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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18화 (18/100)

18화

선물을 고르는 안목

히아신스 꽃다발을 받은 그 날 이후, 나는 르나르와 저녁 식사를 함께하게 됐다.

정확히 따지면 히아신스 꽃다발 이후로도 이어진 르나르의 선물 공세 때문이었다.

르나르에게 꽃다발을 받은 날 밤만 해도….

「대공녀님, 저희 도련…, 아니, 황자 전하께서 직접 골라 대공녀님께 보내신 선물입니다.」

르나르는 더글라스를 통해 내게 목걸이를 보냈다.

걸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화려한 퍼플 다이아몬드 목걸이였다.

‘내 취향은 보석이 좀 더 작은 쪽인데….’

내가 생각했었다.

르나르가 숨겨둔 재산이 적지 않다는 건 원작을 통해 알았다.

하지만 검도 잘 쓰고 돈 버는 능력도 있는 르나르에게 신께선 선물을 고르는 안목만큼은 허락하지 않으신 모양이었다.

그런데 목걸이를 가져온 더글라스가 내게 전한 말이 의외였다.

「전하께서 대공녀님께서 아직 화가 덜 풀리신 건 아니신지 여전히 걱정하고 계십니다. 혹시 더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저희 황자님께선 아마 대공녀님께 뭐든 해드리려고 하실 겁니다.」

내가 화가 안 풀렸을까 봐 르나르가 걱정하고 있다고?

「저는 분명 화가 나지 않았다고 황자님께 말씀드렸는데요?」

「아…, 그러셨을까요…? 황자님께선 계속 걱정하고 계시던데….」

더글라스가 난감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더글라스는 어쩐지 초췌해 보였다.

한동안 르나르에게 많이 시달린 건지.

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왜인지 안달이 난 르나르를 안심시킬 방법.

내가 정말 화가 나지 않았다고 그가 믿게 할 있을 방법.

목걸이를 받은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르나르가 값비싼 선물들을 보냈기 때문에, 나는 그런 르나르에게 화나지 않은 내 상태를 전할 방법을 바로 시행하기로 했다.

“오늘 저랑 저녁 같이 먹을래요?”

요즘 저녁 식사 전부터 저택에 돌아와 있곤 하는 르나르를 내가 급습했다.

정확히는 집무실 문이 열려 있어 그냥 들어간 것이긴 했지만.

르나르는 이미 날 보고 있었다.

내가 보이기도 전 내 기척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런데 르나르의 책상 위에서 보석 두 개가 반짝였다.

하필 둘 다 보라색 계열이었던 걸 보면 역시 내 선물을 준비하고 있던 게 틀림없었다.

‘설마 이것 때문에 요즘 집에 빨리 들어왔던 걸까? 내게 줄 선물을 직접 선물을 고르려고?’

“오늘 저녁 저랑 같이 먹을래요? 혹시 그 책상 위에 있는 게…, 또 제게 보낼 선물인 것만 아니라면요.”

내 말에 르나르가 눈꼬리를 내렸다.

“혹시 그동안 보내드린 선물이 마음에 안 드셨습니까?”

일부러 만든 얼굴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꽤 처연해 보이는 것만큼은 틀림없었다.

“아뇨, 그건 아니고 조금…, 그러니까 아주 조금 부담스러워서요. 다 비싸 보여서.”

“그 정도 사드릴 능력은 됩니다.”

“그래도….”

“원하시면 별장이라도 사드리겠습니다.”

“…별장은 됐고요, 저랑 밥 먹어주실래요? 그거면 충분할 것 같은데.”

“밥…이요…? 같이 저녁 먹자는 게 진심이셨습니까? 식사는 혼자 하는 걸 선호하시는 편이 아니셨습니까?”

“그건 맞긴 하지만…. 저희 친구 하기로 했잖아요. 좀 더 친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내 말에 르나르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생각에 잠긴 듯 집무실 천장 구석으로 시선을 옮겼다가 이내 다시 나를 봤다.

“…저야 당연히 좋습니다.”

“그럼 선물 공세는 그만하는 거죠?”

“…….”

“네.”

내가 채근하자 르나르가 여전히 멍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상했던 난 고개를 기울였다.

