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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13화 (13/100)
  • 13화

    악몽

    똑똑똑—

    다락방 문을 두드렸다.

    안에선 답이 없었다.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숲 냄새가 나는 다락방 안을 램프에서 흘러나온 온기가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불은 환한데 르나르가 보이지 않았다.

    지난 2주간, 나는 르나르에게 매일 개인 교습 비슷한 걸 해주고 있었다.

    주로 정치학에 관해서였고 부로는 고대 철학에 관해서였다.

    르나르는 보통 수업 시간 한참 전부터 이 다락방에 올라와, 예습과 복습을 하며 나를 기다리곤 했다.

    참 성실한 학생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딜 간 걸까?

    ‘램프 불도 그대로 켜놓고는.’

    고개를 기울이며 방 안을 훑다 보니, 다락방 구석 간이침대 위에 무언가 시꺼먼 것이 웅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짐승 같은 그것은 르나르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는 잠들어있었다.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책을 읽다 잠이 든 모양이었다.

    <바델라 제국의 역사와 철학> 원서가 떨어질 듯 말 듯 그의 손에 아슬아슬하게 쥐어져 있는 것을 보면.

    그런데 르나르는 악몽을 꾸는 건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내가 그의 손의 책을 조심스럽게 빼내 침대 옆 협탁 위에 올렸다.

    가만히 르나르를 들여다봤다.

    일렁이는 램프 빛에 기대 살펴보니 요즘 르나르의 눈 아래에서 종종 목격할 수 있었던 어두운 그늘이 보였다.

    르나르는 바빠 보였다.

    정확히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 건진 알 수 없었지만, 해도 뜨기 전에 저택을 나가 수업 전에 겨우 돌아오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낮엔 그가 아예 저택에 없는 경우가 많았기에, 그와 나의 수업은 내 저녁 식사가 끝난 뒤인 꽤 늦은 시간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식사하고 올라와 다락방 문을 열면 르나르는 늘 책상에 앉아있었다.

    오늘만 빼고.

    참 성실한 학생이었다.

    그는 수업 시간 내내 집중력이 흐트러진 모습을 한 번도 안 보여주기도 했다.

    어려운 내용을 가르치면 스펀지처럼 흡수하고 이해했다.

    그러다 가끔 유난히 어려운 내용을 만나면 동공이 흔들리기도 했는데, 그 뒤엔 오히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아낸 것처럼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것이 특이했다.

    대단한 학구열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안 그래도 바쁜 와중 무리하고 있는 건 아닌 걸까?

    르나르의 눈 밑 그늘이 선명하다.

    타인의 외양 변화에 무척 둔감한 나조차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이렇게 피곤하면 배움을 잠시 쉬어도 될 텐데….’

    어쩐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내가 르나르의 눈 밑을 엄지로 닿을 듯 말 듯 쓸었다.

    그런데 악몽이 생각보다 심한 것 같았다.

    눈썹만 움찔움찔하던 그가 이내 아랫입술을 꽉 물더니, 괴롭게 앓는 소리를 냈다.

    “으으….”

    ‘설마…, 원작의 그 악몽은 아닌 거겠지…?’

    원작의 르나르는 여자주인공 캐스티나를 만나기 전까지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그 악몽은 보통 그가 남창가 마담에게 납치되었던 일이나 검투장에서 다른 검투사를 죽이던 일, 혹은 그가 다른 검투사의 칼에 찔리던 순간 등에 관한 내용이었다.

    하나같이 다시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생생했단 것이 원작의 설명이었다.

    그리고 르나르는 캐스티나를 만나고 나서야 그 악몽들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마력이 없음에도 마법약 제조에는 능통했던 캐스티나가 그에게 악몽을 꾸지 않게 해주는 마법약을 만들어줬기 때문이었다.

    사실 르나르의 악몽은 그의 마력 중 넘쳐 날뛰는 마력으로 인해 생긴 것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마법약이 효과가 있었다.

