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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20화 (20/100)

20화

행복

더글라스가 손에 든 것은 들꽃 꽃다발이었다.

내가 르나르와 호수 주변을 산책하며 예쁘다고 한, 바로 그 들꽃들로 만들어진 꽃다발.

꽃다발을 들고 헐레벌떡 달려온 더글라스가 숨을 헉헉 내쉬었다.

더글라스는 르나르를 한껏 노려본 뒤 그에게 꽃다발을 넘겼다.

르나르는 그런 더글라스에게 남자까지 홀릴 만큼 예쁜 웃음을 지어준 뒤 나를 향해 돌아섰다.

“대공녀님?”

르나르가 들꽃 꽃다발을 내게 내밀었다.

“이걸 왜 저한테….”

“가면서 보시라고요. 아까 이 꽃들 예쁘다고 하셨잖아요.”

르나르와 나는 결국 한 말을 같이 타게 됐다.

나와 닿는 게 르나르의 악몽에 정말 도움이 되는 건지 판단하기 위해 내가 내린 결정이었다.

나중에 르나르가 무의식중에라도 악몽이 줄었다, 늘었다 얘기해 줄 수 있을 테니.

르나르는 코웰 저택 바로 근처까지 나를 데려다줬다.

코웰 저택까지 가지 않은 것은 아마 그가 진짜 황자가 아니기 때문인 것 같았다.

‘하긴.’

미르엣이라도 마주친다면 괜한 설명이 필요해질 터였다.

르나르는 해가 질 때쯤 나를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해가 지고 나면 그 이후 내가 원하는 시간에 아무 때나 나오라고.

‘아무…때나…?’

“그럼 제가 밤새 나오지 않으면 밤새 절 기다리시려고요?”

내가 다소 황당해하며 물었지만, 르나르는 맑게 웃으며 고개만 끄덕일 따름이었다.

“밤새 안 나오시면 밤새 기다리시죠, 뭐.”

“아침에야 돌아가면 저택 고용인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음…. 황자님과 대공녀님이 약혼도 하기 전에 뜨거운 밤을 보내고 왔다…?”

“그, 그게 무슨…!”

내가 당황하자 르나르는 장난기를 머금고 씩 웃으며 내 머리를 헝클었다.

그러다 본인이 헝클인 내 머리를 매만져주며 또 내게 접촉해왔다.

아무래도 나와의 접촉이 그의 악몽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게 아니면 스킨십을 싫어하는 르나르가 이렇게 내게 몸을 붙여올 이유가 없었으니.

“나와야 하는 시간을 정해버리면 대공녀님께서 덜 자유롭다 느끼시지 않겠어요? 전 ‘누구’와 달리 대공녀님을 구속하고 싶지 않아요.”

르나르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누구는 아마 올렌도겠지?’

예전엔 자신과 올렌도를 직접 비교한 적은 없었는데.

요즘의 르나르는 확실히 이상했다.

그래도 그런 르나르가 싫지만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르나르에게 알겠다고 대답했다.

르나르는 날 말에서 내려주고 이따 보잔 인사를 건넨 뒤 그를 닮은 흑마를 데리고 코웰 저택 방향 반대쪽으로 사라졌다.

“주인님!! 도련님들!!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아빠? 오빠들?”

고요한 오후 햇살이 깃들었던 코웰 대공작 저택이 소란스러워졌다.

“…아직 잠이 덜 깼나? 어디서 엘로즈가 왔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꿈에 나오는 것으로도 모자라…. 나 이젠 로즈 환청까지 들리나 봐, 형들….”

“근데 지금 다들 로즈 목소리가 들리는 거야? 나도 우리 로즈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로즈? 정말 내 딸이 맞니?”

예고 없이 집에 온 나를 본 대공과 오빠들은 마치 꿈에서만 보던 사람처럼 날 반갑게 맞아줬다.

“멍멍!! 멍멍!!”

“러블린!!”

가족들과 인사하고 있으려니 하녀 안나를 따라 막 산책에서 돌아온 러블린이 전속력으로 달려와 내게 안겼다.

“아가씨!”

내 전속 하녀인 안나 또한 나를 보며 기뻐했다.

