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밤마다
하얀 달이 훔쳐보는 르나르의 침실.
“대체 왜지?! 왜 듣지 않는 거냐고…!!”
막 악몽에서 깬 르나르가 신경질적으로 던진 찻잔이 허공을 가르고 맞은편 벽으로 날아갔다.
벽에 부딪힌 찻잔은 맑게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났다.
르나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르나르는 리베로 차를 마시고 잠이 들었었다.
악몽을 꾸지 않기 위해서였다.
엘로즈가 르나르를 재워준 어젯밤, 르나르는 악몽을 꾸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그는 크게 놀랐다.
악몽 없는 숙면을 취했기 때문이었다.
가히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오늘 르나르는 잠들기 전 리베라 차를 마셨다.
혹시 엘로즈가 가져온 그 차의 향이 그에게 영향을 준 건 아닐까 해서.
하지만 향도 열심히 맡고 차도 남김없이 마셨는데 그 차는 전혀 효과가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변수는 하나였다.
“엘로즈.”
직접 뱉은 그 이름 석 자가 강렬하게 르나르 뇌리에 박혔다.
‘엘로즈를 침대로 데려와야 해. 데려와야 해…. 침대로….’
무의식중에 시작되는 집착.
그것은 아버지 터넛 황제 쪽 집안 내력이었다.
이불보를 꽉 쥔 르나르가 맑은 적갈색 홍채를 번뜩였다.
*
“제가…, 밤마다 차를 가져다줬으면 좋겠다고요…?”
잘못 들은 듯 되물은 말에 르나르가 확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르나르를, 티테이블이 아기자기 차려진 정원을 구경하던 황금빛 봄 햇살이 덮었다.
나와 르나르는 정원에서 티타임을 가지는 중이었다.
그 황금빛 봄 햇살에 르나르의 셔츠 단추가 반짝였다.
“차는 더글라스가 준비해 드릴 겁니다. 대공녀님께서는 그저, 준비된 차와 같이 제 방에 들어와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가끔 빨리 잠들라고 쓰다듬어라도 주시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고요.”
내게 부탁하는 르나르는 당당했다.
마치 자신이 받아야 할 것을 정당하게 요구하는 것 사람처럼.
어이가 없어 빤히 보고 있으려니 잔뜩 오만한 얼굴을 한 그가 무의식중에 혀를 내 입술을 축이는 게 보였다.
사실 긴장한 것이었다.
내가 거절할까 봐.
“이유를…. 그런 부탁을 하시는 이유를 알려주시겠어요?”
내가 묻자 르나르가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내 어깨너머 정원의 먼 곳을 향했다.
나는 그런 그를 인내심 있게 기다려주며 내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이미 꽤 식은 그 차를 마시고 내려놓았을 때, 르나르의 눈길은 다시 내 쪽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제 결정한 걸까? 어떤 답을 줄지?’
“사실 악몽을…, 매일 꿉니다.”
르나르가 솔직하게 말했다.
“그런데 대공녀님께서 제게 리베로 차를 가져다주신 그날만큼은, 악몽을 꾸지 않았습니다. 대공녀님께서 리베로 차를 가져다주시고 저를 쓰다듬어 재워주신 그날이요. 혼자서 그 차를 마셔 봤는데…. 소용이 없었습니다. 변함없이 악몽을 꿨습니다. 그래서 대공녀님께서 제게 차를 가져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날과 똑같이요. 제가 악몽 없이 잠을 잘 수 있도록.”
나는 당황했다.
르나르가 아무런 계략 없이 이렇게 솔직하게 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내 당황한 표정을 오해한 건지, 르나르가 자조적인 얼굴을 하고는 덧붙였다.
물론 보통 사람이라면 믿기 어려울 것이 맞았다.
매일 악몽을 꾼다는 건 동화 같은 이야기였고, 오히려 꼬시고 싶은 여자를 침대 위로 불러들이는 수작으로 들릴 가능성이 높았으니.
하지만 그 동화 같은 일이 사실인 걸 아는 유일한 사람이 소설 속에 빙의한, 동화보다 더 동화 같은 현실 속에 놓인 원작을 아는 나였다.
때문에 그의 솔직함은 내게 힘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얼간이처럼 보여도 솔직할 수밖에 없을 만큼 르나르가 절박하다는 게 내게 전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
계략과 거짓말이 습관이자 일상인 르나르가 이렇게까지 솔직해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마음은 급한데 얼마나 방법이 없었으면….’
게다가 놀라웠다.
그날 악몽을 꾸지 않았다니.
정말 내가 그의 악몽에 영향을 끼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캐스티나 없이 악몽을 꾸지 않을 수 있었단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어쩌면 르나르는 애정 어린 손길 이 필요했던 건 아니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가 그날 아이를 재우는 엄마의 마음으로 르나르를 쓰다듬었으니.
원작에 따르면 르나르는 어린 시절 친모한테 어리광 한 번 부리지 못했으니.
물론 르나르의 악몽이 넘치는 마력 때문이란 걸 알고 있었기에 나는 문득 떠오른 그 가설을 오래 고려하진 않았다.
어쨌든 기뻤다.
어린 시절 날 살려준 이를 내가 도울 수도 있겠다는 것이.
정말 내가 도움이 되는 게 맞다면.
“좋아요.”
잠깐의 침묵 끝에 내가 말했다.
“그냥 밤마다 방으로 차만 가져다주면 되는 거죠? 가끔 쓰다듬어주고?”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는지 르나르의 눈이 커졌다.
나는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다 르나르의 악몽이 완전히 사라진다면 그것도 만족스러울 것 같고.
‘내 길고양이.’
“좋…좋다고 하신 겁니까, 방금…? 진심이세요…?”