    캐스티나의 약을 주기적으로 먹으며 악몽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었던 르나르는 캐스티나에게서 그 약의 제조법을 알아내고자 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똑똑했고 어떻게 보면 영악했던 그녀는 곧 죽어도 그 약의 제조법을 르나르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캐스티나가 필요해진 르나르는 매일 약을 얻기 위해 그녀를 먹이고 입히며 돌보게 된다.

    그러다 사랑하게 됐고.

    평생 시달린 악몽을 없애준 그녀였으니.

    지금 시점의 르나르는 이미 약을 먹고 있었어야 맞았다.

    나야, 나는 찾지 못한 캐스티나여도 르나르는 당연히 만났을 것으로 생각했고.

    ‘근데 왜…, 여전히 악몽을 꾸는 것 같은 거지…? 원작의 그 악몽은 아닌 건가….’

    혼란스러워하던 내가 르나르의 눈썹 사이를 조심스럽게 눌렀다.

    한껏 찡그린 탓에 그의 미간에 생긴 주름이 아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르나르가 눈을 떴다.

    놀란 내가 멈칫한 순간, 그가 내가 뻗은 오른손을 빠르게 낚아챘다.

    동시에 그의 다른 손이 내 목을 움켜쥐었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그가 내 위로 무게를 실었다.

    나는 순식간에 한 손이 머리 위로 포박당한 채 그의 아래 깔린 형상이 됐다.

    내 목을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수…, 숨이 막혔다.

    “나…, 나예…요, 르나르…! 르나… 르…? 허억….”

    조여진 목구멍 사이로 거친 쇳소리가 났다.

    나를 내려보는 적갈색 눈동자가 탁했다.

    그는 아직 악몽에서 덜 깨어난 것처럼 보였다.

    “나…, 나라고, 이 멍청아…!”

    젖 먹던 힘까지 끌어모아 소리치자 르나르의 적갈색 눈동자에 초점이 생기기 시작했다.

    “……. 아…?”

    그가 외마디 의문문을 내뱉고는 내게서 떨어졌다.

    내 위에서 르나르가 사라지고도 나는 한동안 기침을 켁켁 뱉으며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짐승인 줄 알았다.

    목덜미를 뜯기는 줄만 알았다.

    마력이 깨어나고부터는 르나르의 눈빛에 살기가 들기만 해도 다리에 힘을 풀어버렸다던 원작의 몇몇 검투사들 묘사를 나는 이제야 이해할 수가 있었다.

    만들어내는 얼굴을 벗은 날 것 그대로의 르나르는…

    정말로 많이 무서웠다.

    “죄송합니다, 대공녀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악몽을 꿔서….”

    르나르가 정신을 차리려는 듯 내 목을 비틀었던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쓸었다.

    나는 조금 진정한 뒤였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여전히 침대에 누운 채였다.

    그런데 그런 내 시야로 르나르의 얼굴이 나타났다.

    “일으켜드리겠습니다.”

    그가 내 허리 아래로 손을 넣은 뒤 다른 손으로 뒷목을 받치고 날 일으켰다.

    마치 아기를 다루는 듯한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나는 사자 굴에 들어갔다 나온 뒤 다시 마주친 사자를 보는 심정으로 멍하니 봤다.

    르나르가 미안한 얼굴을 그려넣고는 그런 내 볼을 쓸었다.

    “죄송합니다. 많이 놀라셨죠? 잠들었을 때 자객들의 습격이 많았던지라…. 누군지 모르겠으니 몸이 먼저 반응을….”

    르나르가 그 뒤로도 한동안 내 볼을 따듯하게 어루만졌을 때야 나는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마주한 르나르는 아까 잠들어있었을 때보다 훨씬 피곤해 보였다.

    램프 빛을 등지고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르나르의 눈 밑 그늘이 아까보다도 더 시퍼렇게 도드라져 보였다.

    “악몽을…, 자주 꾸시나요…?”

    여전히 완벽하게 정신을 차리진 못했던 내가 멍하니 물었다.

