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이리아네크 행성
지는 해를 따라 나무들의 그림자가 길어졌다.
날 태운 마차가 황자의 저택 진입로로 들어섰다.
르나르는 나와 약속한 이후 발코니에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현관 밖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셨습니까, 대공녀님? 아, 저는…, 마침 산책가는 길이었습니다.”
“어제, 엊그제에 이어 오늘도요…?”
내가 어이없어하며 바라보면 능글맞게 웃으며 무엇이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하는 르나르였다.
나는 굳이 이 문제를 심각하게 짚진 않기로 했다.
발코니에 오래 나가 있지 않겠단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르나르의 모든 행동을 내 임의로 제약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황자의 저택으로 돌아왔는데 르나르가 보이지 않았다.
지난 일주일 내내 마중 나오던 사람이 보이지 않자 기분이 이상했다.
나도 모르게 그의 마중에 길들여져 있던 걸까?
나는 잠시 방에 들렀다가 곧바로 식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르나르는 식당에도 없었다.
식당엔 오직 내 몫의 식사만이 차려져 있었다.
“전하께서는?”
내 시중을 위해 대기 중이던 하녀에게 물었다.
하녀가 고개를 조아렸다.
“화, 황자 전하께서는 오늘 몸이 아프셔서…. 황자 전하 식사는 준비하지 말라고 집사님께서 저희에게 전달하셨습니다.”
“전하께서 아프시다고? 아프시다면 더더욱 식사하셔야 하는 게 아닌가?”
“그것까진 저는 잘….”
“전하께서 어디가 아프신데?”
“그것도 저는 잘….”
“주치의는? 주치의는 뭐라고 진단했는데.”
“전하께선 주치의를 만나지 않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
“전하가 아프시다는 것도 저희는 집사님을 통해 전해 들었을 뿐이라…. 자세한 것은 모르겠습니다.”
“알겠어. 고마워.”
만족스러운 대답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그럼에도 고맙다고 하니, 하녀가 움찔했다.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으나 크게 신경 쓰진 않기로 했다.
지금은 그것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게 있었으니.
‘르나르가 아프다니….’
르나르가 아프다고 한다.
너른 등판을 칼날이 가로질러도 멀쩡히 이겨내던 르나르가.
그 르나르가 아프다고 한다.
‘대체 어디가 얼마나 아프면…. 더글라스가 르나르 식사도 준비하지 말라고 한 거지…?’
나는 오랜만에 혼자 식사를 하게 됐다.
한동안 르나르와 함께 저녁을 먹었던 탓인지 현실 세계 시절부터 익숙한 혼자만의 식사가 어쩐지 어색했다.
“더글라스?”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향하던 길, 나는 복도에서 우연히 더글라스를 마주쳤다.
막 로브 모자를 뒤집어쓰려던 더글라스는 헐레벌떡 어딘가로 향하는 중이었다.
“아, 대공녀님.”
“황자 전하께서 아프시다면서요.”
“아, 네. 뭐… 그렇습니다.”
“어디가 어떻게 아프신 건데요?”
“음…, 그게 그러니까….”
“전하께서 주치의도 만나지 않으셨다면서요?”
“아, 네. 그게 그러니까….”
더글라스가 말을 흐렸다.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는 것을 보니 내게 털어놓기 어려운 내용인 걸까?
근데 더글라스가 그다음 뱉은 말은 어쩐지 나를 화나게 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황자님께선 강하시니까요.”
“…….”
“대공…녀님…?”
나는 더글라스가 눈치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자객 사건 때 화난 내 기색을 감지해 주치의를 데리고 사라질 땐 분명 눈치가 빨라 보였다.
하지만 그런 더글라스는, 그가 르나르한테 무관심한 걸 내가 싫어한다는 건 전혀 눈치채지 못한 걸까?
르나르의 악몽에 대해 알게 된 첫날 그에게 충분히 티를 낸 줄 알았었는데?
그때, 더글라스가 별안간 양손으로 내 어깨를 꽉 잡았다.
“황자님께선 이겨내실 겁니다.”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더글라스는 마치 나와 그가 같은 편이라는 듯, 날 똑바로 보며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갑자기 손을 뗐다.
