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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16화 (16/100)
  • 16화

    자객

    놀란 내가 트레이를 놓쳤다.

    쨍그랑-!

    바닥에 떨어진 트레이가 요란한 소리를 냈다.

    찻잔이 바닥을 굴렀고 찻물이 카펫을 적셨다.

    나는 처음엔 내가 본 섬광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새까만 어둠을 얇게 가로지르는 파란 선.’

    내가 본 그 섬광의 모습은 그랬다.

    그때,

    “대공녀님!”

    날 부르는 르나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시꺼먼 형체가 멀어졌다.

    어느새 내 바로 앞까지 와 있던 시꺼먼 형체.

    르나르가 그 형체의 뒷덜미를 낚아채 던져버린 것이었다.

    그것이 방 안 구석으로 날아갔고, 르나르가 그쪽으로 향했다.

    그다음엔 금속끼리 맞부딪히는 쨍한 소리가 어둠에 물든 방 안을 시끄럽게 울렸다.

    챙—

    챙-

    ‘익숙한 소리.’

    대련하던 미르엣과 에반이 떠오른 건 그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깨닫고 보니 서로를 향해 검을 휘두르는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 사람은 르나르였고, 다른 사람은 얼굴을 복면으로 가린 남자였다.

    ‘아니, 여자일 수도.’

    덩치가 그렇게 큰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황자님을 노리는 자객들에게서 황자님을 보호하기 위해 예전부터 황자님 옷을 입고 황자님인 척할 때가 잦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많이 놀라셨죠? 잠들었을 때 자객들의 습격이 많았던지라 몸이 먼저 반응을….」

    르나르가 내게 한 적 있는 말들이 차례로 머릿속을 지나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르나르가 자객에게 밀리고 있었다.

    ‘소드 마스터인 르나르가 밀린다고?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자객이 검을 휘둘렀다.

    르나르의 검이 날아갔다.

    오싹해진 내 등허리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겨, 경비병…!!!”

    자객이 무기 없는 르나르에게 달려들려는 것을 보며, 내가 무의식중에 소리쳤다.

    그러자 자객이 내 쪽을 봤다.

    다음 순간 그는 내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가 가까워지는 것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보였다.

    꼭 도로 위에서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마주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때, 눈앞에 르나르가 나타났다.

    그의 몸이 활처럼 휘었다.

    붉은 피가 그의 등 뒤에서 분수처럼 솟구쳤고, 르나르가 휘청였다.

    그 모든 순간은 느리게 재생된 무성영화 같았다.

    세상에 소리가 돌아온 건 르나르의 무게를 내가 느끼게 된 다음이었다.

    “르나…, 르나르…!”

    내 위로 무너진 르나르를 품에 안은 내가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그런 내 옆으로, 막 도착한 저택 기사들이 지나갔다.

    자객이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쪼, 쫓아…!”

    “놓치면 안 돼!”

    “잡아…!”

    창문을 넘어 달아나는 자객을 쫓는 기사들의 소리가 웅웅 거리는 형태로 들렸다.

    꼭 물속에서 듣는 소리 같았다.

    그런데 그 와중에, 선명하게 귀에 꽂히는 목소리가 있었다.

    “대…대공녀님….”

    멍하니 기사들이 사라진 쪽을 보던 내가 목소리의 주인 쪽으로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곧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날 보는 르나르가 보였다.

    그가 날 향해 손을 뻗었다.

    내가 얼른 그 손을 붙잡았다.

    “괘, 괜찮아요?! 많이 아프죠?! 어떡해, 피가…….”

    울먹이는 내 아래서 르나르가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입을 벙긋거렸다.

    “대공…, 대공녀님…. 레스….”

    “뭐라고요?! 잘 못 알아듣겠어요, 다시 말해봐요.”

    무언가 중요한 말일 것 같았다.

    내가 급하게 그쪽으로 허리를 숙였다.

    르나르의 뜨거운 숨결이 내 귓바퀴에 닿았다.

    “레스…, 드레스에… 피가…….”

    허리를 세운 내가 지금 그게 중요하냔 표정으로 노려보니, 피로 엉망이 된 그가 능글맞게 씩 웃었다.

    그러다 통증이 온 듯 이내 찡그렸지만.

    르나르의 등 뒤에서 덩어리진 피가 울컥 쏟아졌다.

