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유혹하는 눈빛
귓속에 바람을 불어넣는 그가 의아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르나르가 날 따라 고개를 기울이며 싱긋 웃었다.
그러곤 허리를 숙였다.
내 입술까지 닿을 듯 다가온 그의 입술이 경로를 틀어 다시 내 귓가로 향했다.
입술이 아까보다도 귓바퀴에 가까웠다.
뜨거운 숨결과 함께 나직한 목소리가 와닿았다.
“사람들이 있을 땐 말을 놓아도 되는 거죠? 다들 날 진짜 전하로 알고 있어서.”
르나르가 속삭이며 두 번 고갯짓했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가 보니 짐을 옮기는 짐꾼들과 내 뒤에 선 하녀들이 보였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니 르나르가 허리를 세웠다.
그 과정에서 르나르의 볼과 내 볼이 맞닿았다.
르나르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나랑 아침 먹자.”
하대 허락 이후 그가 내놓은 첫 번째 말이었다.
“대공녀는 해산물 좋아해?”
“샐러드 소스는 뭘 좋아해?”
“고래 스테이크도 먹어본 적 있어?”
같이 식사하는 내내 르나르는 내게 그런 시시콜콜한 질문들을 던져댔다.
“육지 고기 중엔 뭘 좋아해?”
“송아지 구이도 먹어본 적 있어?”
“어, 나도 송아지 구이 좋아하는데. 우린 소울메이트인가 보다. 어린 양고기는?”
원작을 읽으며 나는 르나르가 말이 많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내 앞의 르나르는, 대화가 끊길 것 같으면 곧바로 내게 다시 말을 걸어왔다.
사실 좋긴 했다.
덕분에 분위기가 어색해질 일이 없었으니.
그리고 나는 그저 그의 질문에 답만 하면 됐으니 편했다.
그리고 이런 의미 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게 나는 조금….
‘재밌다.’
사실 그랬다.
친구와의 수다라고 해야 할까?
그런 걸 즐길 기회가 현실 세계에서도 엘로즈로 자라면서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게다가 르나르는 편했다.
어렸을 적 만난 적이 있기 때문일 몰랐다.
“혹시 별 보는 것 좋아해?”
아난셀 백작이 다른 대륙에서 들여왔다는 관상용 불가사리에 관해 이야기하던 르나르가 갑자기 별에 관해 물었다.
그와 나의 대화는 몇 가지 주제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내용에 관해 이루어지는 중이었다.
“별이요?”
사실 현실 세계에 살면서도 엘로즈로 살면서도 별 보는 것에 흥미를 느껴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어제 본 별은 참 예뻤다.
그걸 보고 나니, 나는 그저 별이 얼마나 예쁜지 몰라 별 보는 걸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마치 현실 세계에선 꽃을 좋아하지 않았던 내가 이 세계에선 꽃을 좋아하게 된 것처럼.
“아마도요?”
“그래? 다행이다. 그럼 아까 짐꾼들이 옮기던 짐들이 뭔지 혹시 알아?”
“아뇨, 뭔데요?”
“뭘까?”
“뭔데요?”
“오늘 밤에. 너랑 내가 할 거?”
르나르가 대뜸 손깍지를 끼고 그 위에 얼굴을 괬다.
유혹하는 눈빛이었다.
식당 창문을 통과한 아침 햇살에 그의 적갈색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
똑똑—
책을 읽다 선잠이 들었는데,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누구세요?”
“대공녀님?”
문밖에서 들리는 건 속삭이는 르나르의 목소리.
‘르나르…? 르나르가 왜….’
나는 오늘 밤 함께 별을 보자는 그의 제안을 이미 거절한 뒤였다.
그가 오늘 함께 별을 보자고 한 건 오늘 밤 유성우(流星雨)가 내리기 때문이었다.
유성우.
유성, 즉, 별똥별이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현상.
이 세계에선 마법사들의 마력과 공명하는 행성인 이리아네크가 지구에 다가올 때 유성우가 내린다고 했다.
아침에 저택에 들어온 커다란 짐들은 이리아네크 행성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는 천체 망원경과 그에 딸린 물건들이라고 했고.
