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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17화 (17/100)
  • 17화

    히아신스

    르나르의 자작극이 벌어진 그 날 이후 나는 르나르를 피하기 시작했다.

    르나르에 대한 화는 거의 풀렸지만, 그의 앞에서 눈시울을 붉히고 만 것이 다소 민망해진 탓이었다.

    그런데 그날 일이 불편했던 것은 나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날 이후, 날 대하는 르나르 분위기 또한 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뭐랄까.

    예전에는 원작 계략남 특유의 여우 같은 모습이었다면, 지금은…

    어딘가 나사 하나가 풀린 것 같달까…?

    우연히라도 나와 마주치면 르나르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행동했다.

    거짓말을 하고 계략을 쓰면서도 무척이나 당당하고 오만했던 예전의 모습과는 사뭇 달라진 모양새였다.

    요즘 르나르는 정말 이상했다.

    *

    더글라스는 요즘만큼 집사 생활이 힘든 적이 없었다.

    “분명해. 로즈가 아직 나한테 화가 난 거야.”

    그의 도련님이 이토록 별나게 군 적이 없었으므로.

    “일부러 나를 피하는 거야. 아직 화가 많이 나서. 대체 어떡하면 좋은 거지?”

    요 며칠간 르나르는 입만 열면 엘로즈 얘기를 했다.

    귀에 딱지가 다 앉을 지경이었다.

    ‘계략을 써서가 아니라 다쳤다고 화나신 것 같은데 그럼 좋은 거 아닌가? 영 도련님께 관심 없으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거면 그냥 좋은 것 같은데. 근데 왜 저렇게 신경 쓰시는 거지?’

    더글라스는 전전긍긍하는 르나르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뱉을 수가 없었다.

    르나르가 더글라스에게 화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왜 말이 없어? 이 비겁한 배신자야.”

    르나르가 더글라스를 노려봤다.

    “제가 왜 배신잡니까? 전 정말 억울합니다.”

    더글라스가 울상을 만들어 보였다.

    “우리가 같이 세운 계획이었는데 너 혼자 살겠다고 도망쳤잖아. 벌써 잊은 거야, 이 야비한 배신자야?”

    “엄밀히 말하면 계획은 도련님께서 세우셨고 전 동의만 해드렸죠.”

    “괜찮은 생각인 것 같다며. 여자들은 자신을 구해주는 남자에게 약하다며.”

    “동화책에서 본 겁니다. 연애 고자인 제 말을 믿으셨습니까?”

    “장난해, 지금?”

    “입 다물겠습니다.”

    집무실 창문으로 따스한 봄볕이 쏟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날 선 르나르 눈빛에, 더글라스는 허리께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도련님도 그때 대공녀님 표정 보셨잖아요. 당장 안 나가면 정말 제 목을 따 버리실 것 같았다니까요?”

    “그래서 너는, 나만 목이 따이길 바랐다는 거야? 앞으로도 넌 누가 내 목을 노리면 보고만 있겠네? 도와주면 네가 위험해지니까?”

    “에이, 무슨 말씀을 또 그렇게… 이렇게 도련님 몸통과 머리가 잘 붙어 있으니 정말 다행….”

    “그걸 말이라고 해?”

    “입.”

    더글라스가 스스로 제 입을 막았다.

    그러다 엘로즈의 차갑게 식은 눈동자를 동시에 떠올린 두 사람이 흠칫, 몸을 떨었다.

    “엘로즈 화를… 풀어줄 방법이 정말 없을까…?”

    르나르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여자 화를 푸는 데는 당연히 꽃이 최고가 아닐까요? 여자들은 꽃을 좋아하니까.”

    더글라스가 나름 부지런히 머리를 굴려 생각해 낸 방법이었다.

    하지만 르나르는 그런 더글라스의 답변이 영 만족스럽지 않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여자들이 꽃을 좋아하는 건 나도 알아. 올렌도 자식을 호위를 벌써 5년을 했는데 모를 수가 없지.”

    “그 황자님은 아직도 만나는 여자마다 그렇게 꽃을 보내신답니까? 그 꽃은 사실 도련님께서 보내시는 거고요?”

    “덕분에 보던트 거리 꽃집에 갔다가 엘로즈를 만나게 됐으니 고마운 일이긴 하지. 평소엔 아주 귀찮지만.”

