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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30화 (30/100)
  • 30화

    도망

    르나르가 홀연히 일어나 사라진 뒤, 나는 하녀가 두고 간 차를 마시지도 않은 채 멍하니 바라봤다.

    르나르가 떠나고 난 뒤부터 어떤 감정이 내게 밀려오고 있었다.

    나는 그 감정의 이름을 정확히 정의 내리기가 어려웠다.

    슬픔?

    아닌 것 같았다.

    ‘르나르가 나를 올렌도의 인형으로 본다고? 그게, 왜.’

    서운함?

    그건 어느 정도 맞는 것 같았다.

    친근하게 생각하던 르나르가 내게 그런 말을 했으니까.

    근데 내가 이런 사람이었던가?

    날 서운하게 했다고 그걸 이렇게 곱씹을 정도로?

    ‘배신… 감…?’

    왠지 그것인 것 같았다.

    ‘하지만 배신감이 왜 들지?’

    그건 상대방을 믿었어야 들 수 있는 감정이었다.

    그 사람이 내 편이고, 나를 버리지 않을 거라고 믿을 수가 있었어야.

    “휴…….”

    무거운 한숨이 절로 나왔다.

    햇살이 뿌려져 반짝이는 차 표면이 바늘처럼 뾰족하단 생각이 들었다.

    눈이 아팠다.

    “정신 차리자.”

    차가 차게 식어버릴 즈음이 되어서야 나는 나를 덮었던 그 감정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시간이 많이 지난 걸 깨닫게 된 건 차에만 고정되었던 시선을 들고난 다음이었다.

    차만 식은 줄 알았더니 창밖을 노을이 벌써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하.”

    어이가 없어 짧게 실소하게 됐다.

    ‘시간이 이렇게나 지났었다니….’

    코웰 저택에 편지를 보낼 방법을 빨리 찾아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일단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방 밖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그런데 내가 방문을 열자, 내 방앞을 기웃거리던 연두 머리칼 하녀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대, 대공녀님…!”

    “…….”

    “저는 그러니까… 대공녀님께서… 혹시 필요하신 것이 있어 절 찾으실까 봐….”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르나르가 그 하녀에게, 날 감시하라고 명령이라도 내린 건 아닌지 생각이 절로 들었다.

    르나르는 정말로 나를 이 저택에 가둘 생각인 것이다.

    “필요한 건 없어. 수고해, 그럼.”

    나는 하녀의 초록 눈동자를 직시하며 그대로 방문을 닫았다.

    노을에 물든 연노란색 방이 어쩐지 답답하게 느껴졌다.

    *

    자정에 가까운 시각.

    짙은 먹구름이 어슴푸레한 달빛조차 가려 저택은 까마득한 어둠에 휩싸였다.

    엘로즈가 그 어둠을 기꺼워하며 방을 나섰다.

    그녀의 조용한 발걸음은 그녀의 방부터 현관이 보이는 복도까지 이어졌다.

    현관 앞에 무장하고 선 두 명의 기사를 본 엘로즈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왜 저기 있는 거지…?’

    그곳은 평소엔 기사들이 지키지 않는 곳이었다.

    저택의 기사들은 보통 현관의 바깥쪽에서 저택을 지키거나, 현관과 정문 사이 넓은 공간을 돌아다니며 보초를 섰다.

    그런데 그들이 안쪽에서 안을 보고 섰다는 건, 감시할 대상이 저택 안에 있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그게 바로 나겠지.’

    생각보다 본격적인 감시에 엘로즈는 씁쓸해졌다.

    하지만 그 씁쓸함을 곱씹을 시간이 없었다.

    ‘빨리 편지를 보내야 해.’

    당장 내일 코웰 가문 가족들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를 일이었다.

    엘로즈가 드레스 위에 걸친 로브 안쪽 주머니에 손을 얹어, 미리 적은 편지가 잘 들어있는지 확인했다.

    그 후 그녀는 발소리를 한껏 죽인 채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밤중의 주방은 고요했다.

    엘로즈가 저녁 식사를 거른 오늘도 주방은 바빴던지 아직 빠지지 않은 고소한 요리 냄새가 공중을 먼지처럼 떠돌았다.

    엘로즈가 주방을 찾은 이유는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예전에, 저택 뒤뜰과 이어진 저택 건물의 문을 산책 중에 본 적이 있었다.

    문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옷차림을 고려해보았을 때 그 문은 주방에 있는 문 같았다.

