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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10화 (10/100)
  • 10화

    등나무 꽃길

    “그냥. 벌써 보고 싶어서?”

    르나르가 장난스레 휜 눈으로 입술을 당겨 웃었다.

    르나르와 더글라스만 남은 응접실에 봄날의 만개한 햇살의 꽃잎 같은 반짝임이 흩뿌려졌다.

    *

    방 안을 가득 채운 하얀 달빛.

    그것을 배경으로 하늘하늘 춤추는 침대의 레이스 커튼을 고요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황자의 저택에서 보내는 첫 번째 밤이었다.

    잠들려 노력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역시 바뀐 잠자리에 곧바로 적응하긴 어려웠던 걸까?

    그때, 열린 창문 틈으로 나비 한 마리가 살랑살랑 날아들었다.

    ‘르나…르……?’

    나비를 보자마자 나는 자연스럽게 그 이름을 떠올렸다.

    ‘또 나비를 미끼로 날 낚을 생각은 아닌 건지….’

    내가 무시하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다시 눈을 뜰 때마다 나비는 점차 나와 가까운 곳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나비는 그러다 결국 내 코끝에 앉았다. 쫓아버리니 멀어졌지만, 눈을 감으면 이내 다가와 다시 내 코끝에 앉았다.

    ‘……끈질기다.’

    꼭 원작에서 읽은 누구처럼.

    작은 한숨을 내쉰 내가 결국 잠옷 드레스 위에 숄을 걸치고 창문으로 다가섰다.

    나비를 내보내기 위해 창문을 활짝 여니 가까운 벽에 기대 나를 보는 르나르가 눈에 들어왔다.

    “안녕? 안 잤어?”

    태평하게 인사를 건네는 르나르가 여유롭게 웃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뭔가 달라졌는데……. 아……!’

    르나르가 내게 말을 놓았다.

    그러고 보니 난 르나르에게 말을 놓으라고 한 적이 없었다.

    르나르를 진짜 올렌도로 생각했다면 마땅히 먼저 언급했어야만 했던 일인데.

    내 실수를 깨닫고 눈이 커지는데, 르나르가 빤한 눈빛으로 나를 봤다.

    당황해 시선을 피하니 그가 의미심장하게 웃는 것이 곁눈질로 보였다.

    ‘…뭘까, 저 웃음의 의미는.’

    너 나한테 이미 다 들켰어.

    르나르의 적갈색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어 주변을 맴돌고 있었는데 깨어계셨다니 마치 운명 같습니다. 하늘은 제 편인 걸까요?”

    팔랑팔랑 사라지는 나비를 배경으로 르나르가 능글맞게 말했다.

    다시 존댓말이었다.

    죄송하다고, 저는 지금은 자야 한다고 말하고 창문을 닫으려 했다.

    하지만 르나르가 손을 뻗어 내가 닫으려는 창문을 붙잡았다.

    “따로 긴히 드릴 말씀도 있고요.”

    진지한 얼굴이었다.

    “…여기서 말해요.”

    맑은 르나르의 적갈색 눈동자에 내 머리칼에서 반사된 새하얀 달빛이 어렸다.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말을 하다 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는 현실 세계 인터넷에서 보았던 그 문구를 오늘 누구보다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긴히 할 말이 있다는 르나르는 기어코 그 뒤로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그 얘길 들으려면 자길 따라와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 긴히 할 말이 궁금했던 나는 결국 그의 도움을 받아 창문을 넘게 됐다.

    사실 내가 넘은 건 아니었고….

    내가 알겠다고 답하자 르나르는 창틀을 뛰어넘어 훌쩍 내 방으로 들어섰다.

    그러곤 나를 번쩍 안아 다시 창틀을 넘었다.

    당황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덥석덥석 안는 건지.’

    르나르가 스킨십을 혐오하는 게 맞는지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

    르나르는 그런 나를 잔디밭에 얌전히 내려놓은 뒤 싱긋 웃었다.

    “그럼 가실까요?”

    “어딜요?”

    “밤 산책이요.”

    르나르가 산책하기 싫은 주인을 이끄는 강아지처럼 나를 저택 뒤 산책로로 이끌었다.

    산책로인 줄만 알았던 길은 알고 보니 꽤 깊은 숲길이었다.

