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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11화 (11/100)
  • 11화

    검은 고양이

    ‘검은 고양이.’

    나는 그 순간의 르나르를 그렇게 느꼈다.

    ‘고양이. 내가 현실 세계에서 돌보던 길고양이들.’

    그 고양이들이 가끔 내 발목에 머리를 비빌 때와 지금 르나르의 머리칼이 꼭 같은 느낌이었다.

    “저기….”

    “잠시만요. 잠시만 이러고 있을게요.”

    “…….”

    “좋네요. 누군가에게 이렇게 기댈 수 있다는 건.”

    안쓰러운 존재가 내게 기대는 것.

    그것이 가진 힘은 강했다.

    나는 르나르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그러게. 왜 예전 기억은 꺼내서….’

    원작에서도 검투장 시절의 기억은 최대한 잊고 살려 했던 르나르였다.

    그런 르나르를 떠올리며, 내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그냥 복수를 그만두면 안 되나. 꺼내기 싫은 기억을 억지로 꺼내고… 하기 싫은 스킨십을 이렇게 억지로 하면서까지….’

    그리고 그 생각을 하게 되자 그와 나의 몸이 닿아있단 사실이 문득 인지됐다.

    이것도 지금 싫은 걸 억지로 참아내고 있는 것이겠지?

    배려한 내가 그를 밀어냈다.

    밀려난 르나르가 잠시 멍한 눈으로 나를 봤다.

    그러더니 대뜸 내게 말했다.

    “친구라도 되어주세요.”

    *

    “친구요? 친구요오-?”

    르나르가 들고 있던 서류철 너머로 더글라스가 경망스럽게 반문했다.

    더글라스를 보는 르나르의 한쪽 눈썹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대체 몇 번을 더 말해줘야 해? 귀가 어떻게 된 거야? 그 귀 잘라줘?”

    “대공녀님께선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러자고. 그 답 하나 받아내자고 황자의 약혼녀를 욕심낼 순 없다, 친구로라도 남고 싶다, 별소릴 다 해야 했지만.”

    “도련님, 전투력이 많이 약해지셨네요. 벌써 목표를 하향 조정하시고.”

    안타까워하는 더글라스의 말에 르나르가 보던 서류철을 내렸다.

    르나르의 얼굴은 이제 그가 방금까지 보던 서류철에 끼인 종이들처럼 잔뜩 구겨져 있었다.

    “누가 그래? 내가 목표를 하향 조정했다고?”

    “아니십니까? 친구 하기로 하셨다면서요.”

    “더글라스, 남녀 사이에 친구가 있다고 생각해?”

    난데없는 르나르의 말에 순진한 더글라스가 눈만 멀뚱멀뚱 떴다.

    “남녀 사이에 친구가… 없습니까…?”

    “당연하지.”

    “근데 왜 친구 하자고 하셨습니까?”

    “당연히 수작이지.”

    르나르가 답답해하며 혀를 찼다.

    사실 처음부터 친구가 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첫사랑이란 그의 고백에 엘로즈가 침묵을 지켰을 때, 기댄 그를 밀어냈을 때, 르나르는 직감할 수 있었다.

    이 여자는 그와 연인이 될 생각이 없는 것이라고.

    르나르는 그런 엘로즈가 얄미웠다.

    낮에 느꼈던 신경이 거슬리던 느낌도 이젠 정확히 명명할 수 있었다.

    배신감.

    그것은 배신감이었다.

    ‘내가 예전에 목숨도 구해줬었는데.’

    목숨을 구해준 사실 하나로 사랑을 기대해선 안 됐던 걸까?

    게다가 여자들은 첫사랑이란 고백에 약하다던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얼음을 연상시키는 색으로 이루어진 그의 공녀님은 아닌 모양이었다.

    검투장 시절 얘기까지 꺼내 고백을 거절하지 못하게 막아야 했던 건 르나르에겐 치욕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 다짐하게 됐다.

    엘로즈를 꼬시고 말겠다고.

    친구로 지내며 정신없이 잘해줘, 늘 붙어있어, 그녀가 그에게 정신없이 빠지게 만들겠다고.

    “근데 이 종이들은 왜 이렇게 구겨져 있어? 일 많이 시킨다고 시위라도 하는 거야, 뭐야?”

    르나르가 클립 사이에 꾸역꾸역 머리를 디민 구겨진 종이들을 펄럭대며 얼굴을 구겼다.

    더글라스가 아랫입술을 쭉 내밀었다.