완벽했다.

나는 내 집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행복…하다….’

그게 내가 무의식중에 하게 된 생각이었다.

현실 세계에선 참 내 것 같지 않았던 그 단어.

행복.

나는 그 행복이란 것을 이 세계에서 이런 방식으로 느끼고 있었다.

격자무늬 창살 사이로 맑은 오후의 햇살이 부서져 들어오는 코웰 대공의 집무실 안.

그곳에 나와 코웰 가문 네 남자가 모여 있었다.

대공은 책상에, 나와 오빠들은 손님용 대리석 테이블 주변으로.

테이블 가운데 놓인 도자기 화병엔 출처가 나타샤의 꽃집이 분명할 연분홍색 작약이 탐스러울 만큼 가득 담겨 있었다.

내가 평소 나타샤의 꽃집을 자주 찾은 것은 대공의 집무실을 포함한 코웰 저택 이곳저곳을 장식하기 위해서였다.

당분간 내가 없을 테니 안나 쪽으로 꽃을 보내라고 나타샤에게 말해놓았는데, 나타샤도 안나도 제 역할을 잘 해주고 있던 모양이었다.

나중에 두 사람을 위한 작은 선물이라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녀들이 테이블 위로 찻잔 여러 개를 올렸다.

진하게 우려진 차가 따라지니, 대공의 집무실은 금방 향긋한 홍차 냄새로 가득해졌다.

그렇게 집무실 티타임이 시작되었다.

내가 집에 오자 대공은 내 곁을 떠날 줄을 몰랐다.

나는 처음엔 그가 바쁘지 않은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얼굴이 하얗게 질린 보좌관이 이제는 가셔야 한다, 일해 주셔야 한다며 대공을 찾아와 하소연하는 것을 우연히 보고, 나는 아예 대공의 집무실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대공이 일하는 동안 그의 옆에 있어 주기 위해서였다.

오빠들까지 그런 날 따라오는 바람에 대공의 집무실이 시장통이 되어버렸지만.

‘대공의 일에 방해가 되면 안 될 텐데….’

내가 그렇게 고민했으나, 대공의 표정은 마냥 즐거워 보이니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아예 온 거야?”

3단 트레이 꼭대기 층의 가장 맛있어 보이는 티 케이크를 집은 미르엣이, 내 접시에 그것을 옮겨 담아주며 내게 물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럼? 혹시 황자 몰래 도망이라도 나온 거야?”

한껏 진지한 에반의 표정에 내가 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 오빠가. 날 뭘로 보고.”

“그럼?”

“황자 전하께서 친히 보내주신 거야.”

“황자가?!”

지금껏 조용했던 겔리온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끼어들었다.

“응, 맞아, 겔리온. 전하께서.”

“정말로?”

이번에 끼어든 건 미르엣이었다.

“응, 미르엣. 정말.”

내가 그렇다고 쐐기를 박자 오빠 셋은 동시에 넋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멀찍이 떨어진 책상에서 서류를 읽던 대공도, 귀는 이쪽으로 열려있던 건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는 것이 보였다.

‘뭐지? 이 결코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들은?’

“뭐야, 뭔데. 대체 뭐가 그렇게들 못 미더운 건데?”

“황자가… 친절하게도 너를 집에 보내줬다고…?”

“믿을 수 없어….”

미르엣과 에반이 멍하니 차례로 중얼거렸다.

아마 그들 머릿속 황자는 협박까지 해 동생을 빼앗아 간 몹시 나쁜 사람인데, 그런 황자가 나를 집에 보내줬다는 사실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뭐, 아주 잘못된 생각은 아니었다.

올렌도라면 날 안 보내줬을 테니까.

르나르라서 보내준 것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올렌도가 아닌 르나르와 함께 살게 된 건 어떻게 보면 신의 한 수였다.

‘올렌도와 같이 살았으면 얼마나 골치 아플 일이 많았을지….’

“그럼 황자가 보내준 거면 이제 매일 집에 와도 되는 거야?”

미르엣과 겔리온이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는 와중 의외로 가장 빨리 정신을 차린 에반이 잔뜩 기대에 찬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내가 곤란하단 표정을 지었다.

