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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26화 (26/100)

26화

얼굴

올렌도가 굳은 나를 당겨 안았다.

정신 차린 내가 그를 밀어냈지만, 올렌도는 반쯤 밀리다 말고 다시 날 힘주어 안았다.

그가 품 안의 날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놓칠 뻔했잖아. 그렇게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으니 내가 알아볼 수가 있었겠어?”

무슨 말인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올렌도는 날 모를 텐데….’

그때, 허리를 숙인 올렌도가 내 귓가에다 대고 속삭였다.

“좀 맞춰줘요.”

설마.

“그래도 놓치지 않았으니 다행이지. 하마터면 아예 알아보지 못했을 뻔했어. 반나절이나 못 봤더니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는데 말이야.”

당황스러웠다.

이런 인물이 진정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인 건가 싶었기 때문이었다.

‘신분을 속이고 연인을 만드는 것도 모자라 그 연인과 헤어지기 위해 막무가내로 애인 행세를 시키는 주인공이라니….’

캐스티나를 만나 사랑에 빠지기 전까지 올렌도가 바람둥이, 망나니 생활을 하며 살았던 것은 원작을 통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의 올렌도는 원작에 자세히 적혀 있지가 않아, 이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었다.

“왜 대답이 없어? 아. 에머리를 직접 본 건 처음이라 자기도 놀랐겠구나? 인사해, 이쪽은 내 ‘전’ ‘자기’였던 에머리.”

이내 날 옆에 세운 올렌도가 내 어깨에 자연스럽게 손을 둘렀다.

황자인 것도 숨기고 다니면서 대체 뭘 믿고 이렇게 거침없이 행동하는 걸까?

그 순간, 올렌도가 날 내려다봤다.

르나르와 닮지 않은 듯 묘하게 닮은 얼굴로 그가 싱긋 웃었다.

‘얼굴.’

나는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에 대충 답을 찾게 됐다.

많은 여자를 만나며 버릇이 잘못 든 모양이었다.

그때, 올렌도가 내 어깨를 꽉 쥐었다.

내가 동조해주지 않자 초조해진 모양새였다.

나는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지금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지.

물론 올렌도의 얼굴에 홀려 가짜 연인 놀이에 동참해주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런 건 내 앞의 영애에게도 실례되는 일일 걸로 생각됐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지금 저택 밖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란 것이었다.

법으로 정해진 건 아니었지만, 암묵적으로 그랬다.

물론 지금의 올렌도는 내가 엘로즈 코웰인 걸 몰랐다.

하지만 평생 모를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그에게 나에 대한 빚을 지워야 했다.

후에 이용할 수 있도록.

“네…… 뭐…….”

그렇게 말했을 뿐이었지만 올렌도는 이제 됐다는 듯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그러곤 상황을 제멋대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에머리, 이 사람이 그 사람이야. 내가 정말 사랑하게 되었다는 그 사람.”

‘…….’

“이 사람을 만나고, 나는 내 세상이 뒤집혀 버리는 걸 느꼈어.”

‘……얼씨구?’

“이건 널 만났을 땐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야. 정말 미안해, 에머리. 우린 인연이 아니었나 봐.”

‘입에 침이나 바르고….’

“남작님, 아무리 그러시다고 해도 어떻게 제게…! 어떻게 제게…! 분명 저만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하셨잖아요…!!”

“내가 그랬던가?”

“남작님!!”

“잊어버려. 실수였어.”

보면 볼수록 올렌도는 재활용이 불가능해 보였다.

캐스티나는 이런 올렌도를 어떻게 갱생시키는 걸까?

올렌도가 영애에게 집중하는 사이, 내가 내 어깨를 감싼 올렌도의 손을 은근슬쩍 내 어깨에서 치웠다.

올렌도가 그런 날 내려다봤다.

‘왜?’ 하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나는 영애 대신 올렌도 뺨이라도 날려주고 싶은 심정인데…. 올렌도는 그런 내 감정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내가 그의 손길을 거부한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남작님께선 정말… 너무 하십니다….”

