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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19화 (19/100)
  • 19화

    집에 갈 것을

    르나르와 나비 온실 얘기를 나누게 된 날 밤, 하녀들을 깨우기도 부담스러웠던 한밤중.

    주방에서 따뜻한 우유라도 한 잔 마실까 싶었던 나는 내 방을 나와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그날따라 밝은 달이 불빛 없는 긴 복도를 가득 밝혔다.

    한동안 걷다 보니 복도에서 얘기 중인 두 남자가 보였다.

    한 명은 르나르였고, 다른 쪽은 로브를 입은 남자.

    남자가 로브에 달린 모자까지 쓰고 있어 난 처음엔 그가 누군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남자가 스스로 모자를 벗자 나는 그가 더글라스인 걸 이내 알아볼 수 있었다.

    르나르가 더글라스에게 무어라 얘기했고, 더글라스는 이유 모를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또 무슨 작당 모의 중인 건지….’

    내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다른 길을 통해 부엌으로 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모양 좋은 반달이 그런 우릴 보고 다소곳이 웃었다.

    다음 날.

    읽던 책을 끝까지 읽다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기 때문인지 나는 해가 중천에 뜨고도 한참이 되어서야 느지막이 잠에서 깼다.

    오늘도 어제처럼 날이 좋은 건지 방 안을 가득 채운 레몬색 햇살이 눈 부셨다.

    나는 보통 아침 식사는 방으로 가져오게 했다.

    침대 위에서 대충 해결하는 게 편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날이 맑아서인지, 알록달록한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식당에서 볕을 쬐며 아침을 먹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마음의 결정을 내린 나는 설렁줄을 흔들어 하녀를 부른 뒤 식당에 식사를 차려놓게 했다.

    식사 준비가 되는 동안 다른 하녀가 내 머리를 높이 올려 묶어줬다.

    그 뒤 나는 직접 고른 연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식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도착한 식당에 르나르가 있었다.

    무심코 창밖을 보게 됐다.

    분명 그가 식사할 만한 시간은 아니었다.

    깨어난 지도 이미 오래 지났을 텐데.

    하지만 맑은 눈으로 정원을 구경하던 르나르는 식당에 들어선 나를 보더니, 방금 일어난 것처럼 몽롱한 얼굴을 했다.

    눈을 반쯤 감은 그가 배시시 웃었다.

    지금의 만남이 우연일 뿐이라는 듯 살짝 놀라는 쇼맨십을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결국 르나르와 함께 식사하게 된 내 앞에 수프와 샐러드, 얼음이 동동 뜬 청포도 주스 따위의 간단한 아침 식사가 놓였다.

    중앙에는 빵이 잔뜩 쌓인 바구니가 있었는데, 거기서 크고 둥그런 빵 하나를 집어 든 르나르가 빵을 집어 뜯어먹으며 내게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로즈, 오늘 날이 참 좋지? 우리 둘 다 이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싶었을 정도로.”

    ‘언제부터 날 로즈라고 불렀었지?’

    내가 잠시 그렇게 고민하는데, 방금 일어난 것치고 얼굴에 부기조차 없는 르나르가 우스웠다.

    혹시 내가 아침을 이 식당에서 먹을 것이란 말을 어딘가에서 전해 들은 걸까?

    ‘그나저나….’

    나는 얼굴이 붓지 않았으려나?

    나야말로 정말 방금 일어났는데?

    “오늘 뭔가 평소와 다른 것 같아. 내가 맞춰볼까?”

    마침 르나르가 던진 말에 내가 흠칫하게 됐다.

    ‘그 평소와 달라 보인다는 게…, 설마 부어 보인다는 말은 아니겠지…?’

    “오늘 머리를 묶었네? 그러고 보니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것도 처음 보는 것 같고.”

    “오늘 날씨를 보니 왠지 이걸 입고 싶더라고요.”

    “솔직하게 말해도 돼? 예쁘다.”

    능구렁이 같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던진 르나르 위로 알록달록한 정원을 돌고 온 햇살이 쏟아졌다.

    마침 청포도 주스 속 얼음이 달칵 소리를 내며 녹아내렸다.

    어쩐지 목이 말라진 나는 그 주스를 쭉 들이켰다.

    르나르가 손깍지 위에 턱을 괸 채 그런 나를 관찰하듯 빤히 봤다.