    “그래도 파란 장미 심으려고 온실 지으라 하셨을 땐 정말 놀랐었습니다.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이란 그 꽃의 꽃말 이용하려고 그러신 거잖아요, 그 황자님. 만나는 여자들에게 이루어지자고 그 꽃 보내고 싶어도 바깥에선 그 꽃을 구하기가 어려우니까. 사랑의 ‘사’ 자도 제대로 모르시는 분이….”

    “파란 장미…. 맞아. 엘로즈도 꽃을 좋아하는 것 같기는 해. 그 파란 장미를 봤을 때 좋아했었거든. 근데 로즈는 지금 화가 난 거잖아. 근데 그런 평범한 선물이 먹힐 거라고?”

    “평범한 선물이 대공녀님께 먹힐지 안 먹힐지는 모르겠지만 불확실한 만큼 오히려 평범한 쪽으로 가시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괜히 이상한 짓 했다가 점수 더 깎아 먹게 될 수도 있고….”

    “…일리 있네.”

    ‘후.’

    르나르 인정에 더글라스가 르나르 안도의 한숨을 몰래 내뱉었다.

    ‘이 의견을 밀어붙이자. 이 대화를 며칠씩 더 할 순 없다.’

    그것이 그 순간 더글라스가 하게 된 생각이었다.

    “사람들은 좋아하는 걸 보면 화가 풀리잖아요. 그러니 아무리 꽃 선물이 대단한 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좋아하는 꽃을 보면…, 대공녀님 화도 당연히 풀리지 않으실까요? 지금으로서는 가장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데요? 도련님께도 터넛 황제 얼굴이 묵사발이 된 꼴을 보면, 당연히 화가 조금은 풀리지 않으시겠어요?”

    이에 조금 흔들리는 듯 르나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난 사실 여자들이 꽃을 좋아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아. 종자식물의 번식 기관 따위를 왜 좋아하는 거지?”

    “음, 그건…. 그 종자식물의 번식 기관이 예쁘니까요…?”

    “예쁘면 다 좋아해야 해? 그건 아니지. 네 논리가 맞는다면 그럼 나도 엘로즈를 좋아해야 하고 너도 엘로즈를 좋아해야 하는 거잖아.”

    “진심…이십니까…?”

    “네 얘기가 맞는다면 그렇게 되어야 하는 거잖아.”

    더글라스는 순식간에 대화 의지를 상실했다.

    어디를 어떻게 어떤 식으로 짚어야 하는 건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러면 저도 뭐…, 대공녀님을 좋아하나 보죠…….”

    될 대로 되란 식으로 지껄인 말에 르나르의 눈빛이 흉흉해졌다.

    사나운 기세에 더글라스가 몸을 움츠렸다.

    결국 꽃은 아무래도 최상의 아이디어는 아니었던 것 같다며 더글라스가 백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 후로 두 사람은 꽃보다 나은 해결책을 찾아내지 못했기에, 결국 르나르는 한숨을 크게 내쉬고 집무실을 나섰다.

    엘로즈에게 선물할 꽃을 직접 사기 위해서였다.

    *

    르나르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이른 저녁을 먹고 방으로 돌아가던 길.

    식당 문밖 바닥에 웬 꽃 한 송이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뭐지?’

    바닥에서 들어 살펴보니, 초록색 꽃대 하나에 연보라색 작은 꽃이 여러 개 달린 꽃이었다.

    ‘이 꽃 이름이 뭐였더라?’

    몇 걸음 더 걷다 보니, 똑같은 꽃이 또 바닥에 놓인 것이 보였다.

    혹시나 싶어 고개를 들어 보니 내 방으로 향하는 복도를 따라 같은 꽃들이 일정 간격을 두고 놓여 있었다.

    ‘르나…르?’

    그 이름 세 글자가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건 왜였을까?

    꽃을 주우며 가는 것은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다마고치 육아와는 또 다른 재미였다.

    꼭 내가 그림 형제의 동화 <헨젤과 그레텔> 속 헨젤이나 그레텔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기 때문이었다.

    방 근처에 다다랐을 때, 마지막으로 남은 세 개의 꽃에는 각각 쪽지가 달려있었다.

    [미안해요.]

    [화 많이 났어요?]

