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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8화 (8/100)

8화

초상화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황궁에서 온 전령의 얘길 들은 미르엣이 벌컥 화를 내며 얼굴을 구겼다.

“황제가 미치지 않고서야….”

어금니를 문 에반도 꽉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직 약혼도 하지 않았는데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역대 황자비들 중에서도, 약혼도 하기 전에 예비 약혼자와 같이 지내야 했던 경우는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겔리온이 날카로운 눈을 하고 전령에게 논리적으로 따졌다.

하지만 전령은 그런 코웰 형제들을 번갈아 보며 식은땀만 뻘뻘 흘릴 따름이었다.

에반이 황제를 욕한 것을 듣고도 동요하지 않는 것을 보면 전령은 전에 호수 별장에 왔던 시종장 같은 충신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전령에게 화를 내는 것은 더욱 의미 없는 일로 보였다.

‘시종장 정도의 황제 측근이면 억류시켜 놓고 협상 시도라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래저래 복잡한 심경으로 내가 대공을 봤다.

대공은 무표정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정확히 알기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분명했는데,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유난히 강해지는 대공 특유의 타인을 압도하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전령이 벌벌 떨고 있는 가장 큰 이유가 아마 대공일 것이었다.

“폐하를 만나러 가야겠다. 바로 입궁 준비를 해.”

대공이 집사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런데 그때, 달달 떨던 전령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품속에서 편지 한 통을 꺼내 대공에게 내밀었다.

겉면에 적힌 건 올렌도 황자의 이름.

대공이 차가운 시선으로 전령을 훑었다.

전령이 움찔하는 사이 편지는 집사를 거쳐 대공의 손으로 넘어갔다.

빠르게 편지를 읽는 대공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

“이거 너무 쉬운데?”

소파에 누워 영애에게서 온 답장을 읽던 올렌도가 심드렁히 말했다.

“에이, 재미없어.”

올렌도가 대충 구긴 편지를 소파 밖으로 던졌다.

그러다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잊고 있었어. 지금쯤이면 황제 폐하의 전령이 코웰 가문에 도착했겠지?”

올렌도의 시선이 곁에 선 르나르에게로 향했다.

“아마도요.”

르나르의 대답에 올렌도가 기분 좋게 웃었다.

르나르가 그런 올렌도를 유심히 살폈다.

“…뭔가 하신 겁니까?”

“응. 협박을 좀 했어.”

콧노래를 흥얼거린 올렌도가 다시 소파에 몸을 뉘었다.

맑은 봄날의 찬연한 햇살이 올렌도의 연분홍색 머리칼 위로 쏟아졌다.

“동생 덕분에 반역죄를 면하게 된 코웰 가문의 첫째 아들 말이야. 집을 나가서 매우 재미난 걸 하고 있더라고?”

“재미난 거요?”

“아마도 반역 준비? 사실 증거는 부족해. 근데 황제 폐하의 명을 따르지 않으면 증거가 부족해도 잡아들이겠다고 내가 엄포를 좀 놨지. 폐하께서 대공의 약점을 잡은 걸 나도 알고 있다고 덧붙이기도 했고. 그 약점이 뭔진 몰라도 지금쯤 대공은… 속이 꽤 쓰릴 거야, 아마? 하하.”

올렌도가 재미난 광대라도 본 듯 킬킬 웃었다.

‘이 녀석도 그 약점이 뭔진 모르는구나.’

르나르는 올렌도가 무심코 흘린 말에서 그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뭐 해? 가서 짐 쌀 준비해.”

르나르를 흘긋 돌아본 올렌도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대공과의 신경전에서 이미 승리하기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과연 대공이 순순히 엘로즈를 보내 줄까?’

르나르는 알 수 없었다.

르나르의 시선이 올렌도가 어지러이 벌여놓은 체스판 위 마주 선 폰과 비숍의 대치 상태에 머물렀다.

*

“로즈, 다과를 좀 가져다줄래? 오랜만에 네가 골라준 다과가 먹고 싶어.”

편지를 읽는 대공을 살피던 겔리온이 불현듯 내게 말했다.

아마 내가 없는 곳에서 이야기가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적당히 눈치챈 내가 알았다고 답하며 응접실 소파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나 또한 생각이 있었다.

응접실에서 나온 나는 일부러 문을 완벽하게 닫지 않았다.

작게 열린 문틈을 확인한 내가 발소리를 내며 응접실에서 멀어졌다.

그 뒤, 나는 기척을 죽이고 응접실 쪽으로 돌아갔다.

서로에게 몰두한 네 남자는 다행히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은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숨소리까지 죽이고 안을 들여다보니 두 눈을 감고 생각 중인 코웰 대공이 보였다.

다들 조용히 이야기했기 때문에, 나는 처음 한동안은 그들의 대화 내용을 전혀 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고요 속에서 한껏 집중해 귀 기울이다 보니, 언뜻언뜻 레오의 이름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조금 흥분한 미르엣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증거도 없을 테니 차라리 레오를 넘겨주면 어때요?”

‘레오를 넘겨준다고? 어디로?’

나는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게 됐다.

“아버지와 나도 그러고 싶지. 하지만 레오는 지금 거기 있어야 해. 레오만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으니.”

겔리온이었다.

그의 말은 볼륨이 작았지만, 발음이 정확했기에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 황자가 ‘그것’에 관해 알고 있다는 게 정말일까요? 설마 정확한 내용까지도요?”

에반이 대공에게 물었다.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황제가 아무리 혼자만 알고 있겠다고 했다지만 그 영악한 황제를 믿어도 될까요? 만약 황자도 ‘그것’에 관해 알고 있다면 황자의 요구도 마냥 무시할 순 없어요.”