내게서 떨어진 그는 무언가 불현듯 깨달은 표정이었다.
“대공녀님, 방금 일은 황자님께 비밀로 해주시겠어요? 황자님께서 은근 질투가 많으셔서…. 그럼 저는 이만. 황자님께서 시키신 일 때문에 바빠서.”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인 더글라스가 내가 온 방향을 향해 뛰듯 걷는 빠른 걸음으로 경망스럽게 사라졌다.
그가 내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하지 않았단 걸 깨달은 건 그가 사라진 다음이었다.
나는 내가 직접 르나르에게 가보기로 했다.
대체 어디가 어떻게 아프다는 건지 내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똑똑똑—
문을 두드렸다.
답이 없었다.
똑-똑- 똑-똑—
좀 더 크게 여러 번 두드렸다.
하지만 여전히 답은 없었다.
답답했던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황자…님…?”
르나르의 침실은 평소보다 어두운 상태였다.
왜 이렇게 어둡나 싶어 둘러보니, 두꺼운 커튼 여러 겹이 창문을 층층이 가리고 있는 게 보였다.
방 안 깊숙이 들어섰다.
“르나…르…?”
그를 부르자 대답 대신 쌕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니, 침대 이불이 쌕쌕거리는 소리에 맞춰 위아래로 오르내리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르나르가 보였다.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는 그의 이마를 짚어보니, 이마가 달아오른 쇳덩이처럼 뜨거웠다.
“저, 정말 많이 아프군요. 당장 주치의를….’
내가 급하게 뒤 도는데, 뜨거운 손이 나를 붙잡았다.
그리고 내 손목을 잡은 그 손은 강한 힘으로 나를 잡아당겼다.
뜨겁게 닿는 숨에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르나르에게 포박당한 상태였다.
그의 온몸이 불덩이였다.
“어디 가시려고요….”
거칠게 목울대를 긁은 그의 속삭임이 내 귓속에 닿았다.
르나르가 쿨럭대며 머리를 숙였다.
어깨에 쏟아지는 숨결이 뜨거웠다.
“주치의를 데려올게요. 당장 진찰을 받아봐야….”
“안 됩니다.”
“안 된다고요? 몸이 이렇게나 뜨거운데요?”
“…안 됩니다.”
“왜 그런 고집을….”
르나르는 대답이 없었다.
대답 대신 그는 내 어깨와 옆 목에 자신의 머리칼을 비벼대기 시작했다.
꼭 날 반기는 강아지 러블린 같았다.
“예의 없는 행동인 거 알지만…, 시원하네요……. 대공녀님을 안고 오히려 시원해질 줄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말하는 르나르의 목소리가 조금 차분해졌다.
날 부수어버릴 듯 안고 있던 팔에서도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잠시 후 르나르는 아예 말이 없어졌다.
“르나…르…?”
“…….”
“설마 지금 잠든 거예요?”
난감해하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내 시야에 젖은 수건이 들어왔다.
침대 옆 협탁 위에 버려진 듯 놓여있는 그 수건은 물이 담긴 은색 세숫대야와 함께였다.
“르나르, 잠시만 팔 좀 치워줄래요…? 열 내릴 수 있게 도와줄게요.”
“…….”
“휴…….”
나는 여전히 대답 없는 르나르의 팔을 조심스레 치우고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침대 아래로 발을 내딛고 젖은 수건을 들어 올리니 들자마자 수건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르나르가 아픈 몸으로 혼자 해보려다 물도 제대로 짜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것도 못 할 정도로 아프면서 주치의는 왜 못 부르게 하는 건지….’
그래도 더글라스가 세숫대야 물을 갈아놓고 나간 건지 대야 속 물이 시원했다.
나는 물속에 담갔다 꺼낸 수건을 힘껏 비틀었다.
주르륵—
시원한 물줄기가 수건에서 쏟아져 나왔다.
나는 물기를 뺀 찬 수건으로 르나르를 닦아주기 시작했다.
이마도 닦고, 얼굴도 닦고, 목도 닦고.
르나르가 너무 뜨거워 곧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이대로 달려 나가 주치의를 데려올까 하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됐다.