    이미 엉망이던 카펫이 다시 한번 엉망이 됐다.

    “…입 다물어요. 아픈데 말하면…, 아픈데 말하면 힘들잖아….”

    내가 속상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자 그가 다시 웃었다.

    내가, 이 와중에 르나르가 신경 쓰는 내 드레스 치맛자락으로 그의 등을 눌렀다.

    조금이라도 지혈이 되길 바라면서였다.

    그때, 더글라스가 나타났다.

    “대공녀님? 이게 대체 무슨 소란…, 세상에, 황자님……!”

    “빨리 주치의를 불러줘요, 더글라스…! 최대한 빨리요…!”

    돌아온 더글라스는 주치의, 하인들과 함께였다.

    하인들은 다친 르나르를 침대 위로 옮겼다.

    주치의는 르나르를 진찰하고 치료했다.

    그리고 잠시 후,

    “상처가 깊긴 하지만 다행히 목숨에 지장은 없을 겁니다. 아무래도 흉터는 좀 남으시겠지만….”

    주치의의 설명을 들은 내가 무너지듯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다행…, 다행이야….’

    일반 사람 기준으로 생명에 지장이 없는 것이라면 르나르는 무사할 것이었으니까.

    마법사들은 일반 사람들보다 회복 능력이 좋다고 했으니까.

    긴장이 풀린 내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게다가 흉터 또한 남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의 몸에 존재하는 흉터라곤 마력이 발현되기 전인 어렸을 적 생긴 흉터들뿐이었다.

    정말 다행인 일이었다.

    나는 더는 르나르 몸에, 그의 손가락 흉터 같은 상처가 남지 않길 바랐다.

    그 상처가 나를 구하려다 생긴 것이라면 더더욱.

    얼굴을 감쌌던 손을 내리고 보니 주치의의 얘길 들은 더글라스도 안심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문득 기사단이 자객을 잡았을지가 궁금해졌다.

    “더글라스, 기사단 쪽 소식은 아직이에요? 벌써 시간이 꽤 지났잖아요.”

    “계속 쫓고 있는 모양입니다. 아직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럼 기사들을 더 보내세요. 온 수도를 다 뒤져서라도 꼭 찾아내라고 하세요. 누군진 몰라도 잡히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 날이 밝으면 코웰 가문에도 연락을 넣을 거예요. 아버지께서 나서 주시면 범인은 물론 그 배후의 인물까지 찾기가 분명 쉬울 테….”

    그런데 그 순간,

    ‘배후의 인물’이란 단어를 들은 더글라스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의아해진 내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때, 누군가 날 잡는 것이 느껴졌다.

    애틋한 그 감각에 아래를 보니, 언제 정신 차린 건지 모를 르나르가 마취약에 취해 몽롱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르나르가 붙잡은 건 내 새끼손가락이었다.

    “난 괜찮아. 주치의도 괜찮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뒷일은 더글라스에게 맡기고…. 너는 얼른 방에 돌아가서 쉬어. 가문에도 연락 넣지 않아도 괜찮아. 더글라스가 다 알아서 할 거야.”

    아니다, 나도 돕겠다고 말하려고 했다.

    날 구하려다 당신이 그렇게 된 것인데, 어떻게 내가 그냥….

    그런데 다음 순간, 무언가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더글라스고 르나르고 내가 더는 자객을 쫓지 않길 은근하게 바란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당하고만 살지 않는 르나르가 왜….’

    그리고 그때, 원작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살을 내어주고 상대방의 뼈를 끊는 건 검투장에서 르나르의 특기였다.

    육참골단.

    팔 하나를 공격하라고 내어준 뒤 상대의 심장에 칼을 꽂아 넣는 그런 식이었다.

    ‘설마 나를 살리고…, 내 호감을 사려고…? 그래서 제 몸을 다치게 하면서까지…?’

    평소에도 자신을 아낄 줄 모르는 르나르의 성향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의심 가능한 일이었다.

    어쩔 줄 모르고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는 더글라스까지 고려하니 오해일 가능성이 오히려 더 적어 보였다.

    판단이 거기까지 이르자, 나는 내 새끼손가락을 잡은 르나르의 손을 자연스레 뿌리치게 됐다.

    르나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봤다.

    “그럼 이제 황자님께선 괜찮으신 거죠? 더글라스, 주치의 선생님을 방으로 모셔다드리세요.”

