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갇힌 인형
“너만 믿어, 소피아. 폐하께서 시키신 일이니까.”
“황제 폐하께선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걸까요? 왜 대공녀님과 황자님을 감시하라는 건지….”
“윗분 생각이야 난들 아나. 그래도 네가 있어 참 다행이야. 네 덕에 황제 폐하의 명령을 내가 제대로 수행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역시 널 만난 건 나에겐 큰 행운이야.”
올렌도가 다시 한번 하녀 소피아의 뺨에 입을 맞췄다.
소피아가 부끄러운 듯 어깨를 움츠리며 얼굴을 발갛게 붉혔다.
르나르는 금세 상황을 파악했다.
가벼운 입맞춤에도 눈빛이 몽롱해지는 것을 보니 하녀는 이미 올렌도에게 빠져 정신 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올렌도는 하녀에게 신분을 속이고 황제의 밀명이란 거짓말로, 르나르와 엘로즈를 지켜보게 한 것이 틀림없었다.
대화를 들어보니 두 사람은 이전부터 알던 사이 같았다.
그렇다면 올렌도는 저 하녀를 정말 사랑하는 것일까?
아무렴 상관없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게 된 순간부터 르나르에게 그 하녀는, 올렌도의 염탐꾼에 불과했다.
“혹시 대공녀가 외출하면 꼭 내게 말 해줘야 해. 그리고 황자 전하와 대공녀가 다투지는 않는지도. 아, 특히 오늘 더 잘 지켜보고.”
“왜요? 오늘 황자님과 대공녀님 사이에 다툼이 생겨야 하나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아니라면 황자에… 아니, 황자 전하께 큰 변화가 생길 거고. 기대되지?”
올렌도가 의미심장하게 씩 웃었다.
올렌도는 이제 하녀의 원피스 목 부분을 조금 내려 그녀의 쇄골에 입술을 지분대는 중이었다.
벽에 기대선 하녀가 몸을 꼬았다.
더 볼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한 르나르가 발걸음을 돌려 숨었던 자리를 떠났다.
오늘 특히 더 잘 지켜보라 말한 것의 이유는 비교적 분명했다.
올렌도가 당장 오늘부터 엘로즈를 가두도록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르나르가 올렌도의 명령을 제대로 전한다면 르나르와 엘로즈는 한 번은 다툴 수밖에 없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자유롭게 외출하던 엘로즈가 영문도 모른 채 이 변화를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테니.
물론 르나르는 엘로즈와 다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올렌도의 의심을 잠재워 놔야 앞으로 그를 속이기 더 수월할 것이었다.
르나르는 당장 오늘 이 일을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
“황자 전하께서 아직도 손님과 함께 계신지 보고 올래?”
“네, 대공녀님.”
내 명을 받은 하녀가 방을 떠났다.
올렌도를 보게 된 뒤,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내 방으로 돌아왔다.
나는 어차피 올렌도가 진짜 황자인 것을 모르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때문에 굳이 그와 인사를 하지 않아도 된단 것은 큰 장점이었다.
그럼에도 창밖 풍경을 바라보던 시야가 흔들렸다.
나는 초조했다.
내가 외출한 것에 대한 책임을 올렌도가 르나르에게 물을까 봐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올렌도가 떠났는지 알아보러 간 하녀가 빨리 돌아오지 않자 시야는 점점 더 흔들리고 있었다.
마침, 내 방을 청소하러 들어오는 하녀가 있었다.
연두 머리칼에 초록 눈동자를 가진 그 하녀에게 나는 내가 궁금했던 것을 묻기로 했다.
“전하의 손님은 가셨니?”
“전하의 손님이요?”
화병을 닦던 하녀가 나를 봤다.
목 언저리가 붉었다.
어디서 연인과 밀회라도 즐기다 온 것일까?
“연분홍색 머리카락을 가진 황자 전하의 기사 분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분께선 아까 돌아가셨습니다, 대공녀님.”
“그래? 그럼 전하께선 지금 어디 계시지?”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필요 없어졌다.
르나르가 내 방에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거기 너, 차와 다과를 좀 가져다줘.”
르나르가 연두 머리칼 하녀에게 명령했다.
하녀가 잠시 머뭇대다 고개를 끄덕이곤 밖을 향해 움직였다.
마침 방안으로 불어든 바람에 하녀가 닫던 문이 조금 시끄럽게 닫혔다.
쾅—
르나르와 나만 남은 내 방은 고요했다.
나와 르나르가 내 방에 딸린 작은 응접실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반짝이는 여름 햇살이 르나르의 흑발 머리칼에 장식처럼 쏟아졌다.
왜인지 긴장한 얼굴의 르나르가 손가락 끝으로 톡톡 테이블을 두드렸다.
이 행동 때문에 덩달아 나도 긴장하게 됐다.
르나르가 쉬이 입을 열지 않아 내가 먼저 말을 꺼내기로 했다.
“황자 전하께선 이렇게 아침부터 저택에 무슨 일이신가요? 혹시 제가 어제 길에서 전하를 만난 일 때문인가요?”
“뭐,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르나르가 이상할 정도로 애매한 답변을 내놓았다.
이상한 것은 답변뿐만이 아니었다.
르나르의 표정도 이상했다.
긴장한 얼굴이 사라진 뒤부터 르나르는 완벽하게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방긋방긋 혹은 유혹적으로 잘 웃는 평소 모습과는 참 다른 모습이었다.