    “도련님께서 불법이 판치는 거래에만 투자하시는 걸 저보고 어쩌라는 겁니까? 오늘도 그 서류 챙겨오다 저, 장례 치를 뻔했다고요!”

    더글라스가 옅게 베인 상처가 난 볼을 르나르에게 들이밀며 항의했다.

    던져진 단검에라도 스친 모양이었다.

    “그래서 월급 많이 주잖아.”

    “갑자기 죽으면 빨리 번 돈이 다 무슨 소용이랍니까?”

    “그래도 잘했네, 물건 빼앗겼으면 오늘 정말 돌아가신 할아버지 뵈러 갈 뻔했는데.”

    르나르가 집무실 구석의 나무 궤짝을 여러 개를 턱짓하며 웃었다.

    더글라스가 경악하며 손으로 제 목을 가렸다.

    사실 더글라스의 물건을 정말로 빼앗아 갈 간 큰 얼간이는 그레이시아나 제국 암시장엔 없었다.

    르나르가 기선제압을 제대로 해놓은 덕분이었다.

    기존에 그쪽을 제패하던 세력과 칼부림이 벌어졌던 어느 매서웠던 겨울.

    그날을 생각하면 더글라스는 지금도 자다가 머리털이 쭈뼛쭈뼛 서곤 했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쓰레기 같았던 눈.

    눈앞을 물들이던 시뻘건 피.

    더글라스는 그날을 그렇게 기억했다.

    ‘그리고 발 앞을 구르던 머리….’

    머리의 주인이 더글라스의 물건과 목숨을 노렸기에 벌어지게 된 싸움이었다.

    덕분에 더글라스는 그 뒤로 작은 상처는 입을지언정 그 암시장 세계에서 목숨이 위험해질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더글라스는 르나르가 그 세계에서 얼른 발을 빼길 누구보다 바라고 있었다.

    ‘이미 벌 만큼 벌어놨으면서, 왜 그만두시질 않는 건지….’

    그의 도련님은 완벽해지고 싶은 것 같았다.

    무력, 재력, 권력 측면에서 모두.

    무력 측면에서는 본인의 마력 덕에 이미 완벽했으니 재력과 권력 쪽에서만 성장하면 됐는데, 재력은 어둠의 시장을 통해 빠르게 키워나가고 있었다.

    다만 권력 쪽 발전이 역시 아직 미진했다.

    친구라니.

    ‘겨우 친구 따위가 되려고 밤 산책에 나선 것은 아니셨을 텐데….’

    때마침 일렁인 램프 불이 르나르 얼굴 위에 온기를 흩뿌렸다.

    그의 얼굴이 반짝반짝 빛나는 듯했다.

    ‘이 조각 같은 남자와 겨우 친구가 되고 싶다니.’

    코웰 가문 대공녀는 여색가인 걸까?

    더글라스가 문득 생각했다.

    “시간이 늦었습니다. 오늘은 이만 는 게 어떻겠습니까?”

    눈썹을 꾹꾹 누르는 르나르를 보며 더글라스가 제안했다.

    “아직 읽을 서류가 많아. 날 재우고 싶으면 네가 대신 읽어주든지.”

    “목숨 걸고 물건 가져왔으면 제 역할은 끝난 거 아닙니까?”

    “그건 당연히 해야 했던 일이고.”

    냉정한 르나르의 평가에 더글라스의 볼이 부풀었다.

    르나르가 입꼬리를 휘어 웃었다.

    “하지 마. 하나도 안 귀여워.”

    그런데 르나르는 피곤하긴 했다.

    최근 하는 일이 적지 않았으니.

    그는 올렌도의 호위 기사로서 이 저택이 아닌 다른 저택에서 지내고 있는 올렌도의 안위를 챙겨야 했고, 올렌도의 기사단 단장으로서, 기사들의 훈련도 맡고 있었다.

    게다가 엘로즈를 꼬시고 있었고 재산을 불리는 일까지 멈추지 않고 있었으니, 가히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르나르는 그 부족한 시간을 잠을 줄이는 것으로 메꾸고 있었다.

    그나마 자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면서.

    “그래도 그쯤하고 주무세요. 조금 자면 악몽 때문에 아예 못 주무세요.”

    더글라스가 르나르에게 말했다.

    악몽.

    르나르가 매일 밤 꾸는 악몽.

    “그 악몽은…, 대체 언제쯤 사라질까요…?”

    더글라스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뭘, 새삼.”

    피식 웃은 르나르가 읽던 페이지를 넘겼다.

    별것 아니라는 듯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악몽을 꾸는 것이 분명은 정상은 아니었다.