르나르는 오만한 표정으로 부탁할 땐 언제고 계속 당황한 상태였다.
“…무를까요?”
“……아뇨! 무르다뇨. 무슨 그런 무서운 말씀을…. 그럼 당장 오늘 밤부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르나르가 왜인지 얼굴을 붉혔다.
금빛 햇살과 어우러진 발그레한 그 얼굴이 예뻐 나는 살짝 미소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
엘로즈는 그날 이후 밤마다 더글라스가 준비해준 리베로 차를 챙겨 르나르 방을 찾아갔다.
그녀는 보통 르나르에게 차를 건네준 뒤 그가 마시는 모습을 보다 방을 나오곤 했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르나르가 잠들 때까지 지켜보기도 했는데, 그러다 그가 잠든 것 같으면, 한동안 잠든 르나르 머리를 쓰다듬어주다 떠났다.
그리고 이 일이 몇 번 반복된 뒤 르나르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악몽을 없애주는 건 역시 차가 아니었다.
엘로즈였다.
정확히는 엘로즈와 몸이 닿는 것.
르나르가 악몽을 꾸지 않은 날은, 그가 이미 잠든 줄 알고 엘로즈가 머릴 쓰다듬어주고 나간 날들 뿐이었으니.
르나르는 조금 곤혹스러워졌다.
이 사실을 확인하고 나니 엘로즈를 볼 때 그녀의 몸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녀와 자고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커지는 갈망과 달리 엘로즈를 가질 방법이 요원했기 때문이었다.
억지로 안을 수조차 없었다.
르나르에게 엘로즈는 여왕님이었다.
높은 신분, 고귀한 핏줄.
그가 감히 함부로 다룰 수 없는, 그런 대단한 여왕님.
차를 가져다 달라고 했을 때처럼 대놓고 부탁해볼까 하는 생각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냥 밤마다 방으로 차만 가져다주면 되는 거죠? 가끔 쓰다듬어주고?」
거기까지가 마지노선인 듯한 여왕님께 동화 같은 악몽 때문에 같이 침대를 뒹굴어달라고 부탁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가 있을 것 같았다.
사실 정원에서 거절당하지 않은 것조차 기적으로 생각하는 르나르였다.
「사실 악몽을…, 매일 꿉니다.」
솔직했던 건 충동이었다.
그런데 충동적으로 솔직해졌던 순간, 르나르는 두려워졌다.
그의 솔직한 간절함이 거절당할 것이.
그것은 계략을 쓸 때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계략에 실패할까 봐 두려웠던 적이 없는 것이었다.
이번 계략에 실패하면 다음 계략에서 성공하면 그뿐.
하지만 진심이 거절당하는 건 안 될 것 같았다.
특히 엘로즈에게는.
르나르는 진심을 내어놓고 벌벌 떨던 그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같이 자 달라고 대놓고 부탁하는 대신, 일단은 며칠에 한 번씩이라도 악몽을 꾸지 않게 된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하지만 어찌 됐든 엘로즈를 언젠가는 침대로 불러들일 생각이었다.
엘로즈와 밤을 보내고 나면 다시는 악몽을 꾸지 않아도 될 것만 같았으니.
그러려면 엘로즈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했다.
여자들이란 마음 가는 곳에 몸까지 건네주는 법이었으니.
어차피 그녀의 호감을 사는 게 최초 목적이었으니, 방향성이 크게 달라질 것도 없었다.
다만 이루어야 할 목표가 추가되었을 뿐.
이제 르나르는 어떻게 하면 엘로즈의 마음속에 그의 자리를 만들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중이었다.
그의 치열한 고민은 잉크빛 어둠이 걷히고 말간 해가 얼굴을 내밀 때까지 계속됐다.
*
밤마다 르나르에게 리베로 차를 가져다주는 일상이 계속되는 중이었다.
르나르의 악몽이 좋아지고 있다고 했다.
내가 차를 가져다주고부터, 매일은 아니어도 며칠에 한 번씩은 악몽을 꾸지 않는다고.
그 말이 아주 꾸며낸 것은 아닌지 르나르의 눈 아래 자리했던 파란 그늘이 서서히 옅어져 가는 게 내 눈에도 보였다.
나는 그게 신이 나 매일 밤 꼬박꼬박 그에게 차를 가져다주고 있었다.
그 일은 사실 조금 재미가 있기도 했다.
이곳에서의 내 일상이 특별할 것이 없었으니.
나는 보통 느지막이 일어나 씻고 뒹굴다 아침을 먹었고, 그 뒤론 책을 읽거나 차를 마셨다.
그러다 해가 지면 혼자 체스 연습을 하다 저녁을 먹고 잠이 들곤 했다.
르나르를 좀 더 재우기 위해 최근엔 그를 가르치는 것도 중단한 상태였기에, 나는 더욱 이곳에서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그런 내게 르나르를 밤마다 챙겨야 하는 것은 작은 소일거리이자 오락거리였다.
다마고치 게임 같았다.
르나르의 눈 밑 그늘이 하루하루 옅어지는 걸 보는 게 꼭 다마고치 캐릭터를 쑥쑥 키우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현실 세계에서 육아물 게임이 인기 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키우는 재미.’
그날도 내 다마고치 르나르에게 리베로 차를 가져다주던 날이었다.
하늘에 구름이 잔뜩 껴 유난히 어두웠던 것 말고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날이었다.
나는 더글라스가 르나르의 방문 앞까지 가져다 놓은 트레이를 들고 르나르의 방 방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없어 그냥 문을 열었다.
창문을 열어놓은 건지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리베로 차의 향긋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그런데 그때,
눈앞에서 시퍼런 섬광이 번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