    다행히 엘로즈의 그런 추측은 정답이었다.

    엘로즈는 주방 구석에서 높은 선반의 식재료를 꺼낼 때 쓰는 나무 사다리를 찾아냈다.

    이곳저곳 기웃대보니 꽤 튼튼한 밧줄도 구할 수가 있었다.

    그녀는 이것들을 챙겨 뒤뜰과 연결된 문을 열었다.

    나무로 된 문을 열자마자 상쾌한 밤공기가 밀려들었다.

    그녀의 기관지가 바깥 공기가 기껍다며 요동쳤다.

    어느새 구름이 걷힌 하늘엔 별이 쏟아질 듯 많았다.

    지금 나갔다 오면, 코웰 저택에 편지를 두고 돌아오면, 한동안 새장에 갇힌 새 신세일 거라고 생각하니 밤공기가 유난히 달았다.

    자유를 잃고 싶지가 않아졌다.

    가지고 있을 땐 몰랐는데 잃을 걸 생각하니 퍽 서글퍼졌다.

    ‘그냥 이대로 도망쳐버릴까…?’

    잠시 고민하던 엘로즈가 하늘을 향했던 시선을 거두고 몸을 움직였다.

    일단은 그녀가 넘을 수 있을 낮은 담장을 찾기로 했다.

    황자의 저택을 둘러싼 담장들은 대체로 높았다.

    그나마 낮은 편에 속하는 담장 앞에 그녀는 섰다.

    엘로즈 키의 세 배가 훌쩍 넘는 나무가 그 담장에 맞닿아있었다.

    담장의 높이가 높은 것보다 나무의 키가 더 컸기 때문에, 나무에 오르면 담장을 넘어가는 것이 가능할 듯 보였다.

    엘로즈는 사다리를 타고 나무에 오른 뒤 그녀의 무게를 버틸 수 있을 만큼 단단한 가지 위에 앉은 다음, 그 가지에 밧줄을 묶고 밧줄 끝을 담장 너머로 던질 생각이었다.

    그 후엔 가지에서 담장으로 옮겨 앉은 뒤 밧줄을 타고 담장 너머로 내려가면 될 것 같았다.

    생각보다 일이 수월하게 풀리고 있었다.

    돌아올 때가 문제이긴 했지만, 밧줄을 붙잡고 담장을 오르는 것에 실패하면, 엘로즈는 그냥 당당히 정문으로 들어오기로 했다.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저택에 갇히게 될 것은 매한가지일 테니.

    하지만 나가는 일조차 머리로 계획했던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다리를 이용해 나무에 오른 뒤 가까스로 가지 위에 올라앉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사다리를 잘못 디뎌 세워놓은 사다리를 넘어뜨려 버린 것이었다.

    나무 아래로 내려가고 싶어도 다시 내려갈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엘로즈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입은 드레스가 거추장스러웠다.

    일부러 제일 깔끔한 드레스를 입고 나왔음에도, 바지가 무척 그리워졌다.

    ‘이 세계에서 바지를 유행시켜버려…?’

    그때, 엘로즈의 가녀린 몸이 아래쪽으로 휘청했다.

    그녀의 치맛자락이 어딘가에 걸린 모양이었다.

    그 걸린 곳을 찾기 위해 엘로즈의 시선이 아래쪽을 향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 끝에 닿은 건 나무의 가지 따위가 아니었다.

    달빛에 젖은 적갈색 눈동자가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동자의 주인은 눈을 크게 뜬 놀란 얼굴이었다.

    “위험합니다. 내려오세요.”

    르나르가 엘로즈에게 말했다.

    하지만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엘로즈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오르려던 가지 위로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르나르가 엘로즈의 치마를 재차 붙잡았다.

    르나르의 다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연기였습니다, 대공녀님!”

    조금 흐른 땀을 시원하게 식히는 밤바람이 엘로즈를 스쳐 지나갔다.

    엘로즈가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르나르를 봤다.

    르나르는 조금 초조해진 얼굴이었다.

    “저택에 황자 전하 첩자가 있었습니다. 첩자를 속이고 전하를 속이기 위해, 저는 오늘 대공녀님과 다퉜어야만 했습니다. 근데 이걸 대공녀님께 미리 전부 말씀드리면… 대공녀님께서 어색하실 수 있을 것 같아… 저는 대공녀님의 연기 실력을 모르니까요.”

    “…….”

    “서둘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바로 말씀드리려 했었는데 첩자가 대공녀님 근처를 떠나지를 않아 더 빨리 말씀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내 방 앞을 지키던 연두 머리칼 하녀.’

