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분리불안 강아지
그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으려니 나는 어쩐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우습게도 그가 맹수처럼 보여, 곧 잡아먹힐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르나르가 이전에 침대에서 날 덮쳤던 걸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까?
그가 내 목을 뜯어 먹을 것처럼 달려들었던 것을 내 무의식이 잊지 않고 있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압박감에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쓰고 있으려니, 르나르의 눈빛이 잔잔해졌다.
그가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살짝 축이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굳어버린 내가 신경이 쓰인 모양이었다.
“많이 보고 싶었던 건 맞는데, 그렇다고 대공녀님을 납치라도 할 생각인 건 아닙니다. 겁먹지 마세요, 꼭 제가 대공녀님을 잡아먹으려고 한 것 같네요.”
“아…,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면 혹시 제가 일찍 온 게 신경이라도 쓰이시는 건가요?”
괜찮은 이유인 것 같아 슬쩍 고개를 끄덕이니, 르나르가 다소 안심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긴, 분명 해가 진 후에 나오시라고 말씀드렸는데 대공녀님께서 벌써 나오셔서 저도 놀랐습니다. 제가 기다리는 걸 이렇게까지 신경 쓰실 줄은 몰랐거든요. 그럼 내일은 대공녀님께서 마음 편하실 수 있도록 시간을 정해서 오는 것으로 할까요?”
그런데 나는 그 말에 놀라게 됐다.
“내일부터요? 그 말은…. 제가 내일도 집에 와도 괜찮다는 건가요?”
내 눈이 놀라 동그랗게 커진 게 느껴졌다.
그러자 르나르는 잠시 날 뚫어지게 보더니, 오히려 의아한 듯 되물었다.
“그럼요. 당연히 그걸 원하실 줄 알았는데. 아닌가요?”
“…….”
“저는 앞으로도 매일 대공녀님을 모셔다드리고 모시러 올 생각이었습니다만.”
‘정말 그럴 생각이었다니….’
그게 어땠냐고?
사실 나는 좋았다.
정말 매일 집에 올 수 있다면, 나는 매일 행복할 수 있을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덜컥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제가 정말 내일도 집에 와도 되는 걸까요?”
“그럼요. 그게 대공녀님께서 원하시는 거라면요.”
“경께서 곤란하지 않으시겠어요? 번거롭기도 할 거고요.”
“곤란하지도, 번거롭지도 않습니다.”
르나르가 내게 이렇게까지 잘 대해주는 이유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와의 관계를 돈독하게 유지하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순수하게 선한 마음에서 우러난 배려?
역시 악몽 때문?
나는 정답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내가 매일 집에 와서 가족들 얼굴을 보는 걸 분명 원하긴 했단 사실이었다.
때문에 나는 조금 이기적이게도,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르나르의 마음을 더는 따져보지 않기로 했다.
한동안 나는 아침에 르나르와 함께 코웰 저택으로 간 뒤, 르나르가 날 데리러 오면 황자의 저택으로 함께 돌아가 저녁 식사를 하고 잠을 자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러는 동안 왜 저녁 식사는 집에서 하지 않느냐는 에반의 성화는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내가 다음에 오면 저녁까지 먹겠다고 약속했음에도, 그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예 집에 오지 못할 줄 알았던 내가 매일 집에 있었으니, 겨우 저녁만 같이 못 먹는 것으로 에반이 심한 떼를 쓰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시도를 멈추는 건 또 아니었다.
“로즈, 오늘은 저녁까지 먹고 가면 안 돼? 아버지께서 네가 좋아하는 캐비어 소스 스테이크를 주방장에게 저녁 식사로 부탁해놓으셨어.”
“오늘은 저녁 먹고 가면 안 돼? 오늘 저녁은 고용인들이 산지에서 직접 가져온 바닷가재 스페셜인데….”
“엘로즈, 오늘만큼은 저녁 식사까지…, 아니다, 됐다…. 신경 쓰지 마…….”
나는 결국 앞으론 데리러 오지 말라는 말을 르나르에게 하기로 했다.
에반이 점점 신경 쓰일 수밖에 없게 행동했는데, 저녁 정찬 특성상, 식사가 끝날 시간을 정확하게 예측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벌써 3주째 코웰 저택과 황자의 저택 사이를 오가고 있는데도 올렌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이기도 했고.
올렌도는 정말 나에게 관심이 별로 없는 듯했다.
그렇다면 번거롭게 르나르와 함께 돌아가야 할 필요도 굳이 없을 것 같았다.
‘다른 사용인들을 물리고 더글라스만 우릴 맞이하게 하면 되니까.’
르나르도 같은 생각이었던 건지 꼭 같이 들어가지 않아도 될 것 같단 내 생각을 문제 삼진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쉽게 물러서진 않았다.
내가 혼자 돌아오면 심심할 것 같다나 뭐라나.
“대공녀님께선 그냥 저녁을 드시고 나오시면 되는 겁니다. 제가 모시러 가지 말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 같은데요?”
“그럼 르나르는 저녁 식사도 못 하고 언제 나올지 모를 나를 계속 기다리겠다는 말이에요?”
“밤새라도 기다릴 수 있습니다.”
“하루도 이틀도 아니고 매일 그러겠다고요?”
“네.”
“르나르, 정말… 괜찮아요…. 내가 알아서 잘 돌아갈게요…. 르나르가 자꾸 그러면 오히려 내가 부담스러워서….”
그런데 ‘부담’이란 단어가 나오자 르나르 얼굴이 굳어졌다.
싫어하는 단어를 마주한 듯 꽤 강렬한 반응이었다.
