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략남이 훅 들어왔어-27화 (27/100)
  • 27화

    겁도 없이

    다정한 손길이었다.

    ‘엄마…, 아니, 아빠인가……?’

    내가 무의식중에 생각했다.

    아니다.

    둘 다 불가능했다.

    두 사람은 나를 버렸다.

    ‘내겐 다정히 대해줄 부모가 없어.’

    머리칼을 넘겨주던 손가락을 잡아냈다.

    손톱으로 꽉 눌렀다.

    아주 아프게 꽉.

    하지만 상대는 전혀 아픈 티를 내지 않았다.

    “우셨…습니까…?”

    부드러운 목소리가 달래듯 내게 물었다.

    달콤하고 시원한 향이 코끝에 와 닿았다.

    무거운 눈꺼풀을 연이어 깜빡이자 흐렸던 시야가 점차 선명해졌다.

    이내 보게 된 것은 걱정된다는 눈빛을 한 르나르였다.

    하얀 달빛이 르나르의 흑단 같은 흑발 위로 쏟아졌다.

    르나르가 긴 검지로 내 눈가를 찍었다.

    작은 눈물방울이 내 눈에서 그의 손가락 위로 옮겨갔다.

    가만히 방울진 눈물을 보던 르나르가 살짝 혀를 내밀어 그것을 핥았다.

    당황해 그를 보는데 그는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핥은 손을 내리고 다정한 눈빛으로 날 마주 봤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왜 울고 계셨어요.”

    내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정말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저 아예 잊은 줄 알았던 예전의 서글픔이 잠시 떠올랐을 뿐.

    르나르가 내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그러곤 아까 찍지 않은 내 눈을 엄지로 쓸었다.

    그다음 젖은 손가락을 또 입으로 가져가길래 놀란 내가 그의 손을 잡았다.

    르나르는 들켰다는 듯 살짝 웃고는 손을 내렸다.

    그가 다시 꿀 바른 것 같은 달콤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건넸다.

    “나쁜 꿈을 꾸신 거예요?”

    “뭐, 비슷…해요….”

    대충 이해했다는 듯 르나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겁도 없이 이런 곳에서 잠드시니 나쁜 꿈을 꾸신 거예요. 이 새벽에 여기 계시면 어떡해요? 제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이런 곳….’

    그러고 보니 내가 눈을 뜬 곳이 내 방이 아니었다.

    ‘왜 내가 이곳에… 아…!’

    “할 말이 있었어요. 그래서 르나르를 기다렸어요.”

    “할 말이요?”

    “네. 오늘 낮에….”

    그때, 르나르가 고개를 돌렸다.

    내가 당황했다.

    내 말을 듣지 않겠단 표현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르나…르…?”

    “…….”

    “내 얘기 안 들을 거예요…?”

    “안 듣겠습니다.”

    “왜요…?”

    “그 얘기 하고 나면 가실 거잖아요. 저는 대공녀님 보내드리기 싫은데.”

    달빛을 머금은 그의 입꼬리가 장난스럽게 휘어져 있었다.

    어느새 내 머리칼을 한 가닥 쥐고 손가락으로 빙빙 돌리고 있는 르나르였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얼굴이 내 얼굴과 무척 가까운 곳에 있었다.

    맹세하는 기사처럼, 그가 한쪽 무릎을 세운 채 내 앞에 무릎 꿇고 앉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방 안이 어두워 미처 몰랐었다.

    “왜 거기 그러고 있어요. 일어나 옆에 앉아요.”

    내가 기대 잠들었던 소파 쿠션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르나르는 그런 날 다시 쿠션으로 눌러 눕혔다.

    그러곤 여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괜찮습니다. 옆에 앉으면 여기서 보는 것보다 대공녀님 얼굴이 잘 안 보일 것 같거든요. 대공녀님 얼굴은 잘 봐야 하는데.”

    “꼭 제 얼굴을 잘 봐야 하나요? 그럼 촛불을 켤까요?”

    “방 안이 밝은 걸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르나르가 이상한 소리를 했다.

    언제부터 밝은 걸 안 좋아했다고.