    내가 주스 잔을 내려놓자, 르나르는 슬쩍 웃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음 할 말을 이어갔다.

    “오늘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서 정말 다행이야. 사실 너한테 긴히 하고 싶은 말이 있었거든.”

    “하고 싶은 말이요?”

    “응. 아침 먹고 같이 산책이나 할까?”

    불어온 봄바람에 머리칼이 나부낀 르나르가 싱긋 웃었다.

    호수 쪽 햇살은 은빛이었다.

    그 햇살이 반짝이게 윤을 낸 호수의 절경 잠시 구경하다가, 르나르와 나는 그 근처 산책로를 걷기 시작했다.

    산책로 주변은 이름 모를 들꽃들이 가득 피어있어 예뻤다.

    “예쁘다….”

    내가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르나르가 싱긋 웃었다.

    그리고 그 산책로에서 르나르는, 내게 코웰 가문 집에 갈 것을 제안했다.

    “집이요?”

    꽤 갑작스러웠던 그 제안에 놀란 내가 반문했다.

    르나르가 들꽃 한 송이를 꺾어 내 머리칼 사이에 꽂아주고는 또다시 싱긋 웃었다.

    “식당에서 말씀드리지 않은 것은 고용인들 때문이었습니다. 고용인 중에 올렌도 황자님의 첩자가 있을 수도 있거든요. 물론 대공녀님께서 외출하시면, 고용인들도 대공녀님의 외출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

    “하지만 목적지가 알려지는 것과 알려지지 않는 것엔 큰 차이가 있으니까요. 대공녀님께서 집에 가시는 것을, 올렌도 황자님께선 분명 좋아하진 않으실 겁니다.”

    올렌도가 좋아하지 않을 것이란 얘긴 충분히 납득 가능했다.

    가부장적 사고방식이 밑바탕에 깔린 것이 이 사회였기에, 내가 친정에 해당하는 코웰 가문을 여기 온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아 방문하는 것을 황가를 무시하는 것으로 느낄 수도 있었으니.

    ‘안 그래도 코웰 가문에 자격지심이 꽤 강한 올렌도이기도 했고.’

    사실 그래서 난 그동안 딱히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괜한 분란을 만들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런데 르나르가 그런 내게 갑자기 먼저 제안을 한 것이었다.

    물론 나야 당연히 집에 가고 싶었다.

    그곳이 이곳보다 편하기도 했고, 이 세계의 내 가족인 대공과 오빠들이 보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의아한 마음이 같이 생겼다.

    ‘나야 좋긴 하지만…. 갑자기 왜….’

    “갑자기 집에 가라는 이유가 뭔가요? 제가 이곳에 온 지 아직 한 달밖에 안 된 건 아시는 거죠?”

    그리고 르나르의 다음 대답은 날 무척이나 당혹스럽게 했다.

    “예뻐서 갇혀있어야만 하면 불쌍하니까요.”

    “…네?”

    “저는 대공녀님께서 갑갑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갑갑….’

    그가 대체 무슨 얘길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문득, 기죽은 얼굴로 나를 보던 르나르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물론 이 나비가 예쁘긴 하지만…. 예뻐서 갇혀있어야 한다면 나비가 너무 불쌍하잖아요?」

    나비 온실이 필요 없단 의미로 내가 했던 말도 떠올랐다.

    ‘혹시…, 설마….’

    “마차는 이미 준비해뒀습니다. 이 산책이 끝나면 바로 출발하시면 됩니다.”

    르나르가 약간 기대하고 설레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꼭 칭찬을 바라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망설이게 됐다.

    내가 갑갑할까 봐 나를 보내주려 하는 르나르는 고마웠지만, 그것이 르나르를 곤란하게 할까 봐.

    어쨌든 이것이 올렌도 황자가 원할만한 일은 아닐 테니.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혹시라도 황자님께서 알게 되시면…. 역시 좋아하지 않으실 것 같은데….”

    내가 르나르에게 제안을 무를 기회를 줬다.

    하지만 르나르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이내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는, 조곤조곤 내게 설명했다.

    “고용인들 눈만 잘 피하면 괜찮을 겁니다. 이 안에서 소문만 돌지 않으면, 대공녀님 목적지를 황자님께서 쉽게 알아내지 못하실 테니까요. 제가 대공녀님과 같이 나간 뒤에 대공녀님과 함께 돌아오겠습니다, 이 저택에.”

