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략남이 훅 들어왔어-7화 (7/100)
  • 7화

    목각 인형과 여우

    “코웰 가문의 엘로즈 코웰,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와서 앉으세요.”

    르나르와 나의 식사는 내가 테이블에 앉음과 거의 동시에 시작됐다.

    음식은 나무랄 것 없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분위기였다.

    분명 할 말이 있어 부른 것일 텐데 르나르는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이어지는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연 건 결국 내 쪽이었다.

    “저… 황자 전하.”

    “네? 대공녀?”

    “오늘 식사를 함께하자고 부르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할 말이 있어 부르신 게 아니신가요?”

    내 질문에 르나르가 빙긋 웃었다.

    하지만 답해 줄 생각은 없는 듯 그는 천천히 스테이크를 썰었다.

    이후 르나르가 자로 잰 듯 일정하게 썬 스테이크가 내 앞에 놓였다.

    의아하게 보는 내게 그는 싱긋 웃을 따름이었다.

    “이곳으로 들어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내 앞에 자른 스테이크 접시를 놔주고 그의 자리로 돌아가며, 르나르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이곳으로 들어오라고요? 그게 지금 무슨 소리….”

    “제 저택에서 저와 함께 지내라는 황제 폐하의 명입니다.”

    쨍그랑—

    당황해 내가 떨어뜨린 포크가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며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이래서야 원작을 아는 게 아무 소용 없을 정도로.

    르나르의 시선이 내가 떨어뜨린 포크를 지나 내 얼굴까지 올라왔다.

    찰나였지만 꼼꼼히 살핀다는 게 느껴졌다.

    그러더니 다음 순간, 르나르는 눈꼬리를 쭉 내려 처연한 얼굴을 그려 넣었다.

    꼭 버림받기 직전의 강아지처럼.

    “싫으신… 거군요…?”

    평소와 다른 느린 어조.

    저 모성애를 자극하는 연기에 홀딱 넘어간 원작 영애들이 몇이나 될지가 새삼 궁금해졌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그래요, 싫어요.’라고 답하면….

    난 황제의 명을 거역할 수 있는 걸까…?

    내가 거절하는 상대가 진짜 황자도 아닌 상황에서…?

    내가 고민하는데, 순간, 르나르의 깍지 낀 손이 눈에 들어왔다.

    맞잡고 얽힌 손가락들 위에 자리한 건 얇고 긴 흉터들.

    그 흉터는 르나르가 납치되었을 때 생긴 것이었다.

    마력이 깨어나기도 전인 어렸을 적.

    그를 납치한 마담이 그런 상처를 남기는 걸 좋아하는 취향이었다.

    그 흉터들을 보고 있으려니 싫다는 말이 쉬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마치 진짜 황자가 아닌 르나르를 거절하는 것만 같아서.

    “음, 싫다기보단… 갑작… 스럽네요…. 아버지와 상의를 해봐야겠습니다.”

    난 결국 코웰 대공에게 공을 넘기기로 했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르나르가 눈을 가늘게 떴다.

    *

    ‘갑작스럽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눈을 가늘게 뜬 르나르가 생각했다.

    그가 아무리 친절하게 대해줘도 목각 인형처럼 무미건조한 반응만 보이는 엘로즈였다.

    엘로즈를 유혹하는 것은 수월하지 않은 일이 될 것임을 르나르는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엘로즈의 한결같이 무표정한 얼굴에 표정이랄 게 그려진 순간이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그의 손가락에 닿았을 때.

    분명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르나르가 그녀의 시선이 잠시 머문 손가락을 그녀 몰래 흘긋 봤다.

    보기 싫은 흉터들이 눈에 들어왔다.

    *

    “온실을 구경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코웰 저택으로 향할 마차가 계단 아래 서던 순간, 르나르가 내게 물었다.

    “다음에요. 오늘은 조금 피곤하네요.”

    마차에 다가선 내가 마침 마부가 내려준 발판을 딛고 마차에 오르려 했다.

    르나르가 그런 날 에스코트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굳이 그 손까지 내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에, 내가 르나르 손 위에 내 손을 올렸다.

    그런데 손끝에 이상한 감각이 느껴졌다.

    깜짝 놀란 내가 손을 뗐다.

    르나르의 손가락 흉터가 내 손끝에 닿은 것이었다.