    갑자기 찬 바람 부는 내 분위기에 르나르는 물론 더글라스에 주치의까지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모셔다드리라니까요? 방금 제 말이 이해하기 어려워요?”

    내 기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이 느껴졌는지, 눈치 빠른 더글라스가 주치의를 데리고 급하게 방 밖으로 사라졌다.

    육중한 방문이 쿵 하며 닫히는 소리를 냈다.

    르나르의 애절한 눈빛이 사라진 더글라스 뒤를 쫓았다.

    *

    르나르는 불안한 감정이 들었다.

    분명 아까까진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순풍을 만난 항해처럼.

    그는 계획대로 몸을 던졌고, 엘로즈를 구했다.

    목숨에 지장 또한 없었다.

    자객으로 고용한 녀석은 자신 있다더니 실력이 좋은 녀석이 맞았다.

    일부러 져 주려 해도 상대의 실력이 지나치게 미천하면 아무래도 티가 났을 터.

    하지만 소년은 르나르를 상대로도 적당히 제 역할을 잘해주었다.

    르나르는 그 소년을 아예 그의 수족으로 들일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엘로즈가 더글라스를 내보냈다.

    봄날의 라벤더 같은 그녀의 연보라색 눈동자가 서릿발보다 차가워진 듯했다.

    르나르가 방문 쪽을 봤다.

    르나르만큼 눈치 빠른 더글라스는 이미 낌새를 눈치채고 걸음아 날 살려라 사라진 뒤였다.

    르나르는 더글라스에겐 따로 복수하겠노라 다짐했다.

    그때, 온도가 낮아진 라벤더색 눈동자가 르나르를 직시했다.

    르나르가 붕대는 감고는 있어도, 웃통을 벗었단 사실조차 잊은 것 같았다.

    르나르가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했다.

    엘로즈가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스스로를 아프게 하는 건.”

    “…….”

    “멍청한 거예요.”

    “…대공녀님?”

    르나르는 직감할 수 있었다.

    엘로즈가 눈치챈 것이었다.

    그의 계략을.

    그녀의 수호천사 자리가 탐났던 그의 계획을.

    그런데 그때, 엘로즈의 눈 밑이 붉어졌다.

    르나르는 당황했다.

    “대공…, 대공녀님…?”

    르나르의 심장이 저릿해졌다.

    그는 지금 놀란 것 같았다.

    자신이 다쳤다고 우는 사람을 처음 보게 된 것이었기에.

    불그레해진 그녀 눈 밑에 심장이 아닌 아래쪽은 대체 왜 반응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차오른 눈물을 두 손으로 꾹꾹 눌러 닦아낸 엘로즈가 사납게 르나르를 노려봤다.

    “약속해줘요, 앞으론 당신 몸을 무기로도 방패로도 삼지 않겠다고. 도구로 삼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어요?”

    “대공녀님….”

    “약속해요. 약속하지 않으면, 다시는 르나르를 안 볼 거예요.”

    “약속….”

    “…….”

    “하겠습니다….”

    르나르가 아직도 그녀가 자신 때문에 우는 게 믿기지가 않아 느릿느릿 말했다.

    엘로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순간, 르나르는 조심스럽게 엘로즈 손을 잡았다.

    “울지 마세요, 대공녀님. 대공녀님께서 우시니까…, 정말 어떡해야 할질 모르겠네요….”

    한 치의 거짓 없는 진심이었다.

    “미치겠기도 하고…….”

    그 역시 진심이었다.

    엘로즈는 방금 말의 진짜 의미는 알 수 없을 것이었지만.

    르나르가 깊게 들이마셨던 숨을 천천히 내뱉었다.

    그의 어머니조차 복수 도구로밖에 보지 않았던 것이 르나르였다.

    그런데 그런 르나르가 다친 것을 보고 엘로즈가 눈물을 참고 있었다.

    평소엔 그의 손길에 조금도 반응하지 않는 바로 그 얼음 조각이.

    그런 그녀를 어찌해주면 좋은 건지 르나르는 정말 알 수가 없었다.

    한참을 머뭇대다 엘로즈를 당겨 침대에 앉힌 르나르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그녀를 안았다.

    겹쳐진 두 사람 위로 부드러운 달빛이 내려앉았다.

    마치 두 사람을 가려주는 커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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