‘어차피 르나르는 지금 이 몸 상태론 날 못 쫓아올 것 같으니….’
그때, 르나르가 여전히 뜨거운 손으로 내 수건 쥔 손을 붙잡았다.
뜨거워 깜짝 놀라 보니 르나르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를 보고 있었다.
“하지 마십시오.”
그가 하도 진지해 내가 뭘 잘못한 건가 싶었다.
“왜요? 제가 많이 불편하게 했어요? 너무 세게 닦았나요?”
그러자 르나르가 잠시 날 멍하니 보다 피식 웃었다.
“세게라뇨. 하도 약하셔서 닿은 줄도 이제 알았습니다. 대공녀님 손은 이런 일 하시기엔…, 귀한 손이라서 그럽니다.”
그의 예상치 못한 말에 나는 갑자기 말문이 막혀버렸다.
‘귀한 손.’
대공녀인 내 손은 귀한데 마땅한 신분이 없는 자신의 몸은 귀하지 않다는 건지 뭔지.
자객의 칼을 맞고 내 위로 쓰러지던 르나르가 지금의 르나르 위로 겹쳐 보였다.
자신의 몸을 귀하게 여길 줄 모르던 그때의 르나르가.
“쓸데없는 소리 하려거든 다 낫고 하세요.”
내가 내 손을 잡은 르나르 손을 아프지 않게 찰싹 때렸다.
그리고 다시 그를 닦기 시작했다.
르나르가 그런 나를 잠잠한 눈길로 바라봤다.
“대공녀님께서는 참…, 알 수 없는 분이십니다….”
이내 르나르는 조용해졌다.
또다시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의 셔츠를 벗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몸을 닦아줘야 했으니까.
‘하지만 어두워서…. 단추가 어딨는지도 모르겠어….’
“잠시만요, 르나르. 커튼 좀 걷을게요. 너무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여서….”
내가 협탁 위에 다시 수건을 놓고 침대를 벗어났다.
그때, 막 깨어난 르나르가 다급하게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 대공녀님? 잠시만요…!”
촥—
그가 날 부른 것과 내가 커튼을 연 것은 거의 동시였다.
날 부른 그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음을 느낀 내가 다급하게 뒤돌았다.
르나르와 나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부딪혔다.
열기로 흐린 그의 적갈색 눈동자가 천천히 내 어깨너머로 움직였다.
그의 시선이 한 곳에 고정됐다.
내 시선이 그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짙은 밤하늘을 무대 삼아 제 밝음을 마음껏 뽐내고 있는 청록색 행성이 보였다.
‘이리아네크 행성….’
마법사들의 마력과 공명하는 행성, 이리아네크였다.
‘왜 저렇게 크지? 이리아네크가 지구에 가장 가까워지는 것이…. 오늘이었구나…!’
상황을 파악한 내가 크게 당황해 르나르를 봤다.
창문으로 쏟아진 이리아네크 행성 빛이 르나르를 에메랄드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나 또한 르나르처럼 이리아네크 행성 빛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마법사인 르나르와 평범한 인간인 나의 그 행성에 대한 반응은 다를 것이었다.
르나르가 서둘러 입을 막았다.
쿨럭—
그의 손 틈새로 붉은 액체가 흘러나왔다.
협탁 위 수건을 집어 대충 피를 닦던 르나르가 침대 위로 고꾸라졌다.
“르나르!!!”
정신을 차린 내가 급하게 커튼을 닫고 르나르에게 달려갔다.
르나르가 쓰러진 채 손을 들어 나에게 오지 말란 표시를 했다.
쏟은 피가 내게 묻지 않길 바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르나르를 무시하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내가 어깨를 잡는 순간 르나르가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크게 숨을 들이마신 그의 적갈색 눈동자에 혼란이 담겼다.
다음 순간, 르나르가 나를 당겨 안았다.
그의 손에 붙잡힌 내 허리가 활처럼 휘어졌다.
날 안은 르나르는 내가 이 방에 들어왔던 때보다 뜨거워진 상태였다.
하지만 나를 안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서서히 이전의 온도를 되찾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