    르나르는 계속 나랑 장난이 치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올렌도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나는 결국 자꾸 장난치려는 르나르 입술을 손바닥으로 누르고 말을 던졌다.

    “오늘 황자 전하를 만났어요. 올렌도 그레이시아나, 진짜 황자 전하요.”

    순간 르나르의 눈썹이 움찔했다.

    내가 올렌도를 만난 것은 역시 르나르에게 좋지 않은 일인 듯 했다.

    “그것을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모르고 계시는 것보단 알고 계시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르나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여름 밤 무거운 공기가 적막한 방안을 가득 채웠다.

    공기에서 풀냄새가 났다.

    르나르가 이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혹시… 어떠셨습니까…?”

    나는 그 질문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땠냐고요?”

    “어떠셨습니까?”

    “이해가 잘되지 않아요.”

    “나쁘지 않단 생각이 드셨달지…, 아니면 혹시라도… 잘생겼다는 생각이 드셨달지….”

    무슨 달밤에 개가 짖는 소리인가 싶었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난 지금 경이 저 때문에 벌이라도 받게 될까 걱정하고 있는 건데.”

    “아. 저를 걱정하고 계셨던 거군요?”

    르나르의 표정이 이내 밝아졌다.

    그가 눈을 휘어 사르르 웃었다.

    알래스카 만년설도 녹일 것 같은 해사한 미소에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정말 괜찮은 건지….’

    “신경 쓰지 마세요, 대공녀님. 저는 괜찮습니다. 전하께서 대공녀님께 화를 내지는 않으셨습니까?”

    “전 괜찮았어요. 저는 제가 만난 황자님이 진짜 황자님인 걸 모르는 것처럼 행동했거든요.”

    “그나저나 대공녀님께서 올렌도 황자님 얼굴도 아시는 줄은 몰랐네요. 어떻게 알게 되신 거죠? 아, 됐습니다. 대공녀님께선 원래 모르시는 게 없으셨으니까요. 코웰 가문 정보력을 신뢰합니다. 다만 저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마세요.”

    르나르가 내게 다시 미소 지었다.

    이번엔 내가 길고양이들에게 짓던 것 같은 다정한 미소였다.

    내가 아직 초조하단 걸 일부러 그렇게 웃는 것 같았다.

    날 안심 시키려고.

    ‘르나르는 내게 대체 왜 이렇게까지 잘 해주는 걸까….’

    그 미소의 의도를 알면서도 마음이 놓이는 것을 느끼며 내게 생각했다.

    그 미소는 그렇게 힘이 아주 센 미소였다.

    *

    엘로즈를 방에 데려다주고 그의 방으로 돌아가는 길.

    르나르의 표정이 서늘했다.

    바로 조금 전까지 방긋방긋 잘 웃던 사내와 동일한 인물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의 얼굴이었다.

    그게 평소의 르나르였다.

    서늘한 얼굴.

    표정 없는 표정.

    웃는 얼굴 가면을 쓴 건 엘로즈가 불안함을 느끼는 게 싫어서였다.

    불안하게 만들면 그를 떠나갈 것만 같았으니까.

    그것이 엘로즈가 올렌도를 만난 것이 별일 아닌 양, 르나르가 태연하게 행동했던 이유였다.

    사실 엘로즈가 올렌도를 만난 건 르나르로서도 골치 아픈 일이긴 했다.

    평소에도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올렌도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하기가 무척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올렌도는 귀족들이 다니는 장소는 오히려 피해 다니니 두 사람이 마주칠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쯧.

    르나르가 짧고 굵게 혀를 찼다.

    ‘벌이라도 내리려나….’

    르나르 솜사탕 같은 생김새와 달리 가학적인 면이 있는 올렌도를 떠올렸다.

    그래, 그는 분명 가학적이었다.

    올렌도가 좋아하는 여자들을 만나 즐기는 행동들을 보면 그랬다.

    르나르는 올렌도의 방 안을 굴러다니는 채찍을 몇 번 봤었다.

    웬 별장에 영애를 가둬둔 것도 본 적이 있었다.

    어디라도 갇히는 건 싫었다.