    “가끔…, 꿉니다.”

    르나르가 답했다.

    가끔….

    꾼다고…?

    진짜?

    정말?

    ‘설마…, 캐스티나의 약이 잘못된 건 아니겠지…?’

    내가 고민하는데 르나르가 내 쪽으로 허리를 숙였다.

    그는 그가 쥐었던 내 목을 조심스레 살피기 시작했다.

    “아깐 정말 죄송했습니다. 목은 괜찮으세요? 꽤 꽉 쥐었던 것 같은데….”

    르나르의 손가락이 일정 경로를 따라 움직였다.

    마치 눈에 보이는 경로를 따라 움직이는 것을 보니, 자국이 잘 남는 엘로즈의 피부에 손자국이 생긴 모양이었다.

    다소 심각한 눈빛으로 그 자국을 살피던 르나르의 미간에 또다시 깊은 주름이 생겼다.

    나는 다시 검지를 들어 그의 미간 주름을 꾹 눌러 펴줬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는데, 내 돌발행동에 놀란 르나르가 눈을 크게 뜨고 멀뚱멀뚱 날 봤다.

    *

    “더글라스, 저택에 리베로 차 있어요?”

    르나르의 이어지는 걱정을 뒤로 하고 다락방에서 나온 나는, 곧바로 주방으로 향했다.

    때마침 주방에는 내일 조식에 관해 요리사와 이야기를 나누던 더글라스가 있었다.

    차를 찾는 나를 보며 더글라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리베로 차는 갑자기 왜 찾으십니까, 대공녀님? 혹시 잠이 안 오세요?”

    리베로 차가 숙면에 좋은 걸 더글라스도 아는 모양이었다.

    그는 내게 질문하는 동시에 찻물을 담은 주전자를 불 위에 올렸다.

    찻물을 데우는 화롯불이 소리 없이 주방을 빛으로 물들였다.

    리베로 차가 숙면에 좋은 차이기 때문에 내가 찾고 있는 건 맞았다.

    하지만 내가 잠이 안 오기 때문은 아니었다.

    “저 말고 황자님 때문에요. 황자님께서 악몽을 꾸시는 것 같아서요.”

    멀어지는 주방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내가 말했다.

    그러자 더글라스가 아아,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연한 반응이었다.

    ‘설마 그게…, 끝이야…?’

    고개를 기울이며 더글라스를 보니, 뭐가 문제냐는 듯 더글라스가 멀뚱멀뚱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조금 화가 나려고 했다.

    “혹시 반응이 그게 다예요?”

    “네?”

    “반응이 그게 다냐고요.”

    더글라스는 르나르의 최측근인데.

    르나르가 10년도 넘는 시간 동안 악몽에 시달려온 걸 잘 알 텐데.

    그 고통을 아는 사람이 이렇게 무심해도 되는 걸까?

    한동안 안 꾸던 악몽을 다시 꾸는 것일 텐데?

    르나르와 가장 가까운 사이인 그가 르나르를 좀 더 걱정해주기를, 나는 바라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돌보기 시작한 길고양이에 대한 나의 과민반응일지는 모르겠지만.

    “반응이…. 어…, 어때야 맞는 거죠? 어차피 오늘이 아니더라도 황자님께선 매일…, 악몽을 꾸셔서….”

    그런데 더글라스의 다음 말이 나를 경악하게 했다.

    매일?

    “매일…이요…?”

    설마,

    캐스티나를 만나지 못한 것일까?

    정말?

    르나르가 악몽을 꾸는 게 ‘가끔’이라고 말했기에 캐스티나를 만나긴 한 줄로만 알았었다.

    원작이 얼마나 꼬여버린 걸까.

    르나르가 캐스티나를 만나지 못했다면….

    르나르는 앞으로의 평생을 그 끔찍한 악몽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걸까?

    삐이이익-!

    그 순간 끓는점에 도달한 찻물이 새하얀 증기를 주전자 밖으로 내뿜었다.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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