼 이제 그 위에서 내려오지 않으시겠습니까? 가문에 보내셔야 하는 편지는, 제가 해가 뜨자마자 도착하도록 조치하겠습니다.”

    르나르가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가 싱긋 웃었다.

    “믿고 뛰세요. 잡아드리겠습니다.”

    르나르는 내 허리 쪽을 향해 손을 올리고 있었다.

    내가 뛰면 공중에서 낚아챌 모양이었다.

    이에 내가 르나르에게서 시선을 옮겨 나무뿌리 위로 넘어져 있던 사다리를 봤다.

    내가 스스로 내려갈 수 있도록 르나르가 그 사다리를 세워주길 바라서였다.

    하지만 눈치를 챈 르나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됩니다. 제게 안기세요.”

    한시도 제 악몽을 잊지 않는 여우 같은 남자였다.

    “팔 아파요, 빨리.”

    재촉하는 르나르에 나는 가벼운 한숨을 한번 내쉰 뒤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르나르가 그런 내 허리를 가뿐하게 낚아챘다.

    나를 공중에서 잡은 그가 선 자리에서 한 바퀴 빙 돌았다.

    그러더니 날 안고 풀 위에 드러누워 버렸다.

    “르나르?!”

    “아이고, 무거워라. 힘이 빠져 버렸네.”

    르나르가 뭐가 재밌는지 키득키득 웃었다.

    그러곤 내가 일어나려 하자 내 뒤통수를 잡아 그의 품으로 눌렀다.

    “잠시만 제 위에 계세요. 무거운 대공녀님을 받아드린 값을 받아야겠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죠?”

    “…….”

    내 버둥거림이 멎는 것과 동시에 르나르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휘어졌다.

    한동안 조용히 나를 안고 있던 그가 갑자기 속삭이듯 내게 말했다.

    “근데 그거 아십니까? 대공녀님한테선 아기 냄새가 납니다.”

    아기 냄새?

    베이비파우더 향을 말하는 건가?

    몰랐었다.

    따로 쓰는 향수가 없었기에.

    “여왕님한테서 아기 냄새가 나면 제가 어떻겠습니까?”

    “여왕이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해봐요, 어떻겠습니까?”

    “어떤데요?”

    “미치죠.”

    르나르가 갑자기 나를 꽉 끌어안았다.

    그의 몸에서 열이 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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