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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25화 (25/100)
  • 25화

    시장

    히이이잉—

    길고양이가 지나가자 르나르의 흑마가 울음소리를 냈다.

    “워워.”

    르나르가 흑마를 진정시키기 위해 고삐를 당겼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나와 몸이 닿지 않아 나는 괜히 르나르 눈치를 살피게 됐다.

    ‘내게 서운한 것일까…?’

    어젯밤 나를 보던 그의 일렁이던 눈동자가 떠올랐다.

    어젯밤, 나는 조금 과하게 르나르에게 선을 그었다.

    나로선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데, 그런 가정을 르나르가 하는 것 자체가 내겐 위협으로 느껴졌었다.

    게다가 원작 어디에도 엘로즈 코웰이 마녀라는 이야기는 없었다,

    그러니 르나르에게 인정할 사실 같은 건 어차피 처음부터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미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가 마녀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내가 해볼 시도조차 하지 않았기에, 르나르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 그에게도 보인 것 같았다.

    다행히 르나르는 그런 내 태도를 문제 삼지 않았다.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를 대하는 태도가 평소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신경 쓰지 않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건 르나르가 내게 사과를 건넨 다음이었다.

    “어젯밤엔…. 죄송했습니다. 제가 괜히 대공녀님을 몰아붙여서. 대공녀님께서 마녀이신 것도 아닌데.”

    르나르가 내게 사과를 건넨 건 저택 근처에 도착한 뒤, 흑마에서 날 내려주고 난 다음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여전히 어젯밤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

    르나르가 미안한 표정을 걸고 말을 이었다.

    “제가 마법사이니 대공녀님께서도 마녀였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들었었습니다. 그런데 아니라는 것 알겠으니 어젯밤 일은 잊어주세요. 모두 제 실수였습니다.”

    그런데 그 미안한 표정이 어쩐지 연기하는 얼굴처럼 보였다.

    나는 르나르가 내게 져주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정말 마녀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사과한 것이 아니라, 그저 내 기분을 살피고 있다고.

    오로지 내가 부정했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내가 혼란스러워하는데,

    “오늘은 언제 돌아오실 겁니까?”

    르나르가 화제를 바꾸려는 듯 내게 물었다.

    “글쎄요. 평소처럼…, 해질 때쯤 돌아가려고 했어요.”

    “더 빨리 돌아오시면 안 되겠죠?”

    “더 빨리요?”

    “…아닙니다.”

    르나르가 어색하게 싱긋 웃었다.

    그러곤 별안간 한 톤 높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대공녀님께서 집에 가시는 게 좋습니다. 대공녀님께서는 집에 다녀오시면…, 훨씬 밝아지시니까요. 저는 그 모습을 보는 게 좋습니다. 그거면 됐습니다.”

    그 말이 꼭 스스로에게 하는 말 같았다.

    나를 두고 떠나는 르나르 뒷모습이 어쩐지 눈에 밟혔다.

    맑은 오전 햇살이 바싹 마른 종이 냄새와 뒤섞여 코웰 저택 서재를 떠돌았다.

    나는 읽는 책에 집중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내가 집에 오는 걸…, 그렇게 대놓고 좋아했나…?’

    그 정도였는 줄은 몰랐었다.

    스스로를 설득시키는 듯하던 르나르 모습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런데 그때,

    “로즈, 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온종일?”

    겔리온이 더는 모른 척 못 하겠단 표정으로 읽던 책에서 눈을 떼고 내게 물었다.

    여기서도 티가 난 모양이었다.

    몰랐었다.

    나는 그동안 알고 있던 것보다 꽤 티가 많이 나는 사람이었다.

    “겔리온. 겔리온은 살면서 누군가한테 져준 적 있어?”

    마침 내 고민이 궁금하다는 겔리온에게 내가 물었다.

    겔리온이 뭘 그런 걸 묻느냐는 표정을 했다.

    “당연하지. 너한테 맨날 져주잖아.”

    “겔리온이 나한테?”

    “응, 너한테. 네가 황자의 저택에 가고 싶다고 거짓말했을 때도 난 너한테 져줬었고.”

    겔리온이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거짓말?

    그때 나한테 모두 속은 게 아니었었나?

    “거짓말이라니? 나는 그때 내가 가고 싶어 황자님 저택에 간 거였잖아.”

    “정말 그랬다고? 근데 이렇게 집에 올 기회가 생기니까 매일 온다고?”

    “…….”

    듣고 보니 그랬다.

    거짓말할 땐 나름 철저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철저함을 이어갈 수 있는 재능이 내겐 없는 모양이었다.

    “또 속일 생각이 혹시라도 있으면 시도도 하지 마. 네가 황자의 저택보다 이 집을 좋아하는 건 무척 분명해 보이니까.”