    르나르가 함께이긴 했지만 언제 늑대가 나올지 모르는 어둠의 숲을 위험하게 헤매는 기분이었다.

    “이제 다 왔습니다. 많이 힘드셔요?”

    불만 어린 내 표정을 눈치챈 건지 르나르가 한껏 누그러뜨린 목소리로 아이 어르듯 날 살살 달랬다.

    그런데 르나르의 다 왔다는 말은 거짓은 아니었다.

    “이것 봐요, 진짜 다 왔죠?”

    커다란 전나무 하나를 돌아 펼쳐진 풍경은 별천지였다.

    아주 다른 세상이란 별천지 고유의 의미를 포함해 세상이 온통 별.

    별, 천지.

    하늘을 가득 메운 촘촘한 별들이 호수를 거울삼고 있었다.

    덕분에 내 눈 앞에 펼쳐진 장관은 하늘도 별, 땅도 별이었다.

    그 찬연한 아름다움에 심장이 아릿해지는데 르나르가 어딘가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저겁니다. 제가 보여드리고 싶었던 것.”

    그 손끝으로 고개를 돌린 내 눈이 커졌다.

    르나르가 나를 이끈 곳은 호수를 길게 둘러싼 등나무길이었다.

    걸음걸음마다 흐드러진 연보랏빛 등꽃 타래가 심장을 아프게 두드렸다.

    엘로즈로 태어나 예쁜 ‘것’, 좋은 ‘것’을 참 많이 보고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보는 건 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빛으로 하나 된 하늘과 땅을 연보라색 꽃의 무리가 가로질렀다.

    그 아래를 걷는 나는 꼭 연보라색 은하수의 일부가 된 기분이었다.

    잠시 그렇게 넋을 놓고 있으려니, 머리 위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좋아하시는 것 같아 다행이네요.”

    부정할 수 없었던 내가 날 보는 집요한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볼 주변이 화끈했던 것으로 봐 얼굴이 붉어졌을 것이 틀림없었기에.

    “원래 이 호수의 별칭은 나홀로 호수였습니다. 어두운 숲 사이에서 이 호수 혼자 고고히 빛났거든요.”

    내 얼굴을 확인한 것이 분명한 르나르가 심상히 말을 돌려줬다.

    난 그 섬세한 배려에 기꺼이 동참해주기로 했다.

    “나홀로 호수요? 그렇다기엔 이렇게 아름다운 등나무들이….”

    “대공녀님께서 오시기 직전에 심은 겁니다. 이곳의 등나무들. 등나무꽃의 꽃말이 ‘환영(歡迎)’이거든요.”

    르나르가 나와 눈을 마주치고 웃었다.

    그런 르나르의 머리칼 위로 등나무꽃의 타래를 타고 흘러내린 달빛이 쏟아졌다.

    “오늘이 가기 전에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오늘은 대공녀님께서 이 저택에서 머무르게 되신, 공식적인 첫날이니까요.”

    다시 웃은 르나르가 길 앞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직접 준비시킨 걸까? 나를 환영하기 위해?’

    그렇다면 이건… 나를 효과적으로 유혹하기 위한 수단인 걸까?’

    고마워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내 위로 흐드러진 등나무꽃은 예뻤다.

    선연한 별빛을 머금은 호수도.

    현실 세계에선 전혀 못 봤던 것들을 이곳에서 보게 된 것을 생각하니 작은 웃음이 났다.

    그런 내 웃음을 본 르나르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다 문득 진지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 아까 드리려던 말씀, 있지 않습니까? 긴히 드리고 싶다는 말.”

    “네, 말씀하세요.”

    “충격받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전 사실… 올렌도 황자 전하가 아닙니다.”

    순간 푸드덕,

    꽃 타래 사이에 몸을 숨겼던 벌새가 날아올랐다.

    나는 멀어져 가는 그 새를 바라보며 눈만 깜빡였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르나르 입에서 지금 저 얘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

    ‘갑자기 왜….’

    나에게 이런 고해성사를 하는 걸까?