    잠시라도 갇히게 되면 엘로즈를 못 보게 될 테니까.

    ‘설마 이 저택에서 나가라고 하진 않겠지?’

    그래.

    그것만 아니면 될 것 같다.

    르나르가 내린 결론이었다.

    올렌도의 반응을 몇 가지로 추려보며 르나르가 무심히 머리를 쓸어 넘겼다.

    드러난 그의 이마에 달빛조차 홀린 듯 입을 맞췄다.

    르나르는 올렌도가 조만간 찾아오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단지 그게 바로 다음 날이 될 줄은 몰랐을 뿐이었다.

    *

    내 단장을 돕던 하녀 한 명이 들고 있던 거울을 손에서 놓쳤다.

    쨍그랑-

    “꺄악!”

    거울이 산산 조각났고, 하녀 네 명이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거울을 떨어뜨린 하녀가 사색이 됐다.

    나는 표정이 굳어졌다.

    ‘거울이 깨지다니 왠지 불길한데….’

    그런데 하녀는 그런 내 표정을 오해한 모양이었다.

    “대, 대공녀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죽을죄?’

    거울을 떨어뜨린 하녀가 바닥에 무릎 꿇더니 불필요하다 싶을 정도로 머리를 조아리기 시작했다.

    이곳 하녀들은 이상했다.

    이들을 보고 있으면 내가 마치 소설 속 악녀에 빙의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나는 그저 황자와의 파혼을 원치 않는 엑스트라일 뿐인데.

    “……괜찮아. 깨진 거울만 깨끗하게 치워둬. 누가 밟고 다치면 안 되니까.”

    내가 간단하게 정리해주자 거울을 떨어뜨린 하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또다.

    ‘이 악녀가 왜 이러지?’ 식의 반응.

    “내 머리는? 다 된 거지?”

    내가 머리를 땋아주던 하녀에게 물었다.

    “네, 대공녀님. 끝나셨어요.”

    “그럼 쟤 좀 일으켜줘. 부탁할게. 쟤 이마가 땅에 닿겠다.”

    내가 머리를 땋아준 하녀에게 거울을 떨어뜨린 하녀를 부탁했다.

    머리를 땋아준 하녀가 무릎 꿇었던 하녀를 일으켰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르나르가 보고 싶어졌다.

    이곳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르나르이기 때문인 걸까?

    조잘조잘 방금 일어난 일을 얘기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이곳에서 나를 가장 잘 아는 르나르에게.

    “황자님께선? 황자님께선 어디 계셔?”

    방 밖으로 나간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우연히 마주친 하인에게 르나르 위치를 물은 것이었다.

    하인 현관 쪽을 일러줬다.

    현관에 가보니 르나르는 정말 그곳에 있었다.

    그런데 그는 방금 저택 안으로 들어온 누군가와 함께였다.

    그 누군가가 고개를 들었다.

    낯설지 않은 연한 하늘색 눈동자와 내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오… 올렌도…?’

    깨진 거울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

    “엘로즈 코웰 대공녀 말이야.”

    르나르가 응접실 문을 닫는데 올렌도가 대뜸 말했다.

    올렌도를 등진 르나르의 미간이 단번에 좁아졌다.

    단지 엘로즈의 이름이 불리는 걸 들었을 뿐인데, 오장육부가 뒤틀리듯 불편해졌다.

    ‘올렌도가 아닌 다른 남자가 엘로즈를 불러도 이렇게 기분이 나쁠까?’

    아마 그럴 것 같았다.

    하지만 올렌도가 엘로즈를 부르는 것은 더욱 싫었다.

    올렌도가 엘로즈의 진짜 예비 약혼자이기 때문이었다.

    르나르가 조용히 숨을 내쉬고 뒤돌았다.

    르나르는 다시 응접실에 들어서기 전처럼 무표정해진 상태였다.

    가면을 쓴 그가 평소 올렌도를 대할 때의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공녀님에 대해 무슨 할 말 있으십니까?”

    “왜 내 취향인 거지?”

    이번에 르나르 표정은 숨길 수 없을 정도로 구겨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