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중독
더글라스가 보기에 르나르는 중독이었다.
엘로즈 코웰 중독.
르나르 본인은 엘로즈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데, 단지 꼬시기 위할 뿐이고 그녀의 몸이 필요한 것일 뿐이라는데, 더글라스가 보기엔 아니었다.
그리고 그 중독의 금단 증세 때문에 르나르는 그 스스로와 주변 사람들을 무척이나 괴롭게 만들고 있었다.
엘로즈가 저택에 없는 시간 동안 거의 10분에 한 번씩 엘로즈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느냐고 물어대고 있었으니.
‘그럴 거면 애초에 왜 보내 주자 하였느냐!’는 마음의 소리가 매번 더글라스의 목구멍 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더글라스는 분명 엘로즈를 집에 보내주잔 생각에 반대했다.
반달이 무척 밝았던 어느 날이었다.
로브까지 뒤집어쓰고 르나르가 시킨 일을 처리하고 돌아와 보니, 한다는 얘기가 가관이었다.
「엘로즈가 여기만 있는 걸 답답해하는 것 같아. 코웰 저택에 보내주자.」
「아니, 옆에 바짝 끼고 계시면서 꼬시기만 하셔도 모자랄 판에…!」
라고 말했다가 더글라스는 그날 황천길을 구경할 뻔했다.
더글라스 따위가 엘로즈를 두고 상스러운 단어를 썼다는 이유였다.
결국, 더글라스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르나르는 엘로즈를 집에 보내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엘로즈는 르나르 예상보다도 집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그게 문제였다.
엘로즈가 르나르 곁에 있는 것보다 코웰 저택에 머무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는 것.
그것이 르나르를 날카롭게 만들고 있었다.
물론 르나르는 인정하지 않았다.
입 밖으로 내지 않았고, 아예 모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날카롭게 굴면서도 자신이 왜 날카로운지.
하지만 더글라스는 어렴풋이라도 느낄 수가 있었다.
그의 도련님은 집착하고 있었다.
대공녀의 몸이 아닌 대공녀 자체에게.
대공녀만 맞닿으면 눈 색이 짙어지는 것을 보면 몸에도 집착하는 것 같긴 했지만.
터넛 황제가 그렇게 집착이 심하다더니 그 핏줄이 어딜 가진 않은 모양이었다.
더글라스는 엘로즈가 조금이라도 빨리 황자의 저택으로 돌아와 주길 바랐다.
그가 그의 도련님에게 조금이라도 덜 시달릴 수 있도록.
아예 가지 않는다면 금상첨화였고.
하지만 더글라스에겐 엘로즈를 막을 권한이 없었다.
르나르가 가만두고 보지 않을 것이었다.
엘로즈가 좋아하는 걸 더글라스가 막는 것을.
그러니 더글라스는 그저 엘로즈가 눈치채주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녀의 빠른 귀가가 무척 필요한 상황이란 것을.
영민한 그녀는 다행히 초조한 더글라스를 모르고 넘기지 않고 질문해 줬다.
“왜 그래요, 더글라스? 무슨 일이 있나요?”
“저희 황자님께서 미치신 것 같습니다…!”
엘로즈가 알아준 게 기뻐 대뜸 그렇게 말했으나 더글라스는 덜컥 겁이 났다.
밖에서 흑마와 함께 엘로즈를 기다리던 르나르가 갑자기 들이닥치기라도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더글라스는 이번에도 모든 상황에 대한 이해를 엘로즈에게 맡기기로 했다.
‘대공녀님. 잘 부탁드립니다.’
“그… 대충이라도 말씀해주시면 제가 편할 것 같습니다. 대공녀님께서 안 계실 때 황자님께서 대공녀님을 많…, 음…. 꽤 많…, 아니, 정말 많…, 음…. 오래 기다리고 계시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더글라스를 엘로즈가 뚫어지게 봤다.
엘로즈가 천천히 깜빡이는 눈꺼풀을 따라 그녀의 긴 속눈썹이 고아하게 흔들렸다.
그 모습이 꼭 빛나는 은색 나비가 춤을 추는 것만 같아 더글라스는 마른 침을 삼키게 됐다.
도련님이 어쩌다가 이 아가씨에게 미쳐버린 건지 문득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엘로즈는 더글라스가 절박해 보인다는 인상을 받았다.
“오늘은 그럼…. 돌아와서 저녁 식사를 하도록 할게요. 해질 때쯤에 돌아올게요.”
다행히 더글라스의 천사는 눈치가 아주 없지 않았다.
천사의 관용에 더글라스의 안색이 눈에 띄게 훤해졌다.