    “염치없지만 죄송합니다. 저는 올렌도 황자님을 모시는 황자님의 호위기사 르나르라고 합니다. 고아라 가문도, 성도 없습니다. 황자님을 노리는 자객들에게서 황자님을 보호하기 위해 예전부터 황자님 옷을 입고 황자님인 척할 때가 잦았습니다. 그 일의 연장선 정도로 생각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황자님께서는 계속… 제가 대공녀님을 속이길 바라고 계시지만, 저는 이제 그럴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대공녀님을 속이는 게 불편한 마음이 심해지고 있거든요.”

    나를 속이는 게 마음이 불편하다고?

    원작 피셜 계략남 르나르가?

    나는 믿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믿지 않을 명확한 근거도 없었다.

    내가 그를 편히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는 오직 원작이 그를 계략남으로 칭했기 때문, 그 하나였기에.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와중 르나르가 망설이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말씀드릴 기회가 많았는데 이제야 말씀드려 죄송합니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욕심이 났습니다. 그런 저라도 용서… 해주시겠어요…?”

    르나르의 얼굴이 죄책감으로 물들었다.

    그 얼굴의 진실성을 가늠해 보는데 문득 그가 한 말을 곱씹게 됐다.

    ‘…욕심?’

    “욕심이요? 잘 이해가 안 되는데… 그게 무슨 뜻이시죠?”

    “욕심이 났습니다, 대공녀님이. 대공녀님과 함께할 수 있을 시간들이.”

    “……?”

    “대공녀님께서 제… 첫사랑이시니까요.”

    화아아아—

    순간 호수 끝에서 불어온 봄바람이 등꽃 향을 머금고 르나르와 내 사이를 가로질렀다.

    하얗고 굽이진 내 머리칼이 긴 바람을 따라 나부꼈다.

    ‘첫사랑.’

    그 단어가 주는 첫 느낌은 낯섦이었다.

    단 것 같으면서도 아무 맛이 안 나는 것도 같은 느낌.

    그 맛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내가 입속에서 그 단어를 혀로 굴리는데, 르나르의 적갈색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나를 보는 르나르의 눈길이 잠잠했다.

    ‘저게…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빛인 걸까…?’

    잘은 모르겠지만 사랑에 빠지면 얼간이처럼 변하던 소설 속 남자주인공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사실 르나르 고백의 진실성은 내게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과거의 사랑이든 현재의 사랑이든 진실이든 거짓이든 어차피 나는 그의 마음을 받아 줄 생각이 없었으니.

    ‘올렌도 황자가 아니라서 안 되겠다는 말은 안 돼. 올렌도 황자라면 더욱 안 되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난 뭐라고 저 남자를 거절해야 하는 거지…?’

    차근차근 머릿속을 정리했다.

    그때, 나를 꼼꼼히 살피던 르나르가 별안간 입을 열었다.

    “모르시겠지만.”

    “……?”

    “가출한 대공녀님을 만난 이후 전 한동안 검투장 검투사로 지냈습니다. 말이 검투사지 검투 노예나 다름없었습니다. 검투장에 던져지지 않을 땐 쇠사슬에 몸을 묶인 채, 철창 속에서 싸울 날만 기다려야 했으니까요.”

    검투장.

    원작에서 르나르의 마력이 깨어나게 된 곳이 그곳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를 살리기 위해 깨어난 마력일 터였다.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습니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알 수가 없었고, 매일 베거나 혹은 베여야만 했습니다. 몸에서 피 냄새가 진동하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말하는 르나르의 눈동자가 점차 깊이 가라앉았다.

    나는 이번엔 그가 가지고 있을 감정을 확신할 수 있었다.

    ‘고통.’

    그는 지금 잊고 싶은 기억을 억지로 떠올리고 있었다.

    아마도 내 동정심을 사기 위해.

    ‘그러지 말지… 어차피 난 당신을 좋아하게 될 일이 없을 텐데….’

    “그 무수한 날들 동안 대공녀님만을 생각했습니다. 대공녀님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살고 싶어졌으니까요.”

    르나르가 비에 젖은 한 떨기 백합처럼 아련하게 웃었다.

    마치 방금 한 말이 단 한 순간이라도 진실이었던 것처럼.

    내가 르나르를 고요히 바라봤다.

    르나르가 그런 내게 한 걸음 다가섰다.

    르나르의 흑단 같은 검은 머리칼이 내 볼을 간질였다.

    한껏 수그린 그가 내 어깨에 턱을 괬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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