르나르는 유성우가 몇백 년에 한 번밖에 볼 수 없는 현상이라고 했다.
때문에 그 신비롭고 아름다울 광경을 함께 보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래서 르나르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런 낭만적인 장면을 굳이 친구끼리 함께 봐야 하나 해서.
그리고 내게 그 제안을 하는 르나르의 눈빛이 왜인지 모르게 덫을 놓은 사냥꾼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사냥꾼이 지금 내 방 앞에 와있었다.
망설이던 내가 방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그런데 내 눈에 보이는 건 르나르의 얼굴이 아니었다.
‘달콤한 냄새.’
커다란 사기 접시를 하나를 가득 채운, 산처럼 높게 쌓인 저건 분명….
‘쿠키…?’
멍하니 별 모양 쿠키 더미를 보고 있으려니 별안간 르나르가 그 옆으로 고개를 쏙하고 내밀었다.
“대공녀님?”
한껏 눈꼬리를 내린 그가 나지막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날 불렀다.
“나랑 별 보러 가요.”
만약 그냥 별만 보자고 했으면 나는 르나르를 따라나서지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영리했다.
달콤한 쿠키를 뇌물로 바치며 내게 ‘부탁’이란 것을 한 것이었다.
올렌도의 천문학 숙제를 도와달라고.
“사실 같이 별을 보자는 건 변명이었습니다. 이리아네크 행성의 궤도를 계산해야 하는데, 저한테는 좀 어려워서요…. 아카데미를 차석으로 졸업하신 대공녀님이라면 쉽게 해결하실 것 같았습니다.”
둘만 남게 되면 르나르는 다시 내게 존댓말을 썼다.
그런데 내가 차석으로 졸업한 건 어떻게 알아낸 거지?
생각보다 나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는 르나르였다.
공부를 도와달라고 말한 게 부끄러운 듯 르나르가 뒤통수를 살살 쓸며 해사하게 웃었다.
그 모습이 꼭 소동물인 척하는 육식동물 같았다.
“대공녀님께선 알고 계시죠?”
만약 올렌도의 숙제를 대신해야 하는 것이 정말 맞다면 르나르는 사람 하나는 제대로 찾은 것이었다.
나는 코웰 가문에서 초빙한 아카데미 교수에게 천문학 교습을 따로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제국에서 유일할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내겐 궁금한 점이 하나 있었는데….
“왜 황자님 숙제를 르나르 경이 대신하는 거죠?”
기울어지는 내 고개를, 르나르가 검지를 들어 내 볼을 콕 찍으며 바로 세웠다.
그러곤 내 볼을 찍은 게 재밌는 듯 웃었다.
“못된 학생이거든요, 우리 황자님은. 호위 때문에 황자님 수업을 같이 들을 때가 많았는데, 언젠가부터 숙제를 제게 시키시더라고요. 이래서 권력이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르나르의 마지막 말에 어쩐지 뼈가 있었다.
그런데 르나르와 상관없이 난 경악하게 됐다.
‘어떻게 올렌도는 수업 숙제에 대리를 쓸 생각을 했지?’
내 진짜 약혼자인 올렌도에게 놀란 것이었다.
‘르나르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으니 아무리 황태자 책봉 전이라도 올렌도가 제국의 유일한 황위 계승권자인 건데….’
제국의 장래가 암담했다.
물론 올렌도의 숙제를 대신 하는 것은 르나르에겐 좋은 일일지도 몰랐다.
원작에서도 그는 늘 배움에 목말라했으니.
친아버지가 제국의 황제고 친어머니가 다른 제국의 공녀임에도, 정작 그는 제대로 된 예절 교육조차 받지 못한 것이 현실이었다.
그런데 올렌도의 숙제를 대신 하다 보면 어쨌든 또 얻는 지식이 생길 테니.
“이 쿠키 말이에요, 제가 직접 구웠어요. 대공녀님께 드리려고요.”
르나르가 믿지 못할 말을 했다.
“그게…, 정말이에요…?”
왜 굳이 직접.
“그래야 대공녀님께서 좋아해 주실 것 같았거든요.”