    [다신 안 그럴게요. 용서해주세요.]

    쪽지 각각에 적힌 내용이었다.

    작게 웃음이 났다.

    내가 그를 어색해한 걸 내가 화 난 것으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이름 모를 연보라색 꽃송이를 한 아름 안은 내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그곳에 꽃이 또 있었다.

    왜인지 창문 아래쪽으로 옮겨진 장식용 테이블 위엔, 내가 주워온 꽃과 같은 꽃이 중심이 된 꽃다발이, 투명한 화병 하나 가득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엔 나타샤의 꽃집에서 사용되는 꽃말 팻말이 놓여 있었다.

    [히아신스 : 영원한 사랑, 미안합니다.]

    ‘…원작의 르나르가 원래 이런 성격이었던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토록 신경 쓰는…. 아닌데….’

    그렇다면 이것도 날 꼬시기 위한 계략의 일환인 건가?

    꼬시는 게 아님, 친구로라도 잘 지내려고….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 순간 별안간 똑똑, 하고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커튼이 닫혀있었다.

    ‘분명 열어두고 나갔었는데?’

    들고 있던 히아신스 꽃다발을 화병 앞에 놓아둔 뒤 내가 커튼을 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숨을 멈추게 됐다.

    “……아!”

    눈앞이 어지러웠다.

    열린 커튼 틈으로 반짝이는 진홍빛 노을과 함께 하늘색 나비 수십 마리가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시야를 어지럽힌 나비들이 사라졌을 때, 나는 창밖에 선 르나르를 볼 수가 있었다.

    짙은 보라색 히아신스 꽃다발을 든 르나르.

    반짝이는 노을빛을 배경으로 한 르나르.

    선명한 진홍색 노을이 그를 물들여, 르나르는 발갛게 빛나고 있었다.

    르나르가 창문 쪽으로 한 발 짝 다가섰다.

    그러곤 들고 있던 꽃다발을 조심스럽게 내게 내밀었다.

    “대공녀님.”

    내가 대답 없이 그를 봤음에도 그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하려던 말을 이었다.

    “저한테 왜 화가 나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다시는 대공녀님을 속이지 않겠습니다.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절 용서해주면 안 될까요…?”

    ‘다시는 날 속이지 않겠다니.’

    참 그답지 않은 말이었다.

    지금 이 상황을 모면하려고 그냥 하는 말이겠지,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런데 르나르가 이런 거짓말이라도 하는 것이 조금은 이해가 되기도 했다.

    내가 자신의 악몽에 도움이 된다고 믿고 있으니 르나르는 절박할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나는 그에게 차도 가져다주지 않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내가 한참 대답이 없으니, 르나르의 적갈색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꼭 초조한 것처럼.

    요 며칠 나사 풀린 것 같던 그의 모습이 그 위로 겹쳐 보였다.

    내 길고양이의 초조한 모습은 나까지 불안하게 만들었다.

    내가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고양이를 안심시키기 위해서였다.

    “화나지 않았어요.”

    내 말을 들은 르나르는 침묵을 지켰다.

    여전히 긴장한 표정이었다.

    “그게…, 정말이십니까…?”

    이내 그가 내게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긴장했던 르나르 눈꼬리가 풀어졌다.

    다음 순간, 르나르가 봄날의 노을 같은 흐드러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말 걱정했습니다. 대공녀님께서 화가 많이 나셔서 앞으로도 계속 절 모른 척하실까 봐.”

    악몽 때문에 내가 필요할 르나르는 마치 그저 내가 필요한 것인 듯 밝게 웃었다.

    “화난 게 아니시라면 이제 절 피하지도 않으시는 거죠? 그런 거죠?”

    내게 묻는 르나르의 눈빛에 다시 초조함이 깃들려 했기에 내가 재빨리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르나르가 이제 안심된다는 듯 웃었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을 타고 그의 달고 시원한 머스크 향이 내 코끝에 닿았다.

    그 향에 괜히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어 내가 르나르에게 볼멘소리로 말했다.

    “경 때문에 제 방이 꽃밭이 되겠어요. 한두 송이도 아니고 꽃다발만 지금 몇 개인지….”

    그 볼멘소리 때문에 더 부끄러워질 소리를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그 꽃밭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은 대공녀님이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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