    그렇구나.

    그거 그렇게 분명하게 티가 나는 거였구나.

    “그럼…, 섭섭할 수도 있을까…? 내가 이렇게 집을 좋아하는 거….”

    “섭섭? 누가…? 설마 황자가?!”

    별안간 겔리온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내가 그런 질문을 한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응.”

    “대답해주기 싫은데.”

    “응?”

    “대답 안 해줄 거야. 갑자기 말해 주기 싫어졌어.”

    “뭐, 뭐야….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

    그 뒤 나는 겔리온을 뚫어지게 봤고 겔리온은 그런 내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한참 어린 여동생에게 툴툴댄 것이 신경 쓰인 건지 겔리온은 잠시 후 깊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섭섭하겠지. 황자가 널 좋아한다면.”

    날 좋아한다면?

    ‘그렇다면…, 르나르는 섭섭하지는 않겠네…?’

    “그러니 섭섭할 테지.”

    “……?”

    “상대가 너인데 안 좋아할 수는 없을 테니까.”

    얼토당토않은 설명이었다.

    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아무리 내 오빠라고 해도 이 정도로 팔불출인 게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비록 겔리온은 해가 동쪽에서 뜬 다음 서쪽으로 진다는 얘기를 했다는 듯 무미건조한 표정이었지만.

    겔리온이 무심히 말을 이었다.

    “너만 많이 안 좋아하면 돼. 황자가 너를 좋아하는 것보다, 너는 황자를 안 좋아하면 돼. 그럼 나도…, 네가 황자에게 아주 마음이 없진 않다고 해도 이해하려고 노력해볼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나를 보는 겔리온의 눈빛이 의미심장했다.

    “그냥 대충 이해해둬. 너는 네 감정에 무뎌서 어차피 지금 당장 내가 걱정해야 할 일은 없을 것 같긴 하지만.”

    알아듣기 쉽게 얘기해보라고 채근하기도 전에 겔리온이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를 빠져나갔다.

    내 곁에 조금이라도 더 머물려 하는 평소와 달랐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후에도 르나르는 자꾸만 내 머릿속을 계속 걸어 다녔다.

    그에게 미안한 감정이 생긴 게 내 마음에 짐이 된 모양이었다.

    나는 결국 오늘은 조금 일찍 움직이기로 했다.

    내가 이른 정오부터 코웰 저택을 떠나려 하자, 놀란 에반이 내게 달려왔다.

    “어디가, 로즈! 해가 아직 하늘 꼭대기에 있어…!”

    “미안해, 에반. 오늘은 돌아가기 전에 들를 곳이 있어 일찍 나가보려고.”

    “거기가 어딘데?! 나도 같이 가!”

    “그건 안 돼.”

    에반과 내 대화가 수상했던지 미르엣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로즈, 너 지금 이상한데? 혹시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아무 일도 없어.”

    무슨 일이 있는 건 정말 아니었다.

    그저 내가 르나르를 신경 쓰고 있을 뿐.

    “이런 날도 있어야지. 황자님께서 나를 배려해 매일 집에 보내주시는데. 가끔이라도 이렇게 예의를 갖춰야 하지 않겠어?”

    미르엣과 에반을 가까스로 안심시킨 내가, 르나르가 날 위해 두고 간 흑마를 데리고 코웰 저택을 나섰다.

    황자의 저택으로 돌아가기 전, 나는 시장에 들러볼 생각이었다.

    한낮의 시장은 사람이 많고 북적였다.

    황토색 벽돌 건물과 오래된 나무 가판대 사이로 상인들의 볼륨 높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늘 들어온 싱싱한 채소입니다, 아가씨!”

    “아가씨, 이 모자가 참 잘 어울리시겠네요! 이리 오셔서 한 번 써보지 않으시겠어요?!”

    상인들이 연이어 내게 말을 붙였다.

    하지만 나는 가판대 구경에 시간을 쏟지는 않았다.

    내가 오늘 이 시장에 온 이유는 명확했다.

    “남자 손수건을 찾고 있는데. 괜찮은 물건 있을까요?”

    시장 안쪽, 나름 고급스러운 물건들만 파는 뒷골목 상점에 들어가, 내가 주인장에게 물었다.

    주인장은 나를 한 번 쓱 훑더니 매장에서 진열이 가장 잘된 곳으로 나를 데려갔다.

    얼굴을 가리기 위해 로브를 쓰고 있었음에도 행색에서 귀족 티가 어느 정도 난 모양이었다.

    황자의 예비 약혼녀가 밖을 나돌아다닌단 소문을 막으려고 일부러 자주 가는 보던트 귀족 상점 거리가 아닌 시장으로 온 것인데도.