어린 하녀들의 배는 될 긴 다리로 부엌을 휘젓고 다녔을 르나르를 상상하니 쿡 웃음이 났다.
그가 황자인 줄 아는 사용인들은 또 어찌나 쩔쩔맸을지….
“어? 웃었다.”
“아니에요.”
“아닌데? 웃었는데?”
“잘 모르겠는데?”
“생각보다 뻔뻔하시네요. 그래도 전 웃음값을 받아야겠으니 도와주실 거죠? 쿠키는 덤으로 드릴게요.”
르나르는 내 손을 꼭 쥐고 쿠키 접시를 잡게 했다.
그러곤 쿠키 접시를 잡은 내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놔줘요.”
“도와주실 거죠?”
“이 손은 왜 잡고 있는 거예요?”
“대공녀님 도망칠까 봐서요. 진짜 안 도와주실 건 아닌 거죠?”
나보다 두 배는 더 뻔뻔한 르나르는 결국 내게 백기를 받아냈다.
정말 이해가 안 가는 이론이 있어 내가 필요하다고 하니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르나르가 영리하다고 한 것이었다.
정말 그 이론을 이해해야 했다면 나로 인해 지식을 늘릴 수 있으니 영리했고, 만약 그게 변명이었다면 어쨌든 그 변명을 통해 결국 나와 유성우를 보게 됐으니 영리했다.
나와 유성우를 보는 게 그에게 무슨 의미가 되는 건진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르나르만 이득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그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은, 그에게 빚을 지운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기에.
언젠간 내가 그에게 베푼 친절을 어떤 형태로든 써먹을 일이 생길 것이었다.
“대공녀님, 진짜 똑똑하신 것 같아요. 여기서 어떻게 이런 공식이 나오죠?”
숲 냄새가 여전히 남아있는 목조 다락방.
그곳에서 같이 계산하고, 망원경을 살피며, 나와 르나르는 올렌도의 숙제를 함께 해갔다.
르나르는 연이어 날 추켜올렸다.
그의 아부가 무안해 장난으로 노려보니 잠깐 멍해졌던 르나르가 싱긋 웃었다.
르나르는 학구열이 뛰어난 학생이었다.
내가 그에게 아카데미에서 배운 고급 이론을 가르쳐주면, 그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수식을 따라 적었다.
가끔 색기를 잔뜩 발산하는 흐드러진 눈웃음 지을 때와는 달리, 이럴 때의 르나르는 정말 아이 같았다.
그 모습에 신이나, 나 또한 나도 모르게 그에게 더 많은 것을 가르쳤다.
올렌도의 숙제에 필요하지 않을 내용까지.
그러면 르나르는 더욱 들떠 또 다른 지식들을 알고 싶어 했다.
결국 나는 시간을 따로 내, 그에게 개인 교습 비슷한 것을 해주기로 했다.
비단 천문학뿐만 아니라 그가 알고 싶어 하는 심화 학문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배움을 놓고 르나르가 올렌도를 얼마나 질투했는지 원작을 통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런 르나르를 무턱대고 거절할 수가 없었다.
당분간 선생님이 되어줄 것을 약속하니 르나르는 마치 산타를 만난 아이처럼 기뻐했다.
그때,
“대공녀님! 저기 보세요!”
유성우가 내렸다.
커다란 다락방의 창문을 꼬리가 긴 별들이 가득 수놓고 있었다.
새파란 밤하늘.
반짝이는 별빛.
가슴 한구석이 새싹이 솟아오르는 것처럼 벅차올랐다.
그때, 르나르가 조용히 내 손을 잡았다.
“저 말고 별 보셔야죠. 몇백 년에 한 번밖에 볼 수 없는 장관인데.”
내가 그를 흘긋 보자 르나르가 창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그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던 내가 시선을 별 쪽으로 돌렸다.
“정말 장관이고…, 절경이네요….”
달콤한 그 목소리에 다시 고개를 돌리고 보니 별이 아닌 날 보는 르나르가 보였다.
때마침 유난히 빛나는 별 하나가 눈부신 흔적을 남기며 창문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렀다.
아름답고 환상적인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