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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28화 (28/100)
  • 28화

    발목

    불행인지 다행인지 먼 곳을 응시하던 올렌도는 구겨진 르나르 표정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혼자만의 상념에 잠긴 올렌도가 말을 이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얗잖아. 꼭 밟지 않은 눈처럼. 밟아서 자국 내고 싶게.”

    르나르가 응접실 테이블 위 가십지를 집어 들었다.

    개소리는 무시하는 게 답이라 생각했다.

    읽다 보니 아는 이름이 적힌 기사가 보였다.

    하지만 올렌도는 여전히 말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가학심이 들게 하는 얼굴이야. 울려보고 싶어.”

    “…….”

    “화내도 예쁠 것 같고. 가둬두면 화내 주려나?”

    와륵—

    가십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구겨졌다.

    올렌도가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의 표정에 당황스러움이 담겼다.

    그런데 르나르도 입을 열지 않자, 응접실엔 어색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설명…, 안 해…?”

    이내 정신을 갈무리한 올렌도의 눈이 가늘어졌다.

    올렌도를 빤히 보던 르나르가 구겼던 가십지를 대충 펴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그의 손가락이 가십지 속 기사 하나를 가리켰다.

    “달갑지 않은 기사를 봤습니다. 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다니시는 겁니까?”

    올렌도의 연하늘색 눈동자가 기사 내용을 빠르게 훑었다.

    [앤드리아 백작가 자살 소동, 문제의 남작은 누구인가?! : 앤드리아 백작가가 때아닌 자살 소동으로 시끄럽다.

    소동을 벌인 주인공은 백작의 첫째 딸, 에머리 앤드리아! 그녀는 영원을 약속한 남작 애인이 다른 여인과 바람이 났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영애가 주장한 남작이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면서, 충격받은 영애가 자살 시도를….]

    “다행히 목숨엔 지장이 없으나….”

    올렌도가 기사 내용을 소리 내 읽었다.

    “에머리 앤드리아면 전하께서 최근까지 편지를 쓰시던 영애 아닙니까? 에머리 앤드리아 백작 영애요.”

    “어어, 맞아. 에머리가 자살 시도를 했어? 이런. 살았으니 됐네.”

    “이번엔 남작이라고 속이신 겁니까? 대체 언제까지….”

    “근데 내가 그 에머리를 떼어내다 누굴 만난 줄 알아? 엘로즈 코웰.”

    올렌도의 입에서 또다시 엘로즈 이름이 나왔다.

    르나르는 이번에는 애써 무표정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 르나르를 보는 올렌도 눈빛이 한층 날카로워졌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왔어. 그 여자가 왜 저택 밖에 있었을까? 내 허락도 없이?”

    올렌도가 싱긋 웃었다.

    다정한 그 미소가 극적인 태도 변화를 위한 연기일 뿐이란 것을 르나르는 모르지 않았다.

    때문에 르나르의 반응은 덤덤했다.

    “대공녀님을 밖에 내보내 드리면 안 되는 겁니까?”

    태연한 르나르의 반응에, 웃던 올렌도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당연히 안 되지. 설마 몰랐던 거야?”

    “죄송합니다. 예법에 무지해서요.”

    “그건 예법이 아니라 상식이야. 네가 그렇게 무식하다고? 황자의 예비 약혼녀가 버젓이 밖을 나돌아다니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황자가 그만큼 위신이 없나 보다 생각할 거 아니야. 넌 나를 모욕한 거야. 설마 내가 그냥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올렌도가 날 선 얼굴로 팔짱을 꼈다.

    하지만 두 번째 손가락이 일정한 속도로 까딱까딱 팔을 두드리고 있었다.

    고민 중이란 뜻이었다.

    르나르에게 어떤 벌을 내려야 할지, 올렌도는 감이 잡히지가 않았다.

    르나르는 늘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아버지 터넛 황제 때문이었다.

    터넛 황제가 올렌도에게 직접 붙여준 수하가 르나르였다.