영애의 큰 눈에 이내 눈물이 고였다.

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올렌도는 일말의 가책도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 이런 남자랑은 이렇게라도 끝내는 게 저 영애에게도 낫겠다.’

“맞아. 내가 생각해도 난 좀 너무해. 그러니 에머리는 이런 나는 잊고 나보다 좋은 사람 만나도록 해.”

“저는 남작님보다 백배, 아니, 천 배는 더 좋은 사람을 만날 겁니다…!”

“응원하도록 하지.”

올렌도의 응원을 받은 영애가 굵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악에 받친 듯 씩씩거리더니 이내 돌아섰다.

내 뺨이라도 한 대 때리면 맞아주려 그랬는데 나를 보곤 그저 눈물지을 뿐이었다.

착한 영애였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나는 올렌도에 대한 악감정이 자라난 것을 더는 감출 수가 없게 됐다.

“영애가 안쓰럽습니다.”

멀어지는 영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내가 말했다.

“응?”

올렌도가 친근하게 반문했다.

“말을 좀 높여주시겠어요? 듣기 불편합니다.”

“아….”

서늘해진 내 눈빛에 민망했던지 올렌도가 멋쩍게 웃었다.

그가 같잖은 변명을 했다.

“저 영애가 끈질겨서요. 이별하려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내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덧붙이는 말이 더 가관이었다.

“그런데 영애는 어느 가문 누구시죠? 이 넓은 제국에서 영애만큼 제 취향인 얼굴은 본 적이 없었는데.”

‘……?’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설마 재활용 불가능한 원작의 남자 주인공이 내게 지금 작업을 걸고 있는 걸까?

히이이잉-!

르나르의 흑마도 화가 난 듯 울음소리를 냈다.

올렌도의 시선이 무심코 흑마 쪽을 향했다.

그런데 웃던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저 말…….”

올렌도가 르나르의 흑마를 알았던 모양이었다.

“당신. 엘로즈 코웰이군요.”

올렌도가 일순 사나워진 눈빛으로 나를 봤다.

방금까지 유혹하듯 웃던 모습은 더는 그에게 남아 있지 않았다.

“누구신데 절 아시는 거죠?”

내가 시치미를 뚝 떼고 물었다.

올렌도는 내가 그의 얼굴을 모르는 게 정상인 상황인 걸 잠시 잊은 듯했다.

그래서 나는 알려줬다.

지금은 올렌도가 진짜 황자인 걸 내가 알고 있는 게 내게 득 될 것이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맞는 판단이었는지 올렌도가 잠시 침묵했다.

그의 머릿속이 팽팽 돌아가는 것이 내 눈에도 보이는 것만 같았다.

이내 입을 연 올렌도는 태연자약한 얼굴로 거짓말을 했다.

“저는 올렌도 전하의 호위기사 르나르라고 합니다. 황자님 말을 보고 대공녀님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곳에서 대공녀님을 만나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상상도 못 했지만 말입니다.”

올렌도가 나를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그의 시선이 내 어깨너머로 잠시 향했다.

그가 이내 날씨를 묻는 듯 가벼운 말투로 내게 물었다.

“방금 나오신 상점이 남자 물건을 파는 매장 같은데요? 전하께 드릴 선물이라도 사신 겁니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유도 심문이었다.

대답을 피하는 게 좋아 보였다.

“그쪽이 전하의 호위기사라는 걸 제가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절 알아보신 건 용하지만 그쪽의 신분을 믿을 수 없으니, 함부로 대답하진 못하겠습니다.”

“저는 얼굴이 곧 신분증이자 보증…, 이봐, 잠깐만?”

올렌도가 말하는 사이 내가 흑마 위에 올라탔다.

어차피 진짜 황자인 걸 모르는 상황이니 내 쪽에서 빠르게 대화를 끝내도 무방하겠단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말을 타기엔 좁은 골목이었지만 올렌도에게서 서둘러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잠시만요, 혹시 이런 외출이 잦으셨나요?!”

올렌도가 내 앞을 막아서려 시도하며 물었다.

