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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9화 (9/100)
  • 9화

    거짓말

    “엘로즈, 여기서 뭐 해?”

    겔리온이었다.

    겔리온이 든 램프에서 흘러나온 온기 어린 불빛이 그의 조각 같은 얼굴에 짙은 음영을 그려 넣었다.

    겔리온의 겨울 하늘색 눈동자가 유독 선명하게 보인 순간이었다.

    그 차분한 눈동자가 내 얼굴을 지나 벽에 걸린 초상화로 차근차근 움직였다.

    그러다 다시 내 얼굴에 닿은 그 눈동자에 깊이가 더해진 건 나만의 착각은 아닌 거겠지?

    “옛날 꿈을 꿔서 초상화를 보러 왔어. 나 어렸을 때 참 귀여웠지?”

    겔리온의 머릿속을 읽은 것만 같았던 내가 재빨리 선수를 쳤다.

    하지만 겔리온은 그런 내 수까지 예상한 듯 말이 없었다.

    그러다 겔리온이 한동안 지킨 침묵을 깼다.

    “넌 지금도 귀여워.”

    마치 법관이 판결문을 읽는 것 같은 고저 없는 말투였다.

    하지만 그런 말투에 그의 진심이 담겨 있다는 것을 오랜 시간 그를 지켜본 나는 모를 수가 없었다.

    “가자, 재워줄게. 가는 길에 주방에 들러서 리베로 차도 타가자. 숙면에 도움이 될 거야. 허튼 생각은 말고.”

    겔리온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마지막 말엔 힘을 실었다.

    허튼 생각.

    ‘혹시 내가 이 방에서 내린 결정을 눈치챈 건지….’

    겔리온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나는 해가 뜨자마자 코웰 가문 네 남자를 불러 모았다.

    그리고 선언했다.

    “내가 황자님 저택에 갈게.”

    “뭐라고?”

    “로즈, 너 지금 무슨 잠꼬대를….”

    미르엣과 에반이 차례로 의문을 표했다.

    내가 황자의 저택에 가는 것이 가장 간단한 해결책임에도 역시 이들은 나를 보낼 생각이 전혀 없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나는 내가 직접 움직이기로 했다.

    내가 가지 않으면 레오가 위험한 상황인 것 같았는데, 이들은 레오를 넘겨줄 생각을 하면서까지 날 보낼 생각은 하지 않았으니.

    나는 레오도 코웰 가문도 보호하고 싶었다.

    그것이 내 선택으로 가능한 것이라면 더욱.

    그것이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면 더더욱.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해야 했는데, 이는 거짓말하지 않는 이상, 이들이 날 쉽게 보내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밤새 고민한 그 거짓말은 바로….

    “나 사실… 황자 전하가 마음에 들어.”

    내 벼락같은 선언을 맞게 된 대공의 집무실에 한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날 보는 커진 벽안들을 내가 차례로 마주했다.

    미르엣과 에반의 경우엔 입까지 벌리고 있었다.

    그 서릿발 날리는 분위기에 굴하지 않고, 난 준비한 내 연설을 이어갔다.

    “그래서 전하께서 어떤 사람인지 겪어보고 싶어. 결혼 전에 상대방을 겪을 기회가 온 건 참 획기적이라고 생각해. 긍정적인 의미로. 그러니까 나… 황자님 저택에 갈 수 있도록 허락해 줄래?”

    저들을 속일 얼굴을 만들어내는 건 큰 어려움이 아니었다.

    그저 평소의 나대로 무표정했으면 됐으니.

    하지만….

    “거짓말.”

    겔리온이 입을 연 순간, 나는 식은땀이 등허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겔리온. 거짓말이라니.”

    내 눈이 사르르 휘었다.

    당황해 무의식중 하게 된 행동이었다.

    그러자 겔리온이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

    나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겔리온은 날 꿰뚫어 보고 물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떠본 것이었다.

    그런데 잘 웃지 않은 내가 웃은 것이 오히려 그에게 확신을 준 듯했다.

    내가 지금 연기를 하고 있다는.

    ‘대체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는 거야. 레오 때문이야?’

    겔리온의 겨울 하늘색 눈동자가 내게 그렇게 묻는 듯했다.