*
“벌써 돌아가겠다고?! 아니, 왜!!”
오늘은 저녁을 먹고 가지 않겠단 말에 에반이 한껏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매달렸다.
“오늘은 네가 좋아하는 트러플 파스타를 준비해달라고 내가 주방장한테 부탁해놓았단 말이야…!”
코웰 가문 주방장이 만드는 트러플 파스타는 예술이었기에, 그 말을 들은 나는 잠시 멈칫하게 됐다.
하지만 이미 더글라스에게 돌아가 저녁을 먹겠다고 말해놓은 뒤였다.
“미안해, 에반. 하지만 오늘은 정말 어쩔 수가 없어.”
“왜?! 혹시 황자가 너 없으면 밥도 못 먹겠대?!”
비꼬듯 물었지만 사실 사나운 기세는 아니었다.
내가 벌써 4주째 집에 오고 있었고 그중 최근 열흘은 저녁까지 집에서 먹고 늦게 돌아가고 있었으니, 아마 에반도 황자에게 미안한 마음이 조금은 있을 것이었다.
내가 충분히 배려를 받았단 사실을 에반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 건 아니지만 저쪽에서 먼저 생각해준 만큼 나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지. 이해해줄 수 있지, 에반?”
살살 달래며 물었더니 에반이 미간을 한 번 찌푸렸다 곧 다시 풀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오늘 디저트로 나올 예정이었던 딸기 타르트 싸줄 테니까 가서 황자랑 먹어. 나 너한테 그거 먹이고 싶었단 말이야.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귀여운 녀석.
나한테 딸기 타르트를 먹이고 싶어 그렇게 떼를 쓴 거였구나.
밝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니 에반 또한 마주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름이 오며 길어진 해가 서쪽 을 향해 흐르며 옹기종기 마주 앉은 에반과 내 위로 반짝임을 흩뿌렸다.
에반은 착한 오빠였다.
‘황자가 로즈를 독점하려 한다.’ 고 내내 구시렁대면서도, 딸기 타르트를 커다란 바구니 다섯 개나 꽉꽉 채워 내게 들려 보냈기 때문이었다.
「바구니 네 개는 네 것이고 딱 하나만 황자 몫이야. 무슨 말인지 알지?」
마지막에 덧붙이는 당부도 깜찍하고 우습기 그지없었다.
나는 바구니 때문에 말 대신 마차를 타고 황자의 저택으로 돌아갔다.
일부러 문양이 박히지 않은 마차를 골라 탔기 때문에 문제가 될 건 없었다.
그리고 황자의 저택에 도착했을 때, 나는 역시 발코니에 나와 있던 르나르를 볼 수 있었다.
르나르는 처음엔 내가 타고 온 마차를 경계하듯 노려봤는데 그 마차에서 내가 내리는 걸 보고는 얼굴이 환해지며 웃었다.
나는 그제야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단 인상을 제대로 받게 됐다.
그동안 혹시나 하면서도 외면해온 사실이었다.
르나르는 다소 집착적으로 날 필요로 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악몽에 대한 캐스티나의 마법약 같은 존재였으니 어쩔 수 없는 걸까?
*
곧바로 르나르의 방으로 향한 엘로즈가 방문을 노크하려 했다.
하지만 미처 두드리기도 전 문이 열렸다.
엘로즈의 기척을 느낀 르나르가 그녀의 도착에 맞춰 문을 열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이에 엘로즈가 다소 놀라는 것을 보고 르나르는 제 실수를 눈치챘다.
엘로즈는 소드 마스터로서의 그의 능력에 관해 모를 것이었으니, 그가 기척을 잘 느낀단 사실 또한 숨겼어야 했다.
하지만 별로 상관없을 것 같았다.
그가 소드 마스터인 걸 엘로즈가 아는 것도, 그가 마법사인 걸 엘로즈가 아는 것도.
그냥 엘로즈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몽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에서부터 이미 그녀는 내 목숨 줄을 쥐고 있는 게 아닐까?’
르나르는 생각했다.
게다가 르나르는 여유가 없었다.
궁금했다.
차를 가져올 시간도 아닌데 그녀가 왜 그의 방에 오고 있는 건지.
‘혹시…, 너도 내가 보고 싶었던 걸까…?’
르나르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어색하게 웃은 엘로즈가 르나르에게 천이 덮인 바구니 하나를 내밀었다.
르나르가 바구니를 받으려 했다.
그러자 엘로즈가 바구니를 등 뒤로 숨겼다.
무슨 짓인가 싶어 고개를 들고 보니 엘로즈가 가늘어진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아, 저 눈. 안 되는데….’