    “안 그래도 대공녀님께서 차를 가지고 제 방에 오시면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편지도 당연히 보내드릴 생각이었고요. 그런데 차를 가져다주지 않으셔서 방에 가봤더니…, 벌써 제게서 이렇게… 도망치고 계셨을 줄은….”

    마지막 문장을 말하는 르나르의 눈꼬리가 내려갔다.

    어쩐지 서러워 보이는 모양새였다.

    인형 운운할 땐 언제고 엘로즈가 그에게서 도망치려 한 것이 퍽 서글퍼진 것이었다.

    “잘못……, 했습니다…….”

    르나르가 물기 어린 목소리로 엘로즈에게 말했다.

    매달리듯, 엘로즈의 치맛자락을 여전히 꼭 쥔 채였다.

    그 모습이 엄마를 놓치지 않으려는 아이만 같아 엘로즈는 르나르를 쳐내지 못했다.

    떠나려는 엄마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졌던 그녀의 현실 세계 어린 시절이 르나르 위로 겹쳐 보였던 탓이었다.

    하지만 편지를 부쳐주겠단 르나르를 믿을 수도 없었다.

    오늘 오전만 해도 생각보다 눈치가 없는 것 같다며, 그동안 나서서 그녀를 집에 보내주던 르나르에게 크게 한 방 먹은 엘로즈였다.

    그가 조금 전 한 말들도, 지금 하는 행동들도, 그녀를 주저앉히려는 수작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르나르를 믿지 말아야 했다.

    ‘사람은 버리고 배신한다.’

    그것이 엘로즈가 현실 세계에서 배운 유일한 진리였다.

    그런데 르나르는 더더욱 믿으면 안 되는 계략남이었다.

    엘로즈는 편지를 스스로 코웰 저택에 전달하고 싶었다.

    현실 세계에서 그랬듯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참이었다.

    “놔주세요.”

    “대공녀님…….”

    “놓아주시라니까요?”

    엘로즈가 미간 사이를 좁히자 르나르가 말하지 않으려 했던 것을 말했다.

    그 말이 엘로즈를 충격 받게 했다.

    “지금은 놓아드릴 수가 없습니다. 지금 대공녀님께서 나가시면… 제 손으로 대공녀님 발목을 잘라야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발목을? 내… 발목을…?’

    “그게 무슨 소리죠?”

    “물론 저는 대공녀님 발목을 자르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해도 말이죠. 그래도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조금만 지나면 저희를 향한 황자님 관심이 수그러들 겁니다. 흥미를 쉽게 잃으시는 분이거든요. 그럼 그때 제가 대공녀님을 내보내 드릴 방법을 다시 찾아보겠습니다. 저 또한 대공녀님께서 이곳에 갇혀만 계시는 게 싫습니다. 그러니까 조금만… 조금만 절 기다려주시면 안 될까요…?”

    엘로즈가 당황해 눈만 깜빡였다.

    그녀는 아직도 그녀가 밖으로 나가면, 르나르가 그녀의 발목을 잘라야 하게 될 수도 있단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해도….’

    엘로즈가 르나르의 말을 곱씹었다.

    그러자 그 뜻을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녀가 밖으로 나가면 그녀의 발목을 자르라고, 올렌도가 르나르에게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참으로 다정한 예비 약혼자가 아닐 수 없었다.

    “정말… 놀랍도록 다정한 분이시네요.”

    “네?”

    “황자 전하 말이에요. 제가 밖으로 나가면 제 발목을 자르라고 명령하신 건가요? 그리고 그분이… 제 진짜 예비 약혼자인 거고요? 그것, 참…… 하지만 전 그런 분의 한 마디에 묶여 여기 갇혀 있고 싶지 않습니다. 제 발목을 잘라야 한다면 마음대로 하세요. 자르세요, 그대도.”

    “대공녀님!”

    엘로즈가 평소라면 부리지 않았을 고집을 부렸다.

    르나르의 눈 속에서 일렁이는 달빛이 목석같은 그녀를 놀라울 정도로 감정대로만 움직이게 했다.

    엘로즈는 서러웠다.

    책 속에 빙의된 것도, 제 발목을 자르겠다는 황자가 제 약혼자일 수밖에 없게 된 것도.

    그때, 조용히 엘로즈의 표정을 살피던 르나르가 문득 엘로즈에게 말했다.

    “파혼을 돕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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