    제대로 된 악몽을 단 한 번이라도 꿔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특히 그 악몽을 꾸고 난 직후만큼은, 매일 악몽을 꿔야 하는 사람의 고통을 조금은 공감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것을 해결할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르나르는 그에 관해선 단념한 지 오래였다.

    악몽을 꾼다고 머리를 도끼로 쪼개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그러다 복수도 하시기 전에 쓰러지십니다.”

    “걱정 마. 조금 피곤하긴 해도 멀쩡하니까.”

    “근데 그 복수… 정말 꼭 해야만 하시는 겁니까? 저는 가끔 그 복수가 도련님께서 진짜 원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공녀님께서 도련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고 주입 시키신 것인지 모르겠다니까요.”

    “또 그 소리.”

    복수에 대한 두 사람의 대화는 항상 그런 식으로 끝이 났다.

    사실 더글라스는 그런 자신의 생각에 어느 정도 확신이 있었다.

    광기 어린 눈으로 르나르에게 복수를 자장가처럼 속삭이던 엘리 루즈벨트를, 더글라스 또한 한평생 보아오며 자라왔으니.

    하지만 어머니를 진정시키기 위해 스스로 복수를 자신의 일생 목표로 되새김질하던 르나르 또한 더글라스는 알고 있었다.

    이쯤 되었으면 복수는 르나르의 정체성이 되었을 것이었다.

    그래서 말릴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죽고 나서도 아버지에게 복수하겠단 일념으로 생을 보내고 있는 르나르를.

    “아, 그거 왔어? 황궁에서.”

    르나르가 별안간 더글라스에게 물었다.

    참으로 모호한 질문이었지만 능글맞은 것과 별개로 꽤 유능한 집사인 더글라스는 르나르의 그 말을 찰떡같이 이해했다.

    “내일 아침쯤 도착할 겁니다.”

    “잘됐네. 좋은 타이밍이야. 어차피 친구로 지내기로 했으니, 잘 이용해봐야지.”

    르나르가 그것이 내일 도착할 거란 소식이 휴식이라도 된 듯 나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서류 더미로 가득 찬 저택 집무실을 하얀 달이 비추며 웃었다.

    *

    연한 레몬색 벽지의 방 안으로 금빛 봄 햇살이 쏟아졌다.

    막 목욕을 마치고 나온 나는 반쯤 감긴 눈으로 화장대 앞에 앉았다.

    하녀들이 그런 내 머리를 부지런히 수건으로 누르고 빗질하기 시작했다.

    머리칼에 부어진 향유 향이 좋았다.

    산뜻한 노란 꽃을 떠올리게 하는 향이었다.

    숨을 마시니 향유의 노란 꽃 향이 금빛 햇살과 뒤섞인 향긋한 바람이 되어 폐부를 간질였다.

    나른해지는 날이었다.

    다른 말로 좋은 날이었다.

    마음이 편안해져 더 좋은 것 같기도 했다.

    ‘친구로 지내자고 할 줄은 몰랐는데….’

    예상치 못했지만, 르나르가 내게 원하는 관계는 그가 미르엣과 가질 수 있었을 관계 정도인 듯했다.

    원작에서 르나르는 미르엣을 통해 인맥을 넓혔으니, 아마 그걸 날 통해서 하고 싶어진 것 같았다.

    안타까운 건 내가 미르엣만큼 발이 넓지 않단 것이었지만.

    ‘난 데뷔탕트도 아직이고… 친구도 별로 없는데….’

    대공과 오빠들이 지나치게 엄격하게 내 주변 인맥을 관리했던 탓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니 르나르에게 어쩐지 미안해지던 차,

    “아…!”

    “어머, 아가씨! 괜찮으세요?! 어머, 어떡해. 죄송해요….”

    빗질하다 내 머리를 세게 잡아당긴 하녀가 사과했다.

    “아냐, 괜찮아.”

    그런데 내가 괜찮다고 하자 하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지…?’

    그 순간, 밖에서부터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옷을 입고 소음의 근원지를 찾아 나가보니 크라프트지에 쌓인 커다란 짐들이 현관을 통해 저택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호기심을 가지고 둘러보는 내 귓가에 따뜻하고 간지러운 숨이 와닿았다.

    뒤이어 귓불을 스친 촉촉한 감촉에 화들짝 놀란 내가 뒤돌아보니,

    “여기서 뭐 해?”

    물러서려는 내 손목을 아프지 않게 붙잡은 르나르가 보였다.

    그의 주변으로 봄날의 햇살이 흩뿌린 오색 빛깔이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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