    르나르가 산적 떼 습격을 당한 황제의 행렬에서 황제의 목숨을 구하고 그의 곁에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는데, 터넛이 그 대신 올렌도 곁에 르나르를 머물게 한 것이었다.

    황제가 르나르를 처음 데리고 와 그를 소개할 때의 눈빛을, 올렌도는 여전히 잊지 않고 있었다.

    터넛은 애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르나르를 보고 있었다.

    그는 능력이 뛰어난 이들을 사랑해 마지않았으니, 그런 터넛을 이해 못 할 것은 없었다.

    르나르는 터넛의 목숨을 구했을 뿐더러 황실 기사 중 검술 실력이 가장 뛰어났으니.

    그런 르나르를 수하로 두게 된 건 올렌도에게도 분명 좋은 일이 분명했다.

    하지만 좋은 일인 걸 안다고 질투가 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올렌도는 르나르에게 큰 벌을 내리고 싶어졌다.

    그런데 그 순간, 엘로즈의 서늘한 얼굴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기분이 찝찝했다.

    르나르를 벌주면, 그녀에게 진 빚이 두 개로 늘어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코웰 가문에게 빚이라니.’

    생각만 해도 싫었다.

    엘로즈의 얼굴이 올렌도의 취향인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취향을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로 올렌도는 코웰 가문을 싫어했다.

    앞으로도 마음 놓고 싫어할 생각이었기에 그는 엘로즈에게 더는 마음의 빚을 지고 싶지가 않았다.

    가능한 마음 편히, 마음껏 미워하고 싶었다.

    결국 올렌도는 이번 한 번만 관대한 척 넘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남자인 르나르에게 별로 내리고 싶은 벌도 없었고….

    “근데 생각해보니 네가 멍청하다. 네가 멍청한 것은 네 잘못이 아니라 널 고아로 만든 네 부모 잘못이니, 이번 한 번은 넘어가 주도록 할게.”

    르나르의 입꼬리가 비웃듯 올라가려다 말았다.

    “대신 오늘 이후에 대공녀가 저택 밖으로 나오면.”

    “…….”

    “난 네게 대공녀 발목을 자르게 할 거야.”

    르나르의 눈이 커졌다.

    제가 들은 것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르나르는, 올렌도에게 벌을 받고 난 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엘로즈를 내보내 줄 생각이었다.

    그녀가 집에 가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데 발목을 자르라니….’

    올렌도가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르나르는 몰랐었다.

    올렌도는 과민반응하고 있었다.

    크게 티는 안 내도 엘로즈의 얼굴이 마음에 든 게 사실 무척 짜증이 난 모양이었다.

    “표정이… 왜 그래…?”

    르나르의 굳은 표정을 보며 올렌도가 르나르에게 물었다.

    평소 올렌도는 르나르에게서 표정이랄 것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르나르가 거의 항상 무표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르나르의 표정이 좋지가 않았다.

    올렌도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느끼게 됐다.

    “대공녀님 발목… 진심으로 하신 말씀이십니까…? 코웰 가문과 전쟁이라도 벌이시려고요?”

    “전쟁? 그거 재밌겠네. 필요하다면 해야지. 난 안 그래도 황실과 코웰 가문 놈들이 제대로 맞붙으면 누가 승자가 될지 항상 궁금했었거든?”

    “…….”

    “그게 신경 쓰이는 거였다면 걱정 안 해도 돼. 나는 오히려 이참에 폐하와 대공 사이가 확 틀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

    허풍스럽게 이야기하던 올렌도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자신이 상관없다고 얘기했음에도 르나르 표정이 여전히 서늘했기 때문이었다.

    순간 의심스러운 마음이 생긴 올렌도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아니지?”

    “뭘 말입니까?”

    “대공녀 좋아하는 거. 설마. 네가 좋아하는 여자의 발목을 자르라고 해서 네가 지금 내게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건 아닌 거지?”

    르나르가 잠시 고민했다.

    그렇다고 말하고 목을 날려버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아직 르나르는 웅크려야 하는 시기였다.

    덩치가 큰 사냥감들의 목덜미를 제대로 물어뜯기 위해.