진실을 말하면 진실대로 문제가 될 것이었고, 거짓을 말하면 후에 들킬 수 있는 것이 문제였다.

나는 올렌도를 무시하고 흑마를 출발시켰다.

뿌옇게 일어난 흙먼지 사이로 올렌도가 작은 점이 되어 멀어졌다.

*

엘로즈가 떠난 자리에 흙먼지가 뿌옇게 일었다.

올렌도가 한 손으로 입을 막고 다른 손으로 공기 중을 휘저었다.

잔기침이 멎고 흙먼지가 가라앉았을 땐 엘로즈는 이미 자취를 감춘 다음이었다.

“대공녀였어?”

올렌도가 혼잣말을 했다.

여전히 엘로즈가 사라진 방향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올렌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웬일로 내 취향이구나 했는데…, 하필.”

올렌도가 혀끝으로 쯧 하는 소리를 냈다.

다음 순간, 올렌도는 엘로즈가 나온 상점을 응시했다.

상점 쪽과 엘로즈가 사라진 쪽을 번갈아 보던 올렌도는 상점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바탕 소란이 멎은 시장 뒷골목은 다시 조용했고 평화로웠다.

*

“어, 대공녀님? 빨리 오셨네요?”

“더글라스, 황자 전하는…? 전하께선 지금 어디 계시죠?”

황자의 저택에 돌아가자마자 내가 르나르를 찾았다.

르나르는 현관 밖에 없었다.

내가 평소보다 빨리 돌아오긴 했지만.

“아, 전하께선 급한 일이 생기셔서 방금 외출하셨습니다. 조금 전에 나가셨으니 아마 꽤 늦으실 겁니다. 먼저 저녁 차려드릴까요?”

“언제 돌아오시는지는 전혀 모르고요?”

“글쎄요, 갑자기 나가시게 된 거라 정확한 귀가 시간은 저도 잘….”

더글라스의 대답은 절망적이었다.

나는 빨리 르나르를 만나야 했다.

사실 르나르를 만난다고 달라질 건 없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도 최대한 빨리 말해주고 싶었다.

오늘 내가 길에서 황자를 우연히 만났다고.

내가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걸 그 황자가 봤다고.

모르고 있는 것보단 알고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알아야 올렌도가 악한 의도로 유도 심문을 해도 넘어가지 않을 것이었으니.

‘혹시 올렌도가 르나르를 불러낸 건 아닐까?’

“더글라스, 황자님 외출 사유가 뭔가요?”

내가 더글라스에게 물었다.

하지만 더글라스는 알려주기 곤란하다는 듯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뭐… 워낙 여기저기 다니시는 분이라……. 무슨 일 있으신 건가요, 대공녀님? 많이 급한 일이신가요?”

“급한 일이면 방법이 있을까요?”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여름 색이 짙어진 공기가 유난히 답답하게 느껴졌다.

“황자님께선 도착하셨나요?”

“아직이십니다.”

“황자님께서 돌아오셨나요?”

“아뇨, 대공녀님. 도, 황자님께선 아직….”

“더글라스?”

“황자님께선 오늘 아무래도 많이 늦으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이만 먼저 잠자리에 드시는 게 어떠실까요?”

맑은 달빛이 저택을 물들일 때까지 내가 현관 근처를 떠나지 못하자, 더글라스가 내게 넌지시 제안했다.

하지만 나는 어차피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올렌도에게 불려 간 것일까 봐 르나르가 걱정이 되어….

“대공녀님?”

“제가 여기 있는 게 신경이 쓰이는 거면 제가 황자님 방에 가서 기다릴게요.”

나는 결국 르나르의 침실에 연결된 작은 응접실에서 르나르를 기다리기로 했다.

시계가 자정을 가리켰다.

하지만 르나르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한 시쯤 되자 잠이 쏟아졌다.

온종일 신경을 곤두세운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모양이었다.

소파 팔걸이에 기대어진 쿠션에 슬쩍 머리를 대니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그 후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내 얼굴을 간지럽히는 머리칼을 누군가 귀 뒤로 넘겨주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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