그날 이후 르나르와 함께 저녁을 먹는 건 내 일상 중 한 부분이 됐다.

르나르와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일에 특별할 것은 없었다.

르나르는 언제나처럼 알아서 대화를 주도했고, 나는 답만 잘하면 됐다.

그 정도뿐이어도 우리의 대화는 항상 즐거웠다.

가끔 르나르가 식사하는 날 멍하니 보는, 이상한 순간들이 있긴 했다.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면 르나르는 이내 평소의 표정을 되찾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했다.

그런 순간들만 빼면 정말 평범한 나날이었다.

그런데 같이 식사를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걸까?

르나르가 지금 이렇게 내 눈앞에 나타난 걸 보면.

본격적인 여름을 한 달도 채 앞두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나는 유난히 맑은 봄날을 만끽하려 정원에 나가 독서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노란 달맞이꽃이 주변에 가득 핀 정원 벤치에 앉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르나르가 내 앞에 나타났다.

저택에 있는 줄도 몰랐는데.

“왜요, 르나르? 어? 그건 뭐예요?”

르나르가 옆구리에 낀 책 여러 권을 보며 내가 물었다.

“독서가 하고 싶어 나왔는데 마침 대공녀님께서 보여서요. 옆에 앉아서 같이 읽어도 괜찮을까요?”

르나르 위로 갑자기 에반이 겹쳐 보였다.

내 착각인 걸까?

“요즘 대공녀님과 수업도 같이 못 하는데…. 이렇게 책이라도 읽어야 지식이 늘죠.”

르나르가 한숨을 푹 내쉬며 지금 책을 읽는 것이 그에겐 꼭 필요한 일이라는 듯 내게 설명했다.

수업은 르나르의 부족한 잠 때문에 잠시 중단한 상태였다.

사실 요샌 다시 수업을 시작해도 될 정도로 르나르의 몸 상태가 좋아진 것이 내 눈에도 보이긴 했지만.

그늘이 자리 잡았던 르나르의 눈 아래는 다시 뽀얘진 상태였다.

요즘 여유롭게 지내고 있는 것도 분명 그의 몸 상태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었다.

최근엔 오늘처럼 마치 할 일이 없다는 듯 저택 이곳저곳을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는 일이 잦아진 르나르였으니까.

대신 더글라스가 눈에 띄게 수척해져 가는 것은 내 착각만은 아닐 터였다.

르나르는 악몽이 점점 좋아지고 있다고 했다.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며칠에 한 번 악몽을 꾸지 않게 된 것이 며칠에 한 번 악몽을 꾸는 것으로 또 바뀌었다고.

내가 밤마다 그에게 리베로 차를 가져다주는 게 정말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이상하게 나는 그 이후로 손바닥이 점점 간지러워지고 있었지만.

가끔 미열도 나고 있었지만, 나는 이것을 굳이 르나르에게 말하진 않기로 했다.

견디지 못할 정도로 심한 것도 아니었고, 상태가 좋아지는 르나르를 보는 게 좋았으니까.

내가 앉은 위치를 옮겨 자리를 만들어주니 르나르가 코웰 저택의 강아지 러블린처럼 날름 내 옆에 앉았다.

이후 난 독서에 집중했다.

그런데 한참을 책 내용에 몰두하던 차, 무언가가 내 코끝을 간질이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들고 보니 까만 줄무늬를 가진 예쁜 노랑나비가 내 코끝에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문득 르나르를 보니 르나르가 고개를 돌려 내 시선을 피했다.

그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나비는 내가 읽는 책 위로 날아다니다가 내 코에 앉는 행동을 반복했다.

꼭 책을 그만 보고 저와 놀자는 것처럼.

‘예쁜 나비로도 데려왔네.’

그것이 르나르가 홀려낸 나비를 다시 보게 된 내 감상이었다.

“이 나비 좀 봐요. 꼭 자기랑 놀아달라는 것 같지 않아요?”

새침하게 물어보니 르나르가 나를 봤다.

그러곤 싱긋 미소 지으며,

“역시 똑똑하시네요, 대공녀님. 나비의 속마음을 그렇게 정확히 이해하시다니요.”

