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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14화 (14/100)
  • 14화

    집착이 시작된 날

    똑똑똑—

    다시 다락방으로 찾아간 내가 다락방 문을 두드렸다.

    더글라스가 챙겨준 리베로 차와 함께였다.

    다락방 안에선 또 대답이 없었다.

    ‘방엔 없었으니 분명 아직 여깄을 텐데….’

    조용히 문을 여니 간이침대 위에 잠든 형체가 보였다.

    수업 뒤 또 여기서 잠든 모양이었다.

    잠든 르나르는 차를 마실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문을 열고 다락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정말 잠들 때마다 악몽을 꾸는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가져온 트레이를 조심스럽게 협탁 위에 내려놓은 뒤, 나는 르나르를 살폈다.

    일렁이는 불빛 아래 그가 아까처럼 눈썹을 움찔대는 것이 보였다.

    침대 끝에 걸터앉은 내가 한동안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캐스티나를 찾지 못하면 이렇게 평생 악몽에 시달려야 할 텐데….’

    캐스티나를 찾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그녀를 찾기 위해 이용 중인 정보 길드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고용한 그치들은 영 쓸모가 없는 것 같았으니.

    그때,

    “으…으으으….”

    르나르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그의 이마에 식은땀도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어찌해줄 수가 없어 쩔쩔매던 차, 나는 르나르의 심장 위에 손을 얹고 다독여주기 시작했다.

    ‘자장자장.’

    그 손길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며.

    사실 그런 손길은 내가 받아보고 싶던 것이기도 했다.

    현실 세계에서 악몽을 꿨을 때마다, 이렇게 다독여주는 부모가 있길 바랐었으니.

    그런데 팔자를 그렸던 르나르 눈썹이 점점 일자가 되더니 그의 표정이 편안하게 바뀌어 갔다.

    ‘뭐…, 뭐지…?’

    신기하기도 했고, 기쁘기도 했다.

    혹시 르나르도 이런 따뜻한 손길이 필요했던 걸까?

    어린 시절 악몽을 꿨던 나처럼?

    나는 이내 그를 토닥이던 것을 멈추고 그를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엄마가 사랑하는 아이를 바라볼 때의 느낌이 어떨지를 상상하며.

    다정하게.

    그리고 최대한 따뜻하게.

    그러자 여전히 잠든 르나르가 사르르 미소 짓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만 같아 내가 멍하니 넋을 놨다.

    그를 따라 내가 미소 지었단 사실을 깨달은 건 그다음의 일이었다.

    당황해 집게손가락으로 입꼬리를 끌어내리고 있으려니, 르나르의 긴 속눈썹이 나비가 앉았다 떠난 꽃송이처럼 살짝 흔들렸다.

    잠시 후 여전히 잠에 취해 몽롱한 적갈색 눈동자가 램프의 일렁이는 불빛 아래 드러났다.

    “엘로…즈…?”

    그가 사탕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날 불렀다.

    “나…. 좋은 꿈을 꿨어….”

    여전히 꿈속인 듯 자랑한 그가 양 눈을 부드럽게 휘어 웃으며 속삭였다.

    그런 그가 아이만 같아 내가 그를 따스하게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런 우리 사이로 달빛이 내려앉았다.

    *

    엘로즈가 떠나고 다시 잠들었을 때, 르나르는 납치당했을 때의 꿈을 꿨다.

    정확히는 그를 납치한 마담에 관한 꿈.

    단순히 돈 때문에 르나르를 탐냈던 거라면 르나르는 그녀가 조금은 덜 끔찍할 것 같았다.

    하지만 마담은 장사와는 별개로 그를 원했다.

    르나르보다 나이 많은 아들도 있었던 여자가.

    그때부터 마력이 깨어있었다면 그 여자를 갈기갈기 찢어놓았을 것이라고 르나르는 늘 생각했다.

    마력이 깨어난 뒤 찾아갔지만, 그때 여자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납치극을 왕왕 벌여왔던 만큼 적이 많은 여자였으니.

    보통 악몽을 꾸면 끔찍했던 그 여자에 관한 것이었거나 아니면 검투장에서의 시간이었다.

    르나르는 사실 사람을 베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베이는 건 더더욱 싫어했고.

    마력이 깨어나고부터는 베일 일이 없어 괜찮았다.

    어쩌다 상처가 나도 마력 덕에 빨리 나았기 때문에, 그의 몸에 남은 흉터는 마력이 깨어나기 전 생긴 것들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력이 깨어나기 전 칼에 베일 때의 고통을 잊을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베거나 베이거나.

