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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6화 (6/100)
  • 6화

    그는 웃고 있었다

    팟—

    내가 눈을 떴다.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내 방 침대 천장.

    ‘내가….’

    잠이 들었던가?

    이상했다.

    입 안을 휘젓던 혀의 느낌이 꿈일 수 없을 정도로 생생했는데.

    하지만 정황상 꿈이 맞았다.

    황궁에서 돌아와 미열이 있어 일찍 잠자리에 든 기억이 났다.

    이마를 짚어보니 열은 내린 상태.

    그런데 이것도 사실 이상하다.

    열한 살 때 앓았던 열병 이후로, 이렇게 열이 난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열한 살 때 내가 앓았던 건 원인을 알 수 없던 열병.

    그러고 보면 얼마 전 드리엔 호수 별장에 갔을 때도 도착한 직후 열이 났었다.

    드리엔 호수 별장에 갔을 때와 오늘의 공통점이라면 르나르를 만난 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내가 무의식중에 손끝을 봤다.

    ‘르나르가 물었던 손끝.’

    열과 별개로 그 손끝엔 이따금 간지러운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이 없었기에 코웰 가문 주치의도 고개만 갸웃거릴 따름이었다.

    물끄러미 손끝을 보고 있자니 그 손끝을 물고 날 직시하던 르나르가 떠올랐다.

    흠칫—

    지난밤 꿈속의 그가 떠오른 내가 몸을 떨었다.

    ‘…왜 그런 꿈을 꾸게 된 걸까.’

    왜 갑자기.

    *

    챙-챙—

    연무장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검술 훈련에 한창인 미르엣과 에반을 구경했다.

    겔리온은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을 것이 분명해 연무장에 없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레오가 보이지 않는 건 이상했다. 연무장에서 살다시피 하는 그인데.

    레오 생각을 하다 다시 미르엣과 에반 쪽을 보다 나를 보던 에반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미르엣의 검이 에반의 검을 날려버렸다.

    “결투 중 한눈팔래?”

    엄한 목소리로 미르엣이 말했다.

    하지만 에반은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 날아간 검을 그대로 둔 채 순식간에 내 옆으로 달려와 앉았다.

    “로즈, 언제부터 와 있었어? 잠은 잘 잤어?”

    에반이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간밤의 뒤숭숭한 꿈이 조금은 잊히는 것 같았다.

    “잘 잤어. 근데 이상한 꿈을 꾸긴 했어.”

    “이상한 꿈? 무슨 꿈?”

    꿈속에서 르나르와 입을 맞췄단 얘기는… 역시 하면 안 되겠지?

    햇살을 받아 빛나는 에반의 벽안을 바라보며 다른 이상한 꿈 얘기를 지어내려는 찰나, 어느새 다가온 미르엣이 무슨 얘기 중인지 궁금하단 표정을 지었다.

    미르엣 위로 역시 쏟아진 봄볕에 그의 금발이 반짝반짝 빛났다.

    ‘…잘생겼네.’

    친동생임에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미르엣.”

    “응.”

    “미르엣은 짝사랑해 본 적 없지?”

    미르엣의 축복받은 얼굴을 보고 문득 떠오른 질문이었다.

    “없지.”

    미르엣이 심상히 대답했다.

    “진짜 없어?”

    “응.”

    “어떻게 없지?”

    “응?”

    “어떻게 짝사랑을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느냐고.”

    물론 나도 없지만.

    하지만 내가 사랑이란 감정에 무감해진 건 아마 아등바등 살아야 했던 현실 세계 상황 때문이었을 거다.

    타인의 얼굴을 기억할 수 있게 됐을 때쯤 나를 버린 친부모도 한몫했을 거고.

    그런데 제국에서 최고로 부유한 코웰 가문에서 평생 사랑만 듬뿍 받고 자란 미르엣이 짝사랑 한 번 안 해본 이유는 뭘까?

    “내가 미처 좋아하기도 전에 날 좋아해 버리니까?”

    “……아?”

    짧은 깨달음의 감탄사 뒤로 내가 입을 다물었다.

    “로즈야, 미르엣 재수 없지.”

    에반이 내게 말했다.

    끄덕끄덕—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멜론 푸딩이나 먹으러 갈까?”

    끄덕끄덕—

    내 연이은 끄덕임에 잔뜩 굳었던 얼굴을 편 에반이 벌떡 일어나 내게 손 내밀었다.

    동시에 미르엣은 한껏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로즈! 난 네 질문에 한 점 거짓 없이 정성껏 답했을 뿐이라고!”