라고 말하곤 능글맞게 웃었다.

어쩐지 조심성이 없는 르나르였다.

코웰 가문에서 나비를 홀렸을 때야 우연으로 칠 수 있을 정도였지만, 자꾸 이러면 의심받을 수 있을 텐데.

그가 마법사라는 것.

그레이시아나 제국에선 마녀나 마법사라는 걸 잘 숨겨야 하는데, 르나르를 보면 꼭 날 경계 대상으론 삼지 않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자객 사건이 있고서는 더더욱.

무엇이 르나르를 이렇게 바꾸어버린 걸까?

“그래서 어떡하실 생각이세요, 대공녀님? 나비와 놀아주실 건가요?”

르나르가 날 채근했다.

크고 예쁜 눈을 일부러 축 늘어뜨린 채였다.

‘저 산책하자고 매달리는 강아지 표정….’

“고민 중이에요. 나비가 이렇게 예쁘니까.”

이젠 내 어깨에 앉은 노랑나비를 내가 슬쩍 보곤 말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말하자, 별안간 르나르의 귀 끝이 붉어졌다.

그러곤 헛기침했다.

……왜?

나비가 예쁜 게 왜.

“나비가…, 예쁜가요…?”

르나르가 이상한 질문을 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 지금껏…. 자신을 나비에 비유해온 건 아니겠지…? 나비를 다룰 수 있다는 건 아예 숨길 생각이 없었고…?’

내가 혼란스러워하는 와중, 르나르는 여전히 자신이 예쁘단 소릴 들은 것처럼 귀 끝을 붉혔다.

어떻게 그 뜻이 아니었다고 말해줘야 할까?

물론 르나르는 이 나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미색이 뛰어나긴 하지만….

“이렇게 예쁘게 생긴 ‘나비’는 처음 보거든요.”

내가 ‘나비’를 좀 더 강조하며 르나르에게 말했다.

그러자 르나르가 이제 이해했다는 듯 ‘아’하는 표정을 짓더니 눈을 찡긋거리며 웃었다.

스스로도 제 오해가 우스웠던 모양이었다.

그러다 불현듯 얼굴이 환해지며 읽던 책을 덮고 내게 물었다.

“대공녀님, 그 나비가 마음에 드신 거면 그 종의 나비들을 모아 온실을 만들어드릴까요?”

온실?

나비 온실?

현실 세계에 있는 곤충생태관, 뭐…, 그 비슷한 걸 생각한 걸까?

“그 애긴 닫힌 공간을 만들어 그 안에 나비들을 가둬주겠단 말인가요?”

확실히 이해하고자 내가 묻자 르나르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렇게 하면 대공녀님께서 원하실 때 언제든 그 나비들을 보실 수 있을 테니까요. 예쁘게 꾸며드릴게요.”

르나르는 다소 흥분한 상태였다.

그의 뒤에서 헬리콥터 프로펠러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개의 꼬리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르나르의 제안은 그렇게 끌리는 일은 아니었다.

산 생물을 굳이 가두는 취미는 내겐 없었으니까.

“제안은 고마워요. 하지만 괜찮아요. 물론 이 나비가 예쁘긴 하지만…. 예뻐서 갇혀있어야 한다면 나비가 너무 불쌍하잖아요?”

“…….”

완곡히 거절하는데, 갑자기 르나르가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아까보다 더 이상한 질문을 했다.

“대공녀님 혹시…. 갑갑하십니까…?”

갑갑?

내가?

이번엔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빤히 보니, 르나르가 왜인지 기죽은 표정으로 나를 마주 봤다.

쭉 내려간 눈꼬리가 평소처럼 일부러 내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정말 이해할 수 없게도 그 얼굴이 어쩐지 내겐 치명적이라….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잡고 측면으로 돌려버렸다.

마주 보고 있기가 어려워서.

그러자 르나르 눈꼬리가 더욱 처연하게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고개를 돌렸으면 됐단 생각이 든 건 이미 행동을 벌이고 난 다음이었다.

‘미안해, 내 길고양이….’

강아지 같던 그가 또다시 고양이로 보이게 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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