    “……그럴 리가요.”

    어느새 다시 무표정해진 르나르를 올렌도가 수상하다는 듯 봤다.

    하지만 수수께끼 같은 르나르 표정이 풀기가 어려웠다.

    올렌도는 기분이 나빠졌다.

    “너도 알겠지만 나는 날 거역하는 수하는 그냥 두지 않아.”

    “…….”

    “너는 내가 잘라내면 그만일 손발일 뿐이라고. 알아? 명심해. 나는 네게 대공녀를 꼬시라고 했지, 좋아하라고는 명령한 적이 없어. 너는 날 거역해선 안 돼.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알고 있습니다.”

    르나르가 꿈쩍도 하지 않자 올렌도는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손발을 잘라내도 정말 괜찮겠냐고, 그만일 뿐이겠냐고, 르나르가 속으로 묻고 있던 것을, 올렌도는 알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올렌도가 별안간 무언가 생각났다는 표정을 했다.

    “아. 혹시 어제 대공녀한테 선물 받은 거 있어?”

    “선물이요?”

    “응. 선물.”

    “아뇨, 없습니다만….”

    르나르의 대답에 올렌도는 문득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대공녀와 르나르는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사이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게 왜 기분이 좋은 건지 올렌도는 알 수 없었다.

    “그래? 그럼 그 손수건은 대체 누굴 위한 것이었을까?”

    “손수건이요?”

    “대공녀 잘 감시해. 다른 남자가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

    “……네……?”

    르나르의 적갈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를 본 올렌도는 알 수 없는 희열에 기분이 더 좋아졌다.

    르나르가 코웰 대공녀를 좋아하는 것이어도 상관없었다.

    코웰 대공녀만 같은 마음이 아니라면.

    분명 르나르가 코웰 대공녀를 꼬시길 바랐었는데, 이제는 코웰 대공녀가 르나르에게 넘어가지 않길 바라고 있었다.

    참 알 수 없는 마음이었다.

    “시장에서 대공녀가 무언가를 샀어. 매장 주인이 말하길, 남자 손수건이라더군. 애인에게 줄 선물이 분명하다고. 감히 황자를 두고 바람을 피운 거면 어떻게 혼을 내줘야 할까? 응? 가짜 황자님? 이거 흥미로워지겠는데?”

    올렌도가 말하는 동안 르나르 눈빛은 어쩐지 텅 비어갔다.

    꽤 한참 만에 르나르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올렌도가 엘로즈를 가두란 얘길 다시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 저택에 가둬둬. 가둬두면 감시도 쉽겠지. 대공녀가 나가지 못하면 대공녀 애인이 몰래 들어오지 않겠어? 당장 오늘부터 못 나가게 해. 지금 이 순간부터라고. 내 말 알아들어?”

    재촉하며 묻는 말에 르나르가 대충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르나르는 이 여름의 맑은 날씨가 참 찝찝하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르나르는 올렌도의 명령에 따를 생각이 없었다.

    엘로즈에게 숨겨진 애인이 있는 것이든 아니든, 어쨌든 르나르는 엘로즈가 원하는 걸 해주고 싶었다.

    그렇다고 생각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근데 엘로즈에게 정말 애인이 있는 걸까? 그래서 저택에 돌아오는 시간도 자꾸 늦어졌던 걸까? 그래서 데리고 오지 말라고도 했던 걸까?’

    쓸모없는 생각들은 걷잡을 수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르나르의 기분이 자꾸만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응접실 창문을 관통한 햇살을 따갑게 느낀 르나르가 눈살을 찌푸리며 응접실을 나섰다.

    그런데 꽤 한참 전 응접실을 나선 올렌도가 여전히 저택에 있었다.

    올렌도를 발견한 르나르가 복도 장식용 기사 갑옷 뒤로 몸을 숨겼다.

    올렌도는 저택의 하녀 중 한 명과 함께였다.

    올렌도가 허리를 숙여 그 하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예상치 못한 장면에 당황한 르나르가 하, 하고 작게 입을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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