“매일은 좀…, 어려울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이어지는 내 대답에 에반이 풀죽은 얼굴을 했다.

그러다 눈빛이 사나워졌다.

황자 놈 그럴 줄 알았다면서 속으로 욕하고 있음이 분했다.

“내가 피곤할 것 같아서.”

얼른 덧붙였다.

괜히 르나르를, 에반이 미워하는 걸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에반은 날 허락해준 황자가 올렌도인지 르나르인지도 모르긴 하지만.’

그냥 내 마음이 그랬다.

나를 배려한 르나르를 욕먹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물론 매일 집에 올 수 있다면 정말 좋을 것 같긴 했다.

매일 행복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

‘하지만 매번 날 데려다주고 데리러 와야 하는 게 르나르도 번거로울 거고….’

내가 피곤해서 안 될 것 같다고 하니 역시 오빠들은 조금 서운해 하면서도 금방 알겠다고 이해했다.

애꿎은 홍차만 벌컥벌컥 들이키는 걸 보면 내 말을 완벽하게 믿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뜨거울 텐데….’

하지만 그렇다고 매일 집에 오겠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나는 이 얘기를 더 이어가지 않기로 했다.

여전히 김이 날 정도로 뜨거운 홍차를 조심조심 마셨다.

오늘의 맑은 햇살을 닮은 홍차 향이 좋았다.

“로즈…. 최소한 저녁이라도 먹고 가면 안 되는 거야…?”

다시 돌아갈 채비를 하는 내게 에반이 다가와 칭얼거렸다.

현관 유리창을 통해 들어온 노을이 빛나는 에반의 금발을 고운 주황빛으로 물들였다.

“다음에 오면 먹고 갈게. 저녁을 먹고 가겠다고 미리 말을 못 해서 그래. 응, 알겠지? 이해해줄 수 있지?”

에반이 너무 풀죽은 모습이라, 나는 삐친 아이를 달래듯 공을 들여 에반을 이해시켜야 했다.

한참 후 에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끝까지 물에 빠진 토끼 같은 모습이라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지만.

내가 르나르와 헤어진 장소에 다다랐을 즈음엔 새빨갛게 달아오른 해가 이제 막 능선을 넘어가고 있었다.

르나르의 요청보다 일찍 나온 것이었다.

그는 내게 해가 진 후 나오라고 했는데, 나는 해가 지는 것과 동시에 나온 것이었으니.

하지만 르나르는 이미 오래전 도착한 듯 꽤 지겨워 보이는 얼굴로 빈둥거리고 있었다.

지겨워 보였던 건 그가 어디서 뜯었을지 모를 강아지풀을 입에 물고 그 끝을 질겅질겅 씹으며, 그를 닮은 흑마에게 괜히 시비를 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까까진 입고 있지 않던 긴 로브까지 걸친 상태였다.

내가 코웰 저택에 있던 동안 어둠의 시장을 돌며 재산이라도 불리고 온 걸까?

르나르가 별안간 나를 봤다.

그러더니 강아지풀을 뱉고 지겨웠던 적 없는 것처럼 환히 웃어 보였다.

그런 르나르 위로 붉은 노을이 가득 쏟아졌다.

‘……눈부셔….’

“언제 도착한 거예요?”

내가 다가가며 묻자, 르나르는,

“으음…, 바로 좀 전에요…?”

라고 답하며 능글맞게 웃었다.

어느새 바로 앞까지 걸어온 그가 흘러내린 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줬다.

그 행동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나는 내 머리를 넘긴 그의 손가락이 내 볼을 스친 뒤, 아랫입술까지 슬쩍 닿은 것을, 나중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내 눈을 직시하던 르나르가 마른 침을 삼켰다.

“빨리 다시 보고 싶어서…. 기다릴 수가 있었어야죠….”

그가 난데없는 소리를 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르나르에게서 어쩐지 묘한 갈증이 느껴졌다.

이상했다.

‘설마 보고 싶었단 말이 진심인 건 아닐 텐데?’

노을만큼 붉은 르나르의 적갈색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이글거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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