    매일 같이 벌어진 일이었다.

    그에게서 늘 풍기는 피 냄새 또한 싫었다.

    르나르에게 검을 쓴 뒤 오랜 시간 목욕하는 버릇이 있는 건 그 때문이었다.

    피라도 흠뻑 뒤집어쓰고 나면 르나르는, 살갗을 다 벗겨낼 기세로 물속에서 온몸을 격하게 문지르곤 했다.

    그런데 그 모든 기억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순간들이 생생하게 펼쳐지는 것이 그가 꾸는 악몽이었다.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지.

    그렇다고 잠을 아예 안 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잠들지 않는 요물이라도 되지 않는 이상, 아무리 마법사라도 잠은 자야 했으니.

    그렇다면 악몽을 꾸는 횟수라도 줄이고 싶어 르나르는 쪽잠으로 잠드는 일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 쪽잠조차 자지 않기에 요즘의 그는 지나치게 피곤했다.

    ‘엘로즈와 수업만 하지 않았어도 좀 더 나았을 텐데.’

    사실 엘로즈가 가르치는 지식들은 르나르에겐 불필요한 내용들이었다.

    대부분이 이미 아는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올렌도의 호위 기사로 지명됐을 때부터, 르나르는 툭하면 밤이 새도록 황궁 도서관에 틀어박히곤 했다.

    상당한 양의 지식을 독학으로 익힐 수 있었단 얘기였다.

    물론 엘로즈가 아는 것을 르나르가 전부 아는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가끔 정말 몰랐던 내용이 나오면, 르나르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라도 찾은 사람처럼 눈을 빛내곤 했다.

    그러면 엘로즈는 신이 나 그에게 더 많은 것을 가르쳤다.

    하지만 그런 몇 순간을 제외하면 르나르는 집중한 ‘척’을 한 것이지 진짜 집중한 게 아니었다.

    표정과 행동, 태도를 꾸며내는 건 르나르의 취미이자 특기였으니 크게 어려울 것은 없었다.

    엘로즈의 수업이 이루어질 때, 르나르는 그녀가 가르치는 것이 아닌 그녀에게 집중했다.

    그녀에게선 항상 향긋한 꽃향기가 났다.

    노란 꽃을 떠올리게 하는 꽃향기.

    엘로즈의 지식을 배우고 싶다는 건, 그녀와 함께할 시간을 만들 수 있는 가장 좋은 핑계일 뿐이었다.

    애초에 올렌도의 숙제를 대신 해야 한단 것부터가 거짓말이기도 했고.

    엘로즈의 향기에 취해 있을 때, 르나르는 문득문득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설마 이 여자를 좋아하게 된 건 아니겠지?’

    대답은 늘 ‘아니야, 그럴 리가.’였다.

    엘로즈를 마음에 품었던 그 어린 시절보다 한껏 영악해진 르나르였다.

    그런 그에게 엘로즈는 가장 이용하기 좋은 말이었고, 그뿐이었다.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물론 엘로즈의 외모는 단단한 돌멩이가 되어 날아와 잔잔한 르나르 마음에 이따금 파문을 일으킬 때가 있었다.

    여성 편력이 심한 올렌도 탓에 웬만한 제국 미녀들은 다 봐오며 지낸 르나르였지만, 그중 르나르에게 구애했던 절세 미녀도 셀 수 없이 많았지만, 엘로즈는 그들 중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예뻤다.

    잘 깎인 얼음 조각 같은 그녀를 르나르는 수업 도중 문득문득 빤히 바라보곤 했다.

    특히 엘로즈는 노려볼 때 예뻤다.

    그게 좋아 르나르는 때때로 그녀를 괴롭히고 화나게 하고 싶다는 가학심이 들기도 했다.

    또 그녀는 쏟아지는 별을 볼 때 예뻤다.

    무표정할 때는 그 나름의 매력이 있고….

    ‘심미적 충족감.’

    르나르는 엘로즈를 자꾸 보고 싶은 그의 감정을 그렇게 정의 내렸다.

    아름다운 것으로 시야를 채울 때의 만족감.

    잘 만들어진 예술품을 볼 때 무릇 인간이라면 가지게 되는 존중.

    그것인 것 같았다.

    르나르는 엘로즈 몸에 밴 귀족적 태도도 좋아했다.

    귀족은 싫어해도 살아있는 예법 책 같은 그녀는 좋았다.