우는 엘로즈와 화난 엘로즈에 예외 없이 반응하고 마는 제 별난 취향을 한탄하며 르나르는 문 뒤로 몸을 조금 숨겼다.
그러고 보니 마차에서 내릴 때부터 엘로즈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방문이 갑자기 열렸을 때만 살짝 놀란 뒤 어색하게 웃었을 뿐.
그때, 엘로즈가 입을 열었다.
“혹시 발코니에서 나 기다리는 거예요?”
르나르는 순간 고민하게 됐다.
‘솔직해지는 게 좋을까, 거짓말을 하는 게 좋을까?’
엘로즈의 미려한 눈썹이 한쪽만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르나르가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짓는 표정과 꼭 같았다.
르나르는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
다시는 속이지 않겠다고 엘로즈에게 말한 적이 있었지만, 그것 자체가 거짓말이었으므로 상관없을 것 같았다.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요즘 날이 좋아 발코니에 나가 있는 일이 많았는데 대공녀님께서 돌아오시는 시간과 잘 맞아떨어지더군요.”
“그게 다 우연이었다고요?”
“네, 우연이요.”
“요즘…, 날이 좋아요? 이젠 꽤 덥지 않아요?”
“밤엔 시원합니다. 그래서 일부러 나가 있는 것이기도 하고요.”
“제가 저택에 돌아오는 시간이 매번 다른데…. 어떻게 그게 다 우연이라는 건지….”
“제가 발코니에 오래 머무르긴 합니다.”
그리고 방금 그 말은 사실이었다.
르나르는 발코니에 굉장히 오랜 시간 머물렀다.
엘로즈가 언제 올지 알 수가 없었으니.
처음엔 안에서 기다리려 해보았지만, 자꾸 안달이 나 그럴 수가 없었다.
발코니에서 기다리면 돌아오는 엘로즈를 조금이라도 더 빨리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엘로즈와 떨어지는 걸 못 견딜 줄은 정말 몰랐었다.
이걸 처음 알게 된 건 4주 전 엘로즈를 처음 집에 데려다준 날이었다.
그녀와 떨어진 뒤 내내 안절부절못하다 엘로즈가 노을빛에 물들어 나타났을 때, 르나르는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입이라도 맞출 뻔했다.
그 짐승 같던 본능을 엘로즈가 눈치챈 건지 덜컥 겁을 집어먹고 덜덜 떨었기에 그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었지, 그게 아니었으면….
이럴 줄 알았으면 더글라스 말대로 옆에 바짝 끼고 꼬시기만 할 걸 그랬다고 르나르는 생각했다.
더글라스 아주 가끔 현명할 때가 있었다.
예쁜 나비는 가둬둬야 했다.
갑갑할 나비를 배려한 건 제 지나친 허영이었다.
‘하지만 이미 제안한 걸 먼저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때, 르나르가 아닌 엘로즈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한결 부드러워진 눈길로 르나르를 봤다.
“아무리 여름이 다 되었다고 해도 밖에 오래 나가 있으면 감기 들 수도 있어요. 일교차가 크니까요.”
“…….”
“앞으로 발코니에 오래 안 나가 있겠다고 약속하면 이거 줄게요.”
엘로즈가 다시 르나르에게 하얀 천이 덮인 바구니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딸기 타르트예요.”
엘로즈가 바구니를 덮은 천을 거뒀다.
윤이 나는 빨간 딸기가 촘촘히 박힌 타르트가 커다란 바구니 안에 넘칠 듯 가득했다.
르나르는 겨우 딸기 타르트를 두고 엘로즈와 약속을 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게 됐다.
발코니에서라도 기다리지 않으면 정말 괴로울 것 같았기에.
하지만 엘로즈의 다음 말을 듣고 그는 얼른 생각을 고쳐먹었다.
“저녁 먹고 같이 먹으려고 가져왔어요. 이제 저녁은 여기 와서 먹으려고요.”
“그게…, 정말이십니까…?”
“근데 그것도 르나르가 발코니에 오래 안 나가 있으면 그러려고요.”
“오늘부터 안 나가겠습니다.”
“…네?”
“오늘부터 발코니 쪽으로는 시선도 안 두겠습니다.”
농담이라고 생각한 엘로즈에게서 작은 웃음이 터졌다.
진지한 르나르는 농담이 아니었지만.
르나르가 엘로즈에게서 바구니를 옮겨 들기 위해 바구니 손잡이를 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커다란 바구니를 두고 굳이 그녀가 이미 잡은 부분 쪽으로 손을 뻗은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