    그런데 그때, 미르엣의 조용한 혼잣말이, 차분했던 겔리온의 동공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역시, 그래서… 그때 짝사랑에 관해 물어봤던 거구나…? 황자에게 첫눈에 반하게 되어서…?”

    고개를 돌리니 미르엣의 푸른 눈동자가 안개 낀 새벽하늘처럼 잔뜩 흐려져 있었다.

    무슨 소리냐고 미르엣에게 질문하려던 찰나, 떠올랐다.

    내가 미르엣에게 물었던 것이.

    그것도 하필 황궁에서 황자를 만나고 온 다음 날.

    나는 순간 ‘그래, 이거다’ 싶었다.

    “황궁에 다녀온 ‘바로’ 다음 날… 맞지?”

    일부러 시점을 강조하며 내가 미르엣에게 되물었다.

    그러자 에반이 억울한 얼굴로 울먹였다.

    “로즈, 아니라며! 첫눈에 반하지 않았다며! 그럼 그때 나한테까지… 거짓말을 한 거야?!”

    “미안해, 에반. 그땐 나도 모르게….”

    미르엣과 에반이 추궁하고 내가 변명하는 이 모양새는 누가 봐도 우리가 이전에 이 주제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음을 가늠할 수 있게 했다.

    때문에 더는 내 거짓말을 의심할 수 없게 된 겔리온이 별안간 나라 잃은 민족처럼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올렌도 놈 따위한테… 우리 로즈가 반했다고…?”

    내가 엘로즈로 태어난 뒤 누굴 좋아한 적이 없었기 때문인지 다들 충격이 큰 것 같았다.

    대공 또한 다른 세 사람과 표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

    “로, 로즈야… 로즈야….”

    대공은 내 이름을 반복해 부르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말도 붙이지 못했다.

    ‘그래도 다행이야. 다들 속아줘서.’

    현실 세계에서도 누굴 좋아해 본 적이 없던 나는, 그런 내가 저들을 속일 수 있었던 것에 그저 안도할 따름이었다.

    “날 보내줘요, 아빠. 나 황자 전하가 좋은 것 같아. 전하와 같이 지내보고 싶어.”

    대공이 이성을 되찾기 전 내가 쐐기를 박았다.

    대공의 청옥색 푸른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대공의 허락이 떨어지자 이후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체스판, 좋아하는 책, 애착 드레스 몇 벌을 챙기고 나니 내가 할 일은 끝이었다.

    나머지 짐을 챙기는 건 코웰 가문 고용인들의 몫이었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서 있었다.

    르나르가 내 손등에 입을 맞추는 일이 벌어졌던 바로 그 황자의 저택 앞에.

    저택에 도착한 나를 집사 더글라스가 맞았다.

    르나르와 저녁을 먹기 위해 방문했던 날과 똑같았다.

    더글라스는 곧바로 날 응접실에 있다는 황자에게 안내했다.

    그리고 날 맞이할 황자는 바로….

    “어서 오세요.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은실로 수 놓인 남색 제복을 입은 르나르가 의자에서 일어나 날 맞았다.

    짙은 흑발에 단정한 제복이 제법 잘 어울렸다.

    “…….”

    “…….”

    응접실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손등 입맞춤 이후 처음 보는 것이기 때문일까?

    사실 르나르와 나에겐 둘 다 목적이 있었다.

    상대방을 이용하려는 목적.

    르나르의 경우 날 통해 코웰 가문을 뒷배로 사용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나의 경우엔 여주 캐스티나를 찾기 전까지 올렌도 대신 르나르와 편하게 생활하는 것.

    우리의 차이는 그런 상대방의 흑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뿐.

    그래도 그 차이가 있기에 이 동거에서 이득을 챙길 승자가 누구일지는 비교적 명확했다.

    “오랜만이네요.”

    르나르가 입을 열었다.

    말하는 그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은방울꽃처럼 은은한 그 미소가 퍽 다정하게 보였다.

    “친절하게 맞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가볍게 묵례한 내가 르나르 앞을 떠날 준비를 했다.

    이건 예상치 못했던지 르나르의 얼굴에 일순 당황의 기색이 스쳤다.

    “자, 잠시…!”

    르나르가 날 다급하게 불렀다.

    잠시 멈칫하게 됐다.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이렇게 행동할 생각이었다.

    최소한의 배려였다.

    르나르와의 생활은 나도 원했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이용당해 줄 마음은 없었으니, 최소한 내가 그에게 넘어갔다고 착각하진 않게 해주기 위해.