    ‘뭐…. 귀족인 건 알아도 내가 엘코웰 대공녀란 사실은 모를 테니까.’

    나는 주인장의 태도에 크게 신경을 쓰진 않기로 했다.

    “비단으로 유명한 쿠웨이 제국에서 수입된 제품입니다. 바로 어제 도착한 따끈따끈한 신상품이죠.”

    주인장이 내게 내민 것은 남색 비단에 은색 실로 수가 놓인 손수건이었다.

    그 손수건을 보니 내가 황자의 저택에 들어가게 된 첫날 나를 맞이한 르나르가 입고 있던 남색 제복이 떠올랐다.

    ‘은색 실이 수놓아진 남색 제복.’

    그 제복이 르나르에게 무척 잘 어울렸었기 때문에, 이 손수건도 르나르한테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걸로 주세요.”

    “탁월한 안목이십니다. 그럼 바로 포장해드리겠습니다.”

    주인장이 능숙한 솜씨로 손수건을 포장하기 시작했다.

    신경을 써주는 것인지, 손수건을 상자에 담기 전에 그 위로 향수도 뿌렸다.

    “애인에게 선물하는 손수건인가 봐요?”

    그렇게 생각해 향수를 뿌린 것이었을까?

    “아뇨. 애인은 무슨….”

    “애인이 아니라고요? 그럼…, 좋아하는 분?”

    좋아하는?

    내가 르나르를?

    “어이구, 제가 말이 많았네요.”

    내 얼굴에 계속 표정이 없자 눈치를 본 주인장이 알아서 입을 다물었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좋은 하루 보내세요!”

    그래도 주인장은 단순했다.

    조금 비싸게 부른 듯한 그 손수건 값을 내가 별말 없이 치르자, 금세 기분이 좋아진 것이었다.

    주인장은 매우 활기차고 우렁찬 목소리로 날 배웅했다.

    이윤이 많이 남은 모양이었다.

    뭐, 상관없지만.

    상점 앞에 묶어둔 흑마를 푸는 내 심경은 다소 복잡한 상태였다.

    「좋아하는 분이십니까?」

    상점 주인이 내게 물은 질문이 떠올랐다.

    괜히 선물을 줬다가 르나르에게 오해를 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선물을 주고 싶다는 게 참 이상했다.

    그런 오해를 받게 될지언정, 나는 내가 준 손수건을 르나르가 사용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이걸 받고 르나르의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그때,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평화로운 시장 골목을 뒤흔들었다.

    “남작님!! 제게 어떻게 이러실 수 있으세요!! 저한테 거짓말을 하신 것이지요!!!!”

    히이이잉—

    놀란 흑마가 몸부림을 쳐 내가 흑마를 달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리니 씩씩거리며 소리치는 영애가 보였다.

    영애 앞엔 어떤 남자가 내게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

    연분홍색 머리칼의 남자였다.

    “아니, 에머리. 나는 그런 게 아니고….”

    “다른 사랑하는 이가 생겨 떠나는 거라 하셨잖아요!! 이곳에도 그 사랑하는 이를 만나러 오는 거라 하셨고요!! 그런데 지금 남작님을 보세요!! 남작님은 지금 혼자이십니다!!!!”

    흔한 연인 간의 싸움이었다.

    아마 남자가 영애와 헤어지고 싶은데 그냥 헤어지기가 어려워 사랑하는 이가 생겼단 거짓말을 한 모양이었다.

    변한 마음도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남자였다.

    그럼에도 남자에게 속은 게 퍽 억울했는지, 영애가 커다란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고 계속 악다구니를 썼다.

    “대체 어떻게 제게 이러실 수 있으세요!! 제가 남작님을 얼마나 사랑했는데요!!”

    조금 안쓰럽긴 했지만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골목 밖으로 나가려면 남자와 영애 옆을 지나쳐야 했다.

    어쩔 수 없겠다 싶었던 로브 모자를 더욱 깊이 눌러쓰고 조용히 흑마를 끌었다.

    그런데 무사히 그들 옆을 지나치던, 바로 그 순간.

    “이런! 한참 찾았잖아!”

    휘청,

    내 몸이 움직였다.

    남자가 나를 당겼단 사실을 깨달은 건 이미 남자에게 반쯤 안긴 다음이었다.

    내가 남자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나는 너무 놀라 그대로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표지에서 본 그 얼굴….’

    복사꽃 색 연분홍 머리.

    터넛 황제를 빼다박은 연한 하늘색 눈동자.

    살짝 올라간 눈꼬리.

    고양이 같은 인상.

    ‘오, 올렌도….’

    내 진짜 예비 약혼자,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

    올렌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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