    다른 사람이 하면 별 감흥 없을 간단 손짓과 고갯짓이 그녀가 하면 한 마리의 우아한 나비 같았다.

    ‘그리고 그녀가 풍기는 고풍적인 분위기….’

    르나르는 이런 걸 하나하나 떠올리다 이내 고개를 젓곤 했다.

    그럼에도 그는 그녀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용하고 싶을 뿐이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엘로즈와의 스킨십이 싫지 않은 것은 참 다행인 일이었다.

    그게 싫었으면, 엘로즈를 유혹해야 하는 이 일이 꽤 고단해졌을 테니.

    아마 그녀를 처음 본 게 그녀가 어렸을 때여서 그런 것 같았다.

    르나르가 닿기 싫어하는 것은 성인 여성들이었으니.

    ‘그런데 이상하게 엘로즈는….’

    닿는 게 싫지 않은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자꾸 더 닿고 싶어지곤 했다.

    그건 르나르가 살면서 처음 느껴본 감정이었다.

    ‘그렇지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르나르는 스스로 되뇌었다.

    그런데 그런 르나르가, 악몽을 꾸던 중 그를 토닥이는 손길을 느꼈다.

    “엘로…즈…?”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린 시야를 가득 채운 하얀 사람은 분명 그녀였다.

    백발에 가까운 은발을 허리까지 치렁치렁 늘어뜨린, 흰 피부의 그녀.

    몸집이 작아 작은 눈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엘로즈의 손길을 처음 느꼈을 때, 악몽 속에서 마주하던 남창가 마담의 얼굴이 점점 흐려졌다.

    바닥을 온통 물들인 시뻘건 피도 사라졌다.

    그러더니 펼쳐진 장면은 알록달록한 색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꽃밭이었다.

    꽃밭을 감싼 하늘은 구름이 아닌 하얀빛으로 가득했다.

    ‘천국이 있다면 이곳이 아닐까?’

    르나르는 꿈속에서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머리칼을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엄마…인가…?’

    르나르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그의 친모 엘리가 그토록 다정하게 그를 쓰다듬어줄 리가 없었으니.

    하지만 르나르는 가끔 엘리가 그를 그렇게 대해주는 걸 상상해보곤 했다.

    그녀의 여린 아들로,

    그녀의 어린 아들로.

    그 손길은 상상해본 것 이상으로 달콤하고 감미로웠다.

    여름날의 초콜릿이 된 기분이었다.

    그는 대책 없이 녹고 있었다.

    잠이 깨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런데 어느 순간 눈을 뜨니 눈앞에 엘로즈가 있던 것이었다.

    ‘…눈사람.’

    아니, 다시 보니 천사인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엘로…즈…?”

    르나르가 엘로즈를 불렀다.

    “나…. 좋은 꿈을 꿨어….”

    엘로즈가 르나르를 바라보며 따스하게 미소 지었다.

    르나르는 그 순간 문득 생각했다.

    그녀가 저 눈빛으로 봐주는 게 그밖에 없었으면 좋겠다고.

    다른 사람들은 저 눈을 보면 안 됐다.

    나 말고 저 눈을 본 자라면 눈알을 파버리리라.

    아주 무의식중에 하게 된 생각이었다.

    르나르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던 엘로즈의 작은 손을 붙잡았다.

    살짝 놀란 엘로즈가 흠칫 몸을 떨었다.

    “…계속 쓰다듬어줘.”

    여전히 잠에 취한 르나르가 나직이 속삭였다.

    그의 손이 엘로즈의 손을 붙잡고 움직였다.

    엘로즈의 작고 하얀 손이 르나르의 부드러운 흑발을 따라 움직였다.

    “…잠들 때까지 재워줄까요?”

    “응.”

    “알았어요. 이 손 놔주면, 그럼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 줄게요.”

    “…….”

    르나르는 잡은 엘로즈 손을 놓지 않았다.

    “…다시 재우는 수밖에 없겠네요. 자장자장.”

    노랫가락 같은 엘로즈 목소리를 따라 르나르의 눈꺼풀이 가물가물 깜빡였다.

    이내 엘로즈를 붙잡고 있던 손이 스르르 아래로 흘러내렸다.

    엘로즈가 그 손 위로 이불을 덮어주며 작은 미소를 얼굴에 그려 넣었다.

    두 사람이 꼭 붙은 다락방 온기 속으로 선연한 달빛이 스며들었다.

    계략남 르나르가 엘로즈의 몸에 집착을 시작하게 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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