    ‘…언제 손을 뒤집은 거지?’

    “아, 죄송합니다. 징그러우실 텐데….”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나는 정말 당황했다.

    그 상처가 어쩌다 생기게 된 건지 뻔히 아는 내가 그걸 징그럽다고 생각할 리가.

    그런데 그때, 르나르가 여전히 미련이 남은 얼굴로 내게 다시 물었다.

    “혹시 정말… 온실을 보고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모든 일은 빠르게 벌어졌다.

    내가 망설이는 순간 르나르가 눈을 휘어 웃었고, 그 눈이 그의 머리 위 달을 닮았다고 생각하던 순간, 르나르가 마차를 보내버렸다.

    온실 구경이 끝나면 다시 불러주겠단 첨언과 함께.

    그래도 르나르와 온실에 들르게 된 것이 후회스럽지는 않았다.

    황자의 저택 온실이 무척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온실은 유리돔 형태였고 손바닥 모양 담쟁이 식물들이 그 돔을 절반쯤 덮고 있었다.

    식물이 가리지 않은 부분으로는 달빛이 새어 들었다.

    이따금 보이는 별은 온실 천장에 박힌 보석 같았다.

    곳곳엔 생전 처음 보는 아름다운 꽃들이 화려하게 피어있었다.

    중앙에 자리한 분수에서는 듣기 좋은 물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 분수 주변을 가득 메우며 피어 있는 저 꽃들은 분명….

    “어…?”

    “꽃집 주인 아가씨가 그랬었죠? 파란 장미의 꽃말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고.”

    “나타샤가… 파란 장미는 없다고 했었는데…?”

    바다만큼이나 새파란 장미들이었다. 분수 너머로 파도가 넘친 듯했다.

    “하지만 그건 파란 장미를 만들어낼 수 없었을 시절의 얘기고, 파란 장미 생산법이 발견된 다음에는 꽃말이 바뀌었습니다. 기적 같은 사랑. 그리고,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

    파란 장미 한 송이를 꺾은 르나르가 내게 가까이 다가섰다.

    달고 시원한 향이 났다.

    ‘…장미 향인가?’

    아니었다.

    르나르가 한 걸음 더 다가섰을 때 난 알 수 있었다.

    그건 붉은 눈을 가진 그가 풍기는 푸른 체향이었다.

    르나르는 내 머리칼 사이에 가지고 온 꽃을 꽂아준 뒤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곤 감상하듯 나를 봤다.

    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르나르 머리 위로 쏟아지는 달빛 때문인지 그를 담은 내 시야가 조금 흔들렸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어어…? 어…!”

    꽃 속에서 튀어 오른 무언가가 내게 돌진해 놀란 내 몸이 뒤로 기울어졌다.

    자세를 바로 하려 했지만, 중력이 내 평형성보다 강한 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때, 내 허리를 감싸 일으킨 르나르가 그 허리를 일으킨 단단한 팔로 날 제 품 안에 끌어넣었다.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안도한 것도 잠시.

    코앞에 보이는 적갈색 눈동자에 나는 다시 숨을 멈추게 됐다.

    그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또다시 손끝이 간지러웠다.

    머릿속에 꿈에서 본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 르나르의 얼굴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가… 가까워….’

    진다…?

    설마?

    설마.

    ‘설마!’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피식, 르나르가 웃었다.

    내가 한껏 맞닿은 그의 입술과 내 입술 사이에 손등을 밀어 넣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잠시… 변명을 좀 하겠습니다.”

    내 입술 위의 손등을 코끝으로 툭툭 건드린 르나르가 말했다.

    “목적은, 이거였습니다.”

    그가 자유로운 손으로 내 앞머리에 붙어 있던 나뭇잎을 떼어냈다.

    순간 화르르, 얼굴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났다. 분명 내 얼굴은 붉어졌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고 계시면….”

    그런데 갑자기, 르나르의 적갈색 눈동자가 달빛을 담고 일렁였다.

    그 일렁임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내가 고개를 갸웃한 순간, 말랑하고 따뜻한 감촉이 내 손등에 와 닿았다.

    촉 하는 소리가 인지됐을 때야 나는 그의 입술이 내 손등에 닿았다 떨어졌단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내게서 한순간도 시선을 떨어뜨리지 않은 채.