‘항상 무표정하단 원작의 설명과 다르게 참 잘 웃는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의 르나르는 원작의 설명과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나는 그런 르나르를 무척 낯설게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의 표정이 아니었다.
나는 평소 같지 않은 그의 표정보다 더 알고 싶은 게 있었다.
“혹시 황자님께서 경에게 책임을 묻겠다고 하진 않으셨습니까?”
“책임이요? 책임이라고 하신다면.”
“혹시 그대를 벌주겠다고 하진 않으셨느냐고요.”
“아,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 말씀은 따로 없으셨습니다.”
그 말을 듣자 긴장이 확 풀리며 마음이 편해졌다.
올렌도가 나를 싫어해 르나르에게 과한 벌을 줄까 봐 걱정했는데.
기우인 모양이었다.
‘어쩌면 올렌도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자기 사람을 아낄 줄 아는 사람인 건지도 몰라.’
여러모로 마음이 놓여서인지 가벼운 미소를 짓게 됐다.
그런데 르나르가 그런 나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러곤 불쑥 말했다.
“이제 외출 못 하십니다.”
그 말을 하는 르나르의 태도는 무척 사무적이었다.
그것 또한 평소 르나르 같지 않아 무척 어색했지만, 나는 무리 없이 그 말을 수용하기로 했다.
앞으로 집에 가기 어려울 거란 건 올렌도를 우연히 마주쳤던 순간부터 예상했던 것이었다.
아쉽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알겠어요. 그럼 오늘 집에 가서 당분간은 방문이 어려울 것 같다고 가족들에게 이야기하고 올게요.”
“…….”
“아, 혹시 ‘이제’라는 게… 설마 지금 이 순간부터를 의미한 거예요…?”
“네.”
르나르의 대답이 매정할 만큼 짧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할 말을 잃게 됐다.
그때, 르나르의 눈동자가 응접실 너머 닫힌 방문 쪽으로 움직였다.
고개는 돌리지 않은 채였다.
그 모습이 꼭 먹잇감의 발소리에 귀 기울이는 맹수처럼 보였다.
다음 순간, 르나르가 다시 내게 시선을 옮겼다.
무표정했던 르나르 얼굴이 서늘할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이에 내가 제대로 당황하기도 전, 르나르의 입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말들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대공녀님……. 생각보다 눈치가 없으신 것 같으시니 그냥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그동안 제가 많이 봐 드리지 않았습니까? 몇 번 배려해드리면, 알아서 자제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대공녀님은 정말… ‘적당히’라는 것을 모르시는 분 같더군요.”
르나르가 날 비난하고 있었다.
나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내가 집에 가는 거… 르나르는 괜찮아하는 줄로 알았는데…?’
나도 모르게 혀를 내 입술을 축이게 됐다.
너무 당황했기 때문인지 목이 메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그래도 울고 싶은 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최대한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네요. 미안해요. 내가 눈치가 없었어요. 그럼 편지라도 쓰게 해주세요. 편지도 안 쓰면 가족들이 정말 걱정을….”
그때, 르나르의 한쪽 눈썹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편지요?”
그가 되물었다.
아주 불만스럽다는 말투였다.
이번엔 나도 화가 났다.
‘대체 왜 저렇게까지 반응해야 하는 거지?’
내가 집에 가지 못해도 편지는 코웰 저택에 보내야 했다.
매일 집에 가던 내가 갑자기 나타나지 않으면 날 걱정한 대공과 오빠들이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편지에 피로가 쌓여 당분간은 집에 가지 않겠다는 거짓말을 적을 생각이었다.
르나르를 배려한 것이었다.
진실을 적으면 가족들이 르나르와 올렌도 두 사람을 전부 곤란하게 만들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배려한 것이 민망할 정도로 르나르는 내게 짜증이 난 것처럼 보였다.
“후… 로즈, 로즈…. 엘로즈….”
그가 내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왜 아직도 이해하질 못하는 거지? 네게 그런 게 가당키나 하다고 생각해? 너는 그저 이곳에 갇힌 인형일 뿐이야. 황자 전하의 예쁜 인형.”
그 순간… 나는 망치로 세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네가 나를 그렇게 보고 있었다고?’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그 순간이 지나니, 마음이 차갑게 식으며 오히려 정신이 맑아졌단 사실이었다.
마치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이 밀물이 되어 밖으로 쓸려나간 듯한 기분이었다.
비록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지만.
섭섭한 감정이 드는 것을 보면 나도 언젠가부터는 르나르를 진짜 친구로 생각하고 있던 것일지도 몰랐다.
신뢰할 순 없지만, 그래도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한 친구.
어찌 됐든 바보 같은 일이었다.
그때,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이 열렸다.
은은한 허브 향과 함께 르나르의 차 심부름을 갔던 하녀가 돌아왔다.
하녀가 방안의 가라앉은 분위기를 살폈다.
커진 눈으로 초록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리는 모양새를 보니 그녀가 사라졌던 동안 무슨 일이 있던 건지 꽤 궁금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하녀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냥 그녀가 눈동자 굴리는 모습 자체가 보고 싶지 않았다.
무척 기분이 좋지 않았다.
르나르도 보고 싶지 않아졌다.
“나가…세요….”
어쩐지 꽉 막혀오는 목구멍 사이로 내가 가까스로 말을 뱉었다.
르나르가 눈을 빛내며 나를 봤다.
마치 원하던 것을 얻어냈단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는 정말로 화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황자님, 제 방에서 나가세요. 지금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