    다시 생각해 보니 온실에서 그가 내 손등에 입을 맞췄을 때나 그가 날 공주님 안기로 안고 다닐 때 내 반응이 너무 물렀었다.

    르나르가 착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이미 그에게 넘어갔다고.

    나는 그저 스킨십을 싫어하면서 참는 중일 르나르가 안타까워 밀어내지 못한 것이었고, 또 그가 내게 닿는 것에 별 감흥이 없어 내버려 둔 것이었는데.

    “…오자마자 가시려는 겁니까?”

    조금 초조해진 르나르가 물었다.

    “네.”

    내 간결한 답에 르나르의 입술 새로 허탈한 웃음이 흘렀다.

    하지만 그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되셨을 텐데 차라도 한 잔….”

    “괜찮아요.”

    “그럼 쿠키라도.”

    “그것도 괜찮아요.”

    정말 괜찮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 내가 싱긋 웃었다.

    잠시 침묵하던 르나르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러자 조금 초조했던 그의 얼굴에 여유가 깃들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충분히 휴식하신 후에 저녁 식사 자리에서 뵙도록 하죠.”

    “…저녁 식사요?”

    내가 반문하자 르나르 눈이 가늘어졌다.

    이번에 정말 짜증이 난 모양이었다.

    “네, 식사요. 식사는 같이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항상… 이요…?”

    내가 정말로 의아해 물었다.

    그레이시아나 제국 황제와 황후가 황후의 살아생전 겸상하지 않았단 건 모든 제국민이 아는 사실이었다.

    때문에 나는 나와 르나르의 관계도 당연히 그런 식으로 흘러가게 될 거로 생각하고 있었다.

    ‘지난번에 같이 밥을 먹은 게 특별한 경우였고.’

    하지만 르나르는 나와 생각이 달랐는지 내 반문이 꽤 불만스럽단 표정이었다.

    “흠-흠-”

    분위기를 바꿔보고 싶었던지 응접실 한쪽 구석에 서 있던 더글라스가 괜히 헛기침했다.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르나르가 눈을 한 번 깜빡이곤 조금 어색하게 웃었다.

    “혼자 드시는 성향이시라면 이해하겠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이곳에서 지내실 때 편히 계셔야 하니까요.”

    르나르가 잘 재단된 영업용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

    “……뭔데? 갑자기 저렇게 선 긋는 건. 우리 입까지 맞춘 사이 맞아?”

    르나르가 엘로즈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다.

    더글라스가 경악했다.

    “입이요?! 두 분 벌써 입까지 맞추셨습니까?!”

    눈이 화등잔만 해진 더글라스를 보며 르나르가 피식 웃었다.

    하지만 여전히 기분은 좋지 않았다.

    코웰 공작가 고명딸 엘로즈를 꼬시는 게 쉬운 일이 될 거란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았다.

    그러니 엘로즈의 이번 거절은 작은 허들에 불과했다. 다음 경기에서 넘으면 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데도 여전히 기분이 나빴다.

    ‘…왜지?’

    무언가가 묘하게 신경을 건드는 느낌.

    르나르가 그 무엇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그때, 더글라스가 조심스럽게 르나르에게 물었다.

    “그런데 도련님, 저 혹시… 지금껏 대공녀님을 계속 ‘대공녀님’이라고 부르셨던 겁니까? 그런데도 대공녀님께서 정정해주지 않으시던가요?”

    “뭐?”

    더글라스의 말을 들은 르나르의 얼굴이 일순 굳어졌다.

    엘로즈를 존대한 것은 명백한 르나르의 실수였다.

    말은 높이더라도 호칭조차 높이면 안 됐다.

    그런데 엘로즈가 그것을 지적하지 않은 것이 더 이상했다.

    마치 그녀 또한 사실 르나르의 신분이 그녀의 신분보다 낮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혹시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내가 올렌도 황자가 아닌걸?’

    르나르의 얼굴에 잠시 핏기가 사라졌다.

    하지만 다음 순간, 르나르 오히려 얼굴에 미소를 그려 넣었다.

    ‘…역시 재밌는데? 엘로즈?’

    “더글라스, 엘로즈가 머물 방이 1층이라 그랬지?”

    “네, 맞습니다. 근데 그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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