‘내가 언제 르나르한테 부담스럽단 말을 한 적이 있었나…?’
「아뇨, 그건 아니고 조금… 그러니까 아주 조금 부담스러워서요. 다 비싸 보여서.」
‘아.’
르나르가 내게 선물 공세를 펼쳤을 때.
르나르가 내게 퍼플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보냈던 날, 내가 소원처럼 얘기한 게 선물을 더 보내지 말아 달란 말이었다.
부담스럽다고.
근데 내가 그때 그의 선물을 흡족하게 받지 않은 것이 르나르에겐 작은 트라우마가 된 모양이었다.
‘…몰랐는데….’
근데 무심코 그런 생각도 들었다.
‘이건 앞으로도 써먹을 수 있겠는데…? 르나르를 다뤄야 할 때….’
아마 내 안엔 나도 몰랐던 작은 악마가 사는 듯했다.
어쨌든 시험해 보기 위해 내가 조심스럽게 다시 말을 꺼냈다.
“르나르가 기다리고 있으면 제가 약간 부담이….”
“……모시러 가지 않겠습니다.”
결국, 나는 내가 원했던 대로 르나르가 더는 날 데리러 오지 못하게 만드는 것에 성공했다.
그의 트라우마를 건드려 얻어낸 결과라 조금 미안하기도 했지만, 이편이 그에게도 좋을 거로 나는 생각했다.
식사하는 나를 밥도 먹지 않고 기다리겠다는 건 정말 미친 짓인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거쳐 겨우 혼자 황자의 저택으로 돌아오게 된 첫날.
나는 발코니에 작은 티 테이블을 놓고 차를 마시는 르나르를 보게 됐다.
내가 황자의 저택에 처음 르나르와 식사하러 왔을 때, 발코니에 선 그를 보게 되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머리 위로 달이 뜬 르나르를 보고 있는데 그가 나를 봤다.
반가운 마음에 미소 짓고 손을 흔드니 그 또한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어줬다.
그런데 발코니에 나와 있다가 우연히 나와 마주치는 르나르는 그날이 끝이 아니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의 다음 날도….
‘설마…, 저기서 날 기다리는 건 아니겠지…?’
잠시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나는 이내 그 생각을 떨쳐버렸다.
‘르나르가 분리불안 강아지인 것도 아닌데….’
설마 싶었기 때문이었다.
르나르가 분리불안 강아지가 맞았다는 걸 알게 된 건 그로부터 일주일이 더 지나서였다.
그것을 알게 된 계기는 이랬다.
언젠가부터 대공과 오빠들이 한번 시작되면 몇 시간은 이어질 토론 주제로 날 붙잡기 시작했다.
“로즈야, 네 나이 대 영지 영애들에게 영향을 끼칠 새로운 정책을 구상 중인데 네가 한 번 봐줄 수 있겠니?”
“로즈! 최근에 내가 학계에 이론을 하나 발표할 생각을 하고 있어. 뉼리아 베거의 물질적 관념론을 연구하다 떠오른 건데.”
“로즈, 로즈! 내가 요즘 책 한 권을 읽고 있는데 말이야…!”
그것도 꼭 저녁 식사가 끝날 때쯤 얘길 꺼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런 식으로 이어지곤 했다.
“어…. 시간이 너무 늦었잖아…? 오늘은 그냥 자고 가는 게 어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더니 날 집에서 저녁 먹게 만든 가족들이 다음 단계로 넘어간 모양이었다.
그것만은 안 된다고 해도 나를 코웰 저택에 조금이라도 더 머물게 하려는 시도는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꽤 다양한 방법을 이용해.
“오늘 주방장이 저녁 식사 이후에 굉장한 디저트를 준비해놨다고 하더라고. 멜론과 건조 시킨 햄인데, 단 것과 짠 것의 조합이 아주 기가 막힌다는 소문이 주방에….”
“로즈야, 요즘 러블린이 밤 산책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아? 네가 같이 가주면 내가, 아니…, 러블린이 정말 좋아할 것 같은데…!”
덕분에 황자의 저택으로 돌아가는 내 귀가 시간은 점점 늦어지고 있었다.
처음엔 디저트도 러블린 산책도 모두 거절하려 했다.
르나르가 날 배려해 준 것인데, 너무 늦으면 그에게도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지만 사람이 적응의 동물인 게 문제였을까 아님, 내가 안일했던 걸까?
어느 순간부터 난 내가 있고 싶은 만큼 코웰 저택에 머물다 돌아가는 일이 점점 늘고 있었다.
내가 가족들을 너무 좋아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르나르에 대한 미안함을 애써 잊어버릴 만큼.
한참을 코웰 저택에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다 황자의 저택으로 돌아가 보면 발코니에 앉아 책을 읽거나 차를 마시는 르나르가 보였다.
‘오늘도 또….’
르나르는 그러다 날 발견하면 손을 흔들어 인사했고, 나도 그런 르나르에게 손을 흔들어 마주 인사해줬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일찍부터 코웰 가문 저택에 가기 위해 준비 중이던 내게 더글라스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대공녀님 혹시 오늘 언제쯤…, 저택에 돌아올 예정이신지 알 수 있을까요…?”
더글라스가 내게 그런 걸 묻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더글라스의 얼굴이 왜인지 예전보다도 더 수척해 보였다.
“왜 그래요, 더글라스? 무슨 일 있어요?”
볼살이 쪽 빠진 더글라스를 의아하게 여긴 내가 물었다.
그러자 더글라스가 사실 내게 하소연하고 싶었던 듯 울상을 지어 보였다.
“저희 황자님께서 미치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