    “장난치고 싶어지잖아요.”

    여전히 나와 마주 본 르나르가 눈을 휘어 웃었다.

    꼬리가 아홉 개 달린 남자의 진짜 여우짓이었다.

    *

    사그작-사그작—

    편지를 쓰는 올렌도 앞에 르나르가 말없이 섰다.

    수신인의 이름을 보니 처음 보는 여자 이름.

    또 어디서 새 여자를 찾은 모양이었다.

    이제는 익숙한 일이었기에 르나르는 무심히 편지에서 시선을 거뒀다.

    “식사 자리는 재밌었어?”

    여전히 사그작 사그작 편지를 쓰며 올렌도가 르나르에게 물었다.

    “황제 폐하의 명은 대공녀에게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반응은?”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대공 핑계를 대던 엘로즈를 떠올리며 르나르가 답했다.

    “그래? 벌써 반응이 그래서야… 대공녀를 꼬실 수 있겠어?”

    마침 편지에서 시선을 뗀 올렌도가 르나르를 봤다.

    손등 입맞춤 얘긴, 르나르는 올렌도에겐 하지 않기로 했다.

    벌이 튀어나온 것은 우연이었다.

    파란 장미를 보여주고 호감을 사고 싶어 온실로 데려간 것이었는데, 그녀에게 꽂아준 꽃 속에 벌이 있는 줄은 몰랐다.

    ‘운명인 걸까?’

    르나르가 생각했다.

    왜 생겼는지도 모를 그의 손가락 흉터에 반응하는 것을 보면 엘로즈는 더욱 그의 운명인 건지도 몰랐다.

    그에게 이용당할 운명.

    사실 꽃집에서 다가갔을 때의 마음은 반가움이었다.

    그녀는 그의 첫사랑이었으니까.

    소꿉장난을 하는 마음처럼 가볍게 좋아하게 되었고,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감정이었지만, 그래도 역시 사실이긴 했다.

    그녀가 그의 첫사랑이었던 건.

    “어이, 르나르.”

    잠깐의 르나르 상념을 올렌도가 깼다.

    “좀 더 분발해 보라고. 나… 이 연극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단 말이야.”

    “흥미요?”

    “기껏 좋아하게 된 사람이 황자가 아니었단 사실을 알면 대공녀가 얼마나 상심할까? 코웰 성을 단 여자가 실망한 얼굴을 할 게 상상이 가? 정말 재미나지 않겠어?”

    올렌도의 입가에 악마 같은 웃음이 서렸다.

    그런 올렌도에게 르나르가 지나가는 말처럼 던졌다.

    “근데 모르겠습니다. 대공녀를 꼬셔 볼 기회라도 있을지. 대공녀가 황자님 저택에서 지내는 것에 관해, 코웰 대공과 의논해 보겠다고 하더군요. 딸 바보로 유명한 코웰 대공이니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지 않을까요? 황명을 거역할 방법?”

    예상대로 마지막 말에 올렌도가 반응했다.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감히 거역하겠다고?! 황제 폐하의 명을?!”

    “사실 자주 있던 일이지 않습니까? 코웰 가문이 황명을 거역하는 건. 레오 대공자의 일이 있기 전까진 폐하의 초대조차 대공녀를 포함해 완벽하게 응한 적이 없던 가문이니까요.”

    “역시… 황실을 우습게 보는 것이겠지?”

    슬쩍 건드려주니 화르르 타올랐다.

    아득.

    올렌도가 분한 듯 이를 갈았다.

    “아버진 건방진 코웰 가문을 왜 그냥 두는 걸까? 대공의 약점도 알고 있으면서.”

    연한 하늘색 눈동자를 이글거리며 올렌도가 흘리듯 뱉었다.

    ‘약점?’

    처음 듣는 말이었다.

    흥미를 느낀 르나르가 더 얘기해보라는 듯 올렌도를 직시했다.

    하지만 올렌도의 관심은 이제 엘로즈를 코웰을 코웰 저택 밖으로 끌어내는 것에만 오직 쏠려 있었다.

    “두고 봐. 대공은 딸을 보낼 수밖에 없을 테니… 폐하가 아니어도,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올렌도의 연하늘색 눈동자가 기이한 광기로 번뜩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