그런데 그때, 대공이 손을 들어 에반의 말을 멈추게 했다.

대공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를 보던 나의 시선과 그의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에반의 말에 집중한 내가 무의식중에 응접실 문에 가까이 다가섰는데, 대공이 그 기척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얘기 끝났어? 다과를 가지러 가는 길에 갑자기 셔벗이 먹고 싶어져서 말이야. 안나에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할까 하는데 혹시 나 말고 먹을 사람?”

내가 태연한 척 셔벗을 찾으며 응접실로 들어서자 오빠들이 매우 당황한 얼굴을 했다.

오빠들이 이 정도까지 당황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분명 무언가 꺼림칙한 비밀이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것.

‘에반이 말한 ‘그것’은 약점일까? 황제가 알고 있어 코웰 가문이 황제를 건드릴 수 없게 만든다는 바로 그 약점.’

한밤중 아무도 없는 레오의 침실에 몰래 들어와 벽에 걸린 가족 초상화를 바라보며 내가 생각했다.

금발에 벽안을 가진 다섯 남자 사이에서 혼자 다른 색을 가진 내가 이질적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그 이질감을 희석할 수 있을 정도로 날 둘러싼 다섯 남자의 미소는 환하고 따듯했다.

그 초상화는 레오가 그의 열다섯 살 생일 선물로 원했던 것이었다.

「아버지, 저 생일 선물로 가족 초상화가 가지고 싶어요. 다 그려지면 제 방에 걸어 둘래요!」

당시 엘로즈에 빙의된 지 5년밖에 안 됐던 나는 그런 레오를 이해할 수 없었다.

‘…유치해.’

난 생각했었다.

매일 보는 가족 얼굴을 왜 또 초상화로 그려 벽에 걸어 두고 싶다는 걸까?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내 생각은 현실 세계 영향이 컸다.

가질 수 없는 가족사진이란 것을 유치한 것으로 정의 내려야 했던 나의 그 세계.

하지만 레오의 등쌀에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던 그 날의 기억은 분명 따스했다.

「내가 로즈 옆에 앉을 거야, 평생 남을 그림인데!」

「그게 무슨 소리야, 대체! 오늘 내 생일인 걸 잊은 거야?! 내가 이 초상화를 그리자고 했다고!」

「그러지 말고 로즈를 앞에 앉히는 건 어떨까? 공평하게.」

결국 초상화 구도는 대공이 내 옆에 앉은 채 오빠들이 내 뒤에 도열 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그림만 보고 있으면 레오의 생일 선물인지 전혀 모를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초상화 속 레오의 표정은 불퉁했는데, 그러면서도 내 뒤에 딱 붙어있는 모습이 귀여웠다.

코끝이 어쩐지 시큰해졌다.

창틀을 넘어 불어온 봄바람 때문인 듯했다.

「차라리 레오를 넘겨주면 어때요?」

오늘 낮, 미르엣이 대공에게 한 말이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젓게 됐다.

‘…그건 안 돼.’

「만약 황자도 ‘그것’에 관해 알고 있다면….」

에반이 말한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코웰 가문의 약점.

이쯤 되니 그 약점이 뭔지 대공과 오빠들에게 직접 물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말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오늘 낮만 해도 내가 없는 자리에서 그 얘길 하고 싶어 했으니.

‘대체 왜 그렇게까지 숨기는 거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한 가지 더 있었다.

대공에게 협박 편지를 보내면서까지 나를 자신의 저택으로 보내기를 종용하는 올렌도.

어차피 내가 저택에 가더라도 나랑 지낼 사람은 르나르가 아니던가?

‘그는 이러나저러나 별 상관이 없을 텐데….’

근데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아무리 고민해도 생각은 자꾸 미궁 속으로만 빠져들었다.

그래도 르나르와 올렌도 중 누군가와 함께 지내야만 한다면 올렌도보단 르나르가 낫긴 했다.

둘 중 한 사람은 날 싫어하는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은 날 이용하려는 사람이었으니.

날 싫어하는 사람과 지내는 것은 퍽 힘든 일이 될 터였지만 날 이용하려는 사람은 대충 장단만 맞춰주면 오히려 생활은 편할 것이었다.

‘어차피 정말 이용당해 줄 생각은 없고. 아무도 사랑해 본 적 없는 내가 갑자기 르나르에게 푹 빠지지도 않을 테고.’

사실, 르나르의 편이 되어 그가 황제가 되는 것을 도와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보기도 했었다.

그렇게 해서 코웰 가문의 멸문을 막을 수 있다면 이쪽에도 이득이었으니.

하지만 목적을 달성한 르나르가, 원작에서 그레이시아나 제국 귀족들에게 적대감이 있던 르나르가 목적을 달성한 후 우리 가문에 어떤 태도를 보일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나는 쉬이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계략남.’

원작이 르나르를 설명했던 그 키워드도 나로 하여금 르나르를 믿지 못하게 만들었다.

모든 것을 걸고 위험한 도박을 하기에 신뢰가 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르나르는.

그런데 르나르 생각을 하니 손바닥이 다시 간지러웠다.

손끝에만 머물던 그 간지러운 감각은 르나르가 내 손등에 입을 맞춘 후부터는 거짓말처럼 손바닥까지 퍼진 상태였다.

불편하게 느낀 내가 눈살을 찌푸리고 손톱으로 손바닥을 눌렀다.

‘왜 이러는 걸까. 대체 왜 이러는 거지?’

그런데 그때, 레오의 침실 문이 열렸다.

일렁이는 온기 어린 불빛이 긴 그림자와 함께 침실 안으로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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