    “네?”

    “다들 저희가 데이트 나갔다 왔다고 생각할 겁니다. 황자님께서도 저와 대공녀님 사이가 가까워지길 원하고 계시니 그 데이트를 환영하실 거고…. 그럼 문제없겠죠?”

    ‘데이트…. 올렌도의 환영….’

    올렌도가 르나르와 내 사이가 가까워지길 원한다는 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구태여 캐묻지 않았다.

    왠지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으니까.

    ‘나와 르나르를 엮어주고 자기는 빠지려는 게 아닌 건지….’

    마치 내가 올렌도와 캐스티나를 맺어줄 계획인 것처럼.

    “그럼 가시는 거죠?”

    내게 묻는 르나르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르나르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런 르나르 위로 맑은 은빛 햇살이 쏟아졌다.

    기분이 좋아졌다.

    ‘집이라니.’

    물론 이곳 생활도 나쁘지는 않았다.

    ‘르나르가 나에게 잘해주고 있었고, 나도 르나르에게 도움이 되고 있고.’

    하지만 역시 가족들은 보고 싶었다.

    그동안 편지만 주고받았던 것이 전부였기에.

    대공과 오빠들이 잘 지내고 있는 게 맞는 건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강아지 러블린도 보고 싶었다.

    “혹시 마차 말고 말을 준비해줄 수 있나요? 마차보단 말을 타고 다녀오는 편이 아무래도 시선을 덜 끌 것 같아서요.”

    어느새 꽤 적극적으로 변한 내가 르나르에게 물었다.

    황자의 저택의 마차엔 황실 인장이 박혀있으니, 거리에 나서면 아무래도 시선을 확 끌게 될 것 같았다.

    르나르가 적극적인 내가 마음에 든다는 듯 싱긋 웃었다.

    “안 그래도 그래서 황실 인장이 박혀있지 않은 마차를 준비해놨습니다.”

    르나르가 내 머릿속을 읽었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나는 안심할 수가 없었다.

    “혹시 마부가 황자 전하의 첩자일 수도 있잖아요. 누가 첩자인지는 모르는 거죠?”

    내가 그렇게 묻자, 르나르가 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눈을 휘어 웃곤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역시 치밀하시네요. 돈 가방을 잔뜩 싸 들고 가출하시던 어린 시절이 어디 가지 않았습니다.”

    그때를 떠올리고 민망해진 내가 사납게 르나르를 노려보니, 르나르가 마른침을 한번 삼키곤 어색하게 웃었다.

    이후 그가 계속 나보다 앞서 걷는 것이 이상했다.

    말이 준비되었단 소식을 듣고 현관 밖으로 나간 나는 의아해졌다.

    말이 한 필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르나르의 흑발 같은 윤기 나는 검은 털을 가진, 잘 빠진 몸이 단단해 보이는, 르나르를 닮은 흑마였다.

    ‘분명 같이 나가겠다고 했는데…. 왜 말이 한 필뿐인 걸까…?’

    내 고개가 모로 기울어지는데,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온 르나르가 나를 번쩍 들어 그 단단한 흑마 위에 앉혔다.

    그러곤 내 뒤에 타려 했다.

    당황한 내가 그를 만류했다.

    “설마 같이 타시려고요?”

    “당연하죠. 혼자 타면 위험하니까.”

    “걱정 마세요, 말은 꽤 타는 편이거든요.”

    르나르가 멀찍이 서 있는 사용인 무리를 힐긋 봤다.

    저들을 근처에 두고 나와의 줄다리기를 계속 이어나갈지 말지 고민하는 모양새였다.

    가끔 이렇게 티 나게 나와 몸을 붙이려 하는 르나르였다.

    스킨십 혐오증 때문에 가능한 나와 닿고 싶지 않을 텐데도.

    그래서 나는 눈치채게 될 수밖에 없었다.

    ‘혹시 차를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고 쓰다듬어주는 것 아니고 나와 몸이 닿는 것 자체가 악몽에 도움이 되는 걸까…?’

    그런 합리적 추측을 하는데 먼 곳에서부터 더글라스가 나타났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을 본 내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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