    “어련하시겠어요, 네.”

    에반이 나 대신 대답했다.

    그런데 미르엣은 의외로 에반과 날 쉽게 보내주지 않았다.

    “그런데 로즈, 갑자기 짝사랑 얘기는 왜 물어본 거야?”

    미르엣의 표정이 미심쩍었다.

    왜냐고?

    “그냥. 갑자기 궁금해져서?”

    “그냥?”

    “응, 그냥.”

    “그냥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 말이지?”

    미르엣의 날 파악하듯 관찰했다.

    이유를 알 수 없던 난 눈만 깜빡였다.

    “로즈, 나 배고파. 우리 빨리 가자.”

    에반이 날 재촉했다.

    내가 에반과 함께 연무장을 벗어났다. 그런데 멀어지는 내게, 미르엣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로즈, 그런데 말이지! 그 갑자기 궁금해진 게 어제 황궁에 다녀오고부터는 아닌 거지?!”

    “……?”

    에이, 설마.

    내가 황자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오해한 건 아니겠지?

    “뭐라고? 방금 뭐라고 했어?”

    분명 똑똑히 들었다.

    하지만 나는 방금 내가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레오가 어딜 갔다고? 여행? 수련 여행?”

    스윽—

    놀라 벌어진 내 입으로 에반이 멜론 푸딩을 한 스푼 떠 넣었다.

    멜론 푸딩 특유의 단맛이 입 안에 퍼졌다.

    “일단 먹어. 너 이렇게 놀랄 줄 알고 단것부터 먹이려 한 거니까.”

    ‘맛있다.’

    무의식중에 내가 생각했다.

    하지만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레오는 그동안 집을 떠난 적이 없었잖아. 그런데 갑자기 수련 여행이라니? 이해할 수 없어.”

    숨기려 했지만 내 목소리에서 초조함이 묻어나왔다.

    그걸 눈치챈 건지 에반이 멜론 푸딩 또 한 스푼을 떠 내 입 안에 넣으며 내 말을 정정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건 아니야. 레오는 네가 어렸을 때도 종종 수련 여행을 떠나곤 했었어. 이번에 간 북부성도 예전에 검술 훈련을 위해 갔던 곳이고. 너도 거기 레오 만나러 갔었는데. 그땐 어려서 기억이 안 나려나?”

    생각해 보니 그랬다.

    나도 그곳에 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에반의 설명에도 나는 어쩐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혹시 레오가….’

    나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게 된 건 아닐는지.

    강해 보이지만 사실은 심성이 여린 레오였기에.

    “나 때문인 건가….”

    조그만 내 중얼거림에 세 번째 멜론 푸딩을 야심 차게 뜨던 에반이 고개를 번쩍 들고 나를 봤다.

    “너 때문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혹시 나 때문에… 내가 레오를 구하기 위해 황자와 약혼하게 된 것 때문에 레오가 죄책감을 느끼게 된 건 아닌가 해서. 레오가 황실 기사들을 죽인 건 정말… 레오 잘못이 아니었는데….”

    죽이지 않았으면 레오가 죽었을 테니.

    그리고 그 사건으로 레오를 잃었다면 나는 정말이지, 제정신일 수 없을 것이었다.

    원작을 알면서도 가족들을 못 지켜낸 꼴이 될 테니.

    그런데 그런 내 말을 들은 에반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왜 너 때문… 레오 잘못도 아니지만 왜 너 때문… 하아…. 그리고 레오가 떠난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에반이 할 말이 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이내 입을 다물었다. 본인은 할 수 없는 말이라는 듯.

    차분히 기다렸지만 에반은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제 손에 내 손을 꼭 움켜쥐고는 말했다.

    “손 펴.”

    내가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긴장하거나 기분이 좋지 않으면 나오는 버릇이었다.

    “레오 잘못이 아닌 건 알면서 왜 네 잘못도 아닌 건 모르는 거야.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속상해, 나 정말.”

    불만스럽게 미간을 찌푸린 에반이 접힌 내 손가락을 하나하나 펼쳐냈다.

    그러곤 내 손바닥을 들여다봤다.

    손바닥엔 진하게 손톱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곱게 접은 미간에 더 강한 주름을 만든 에반이 그의 검지와 중지로 내 손바닥을 문지르며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잘 들어, 로즈. 만약 레오가 죄책감을 느꼈다 하더라도 그게 네 잘못은 아닌 거야. 네가 황자와 약혼하겠다고 한 건 네 말대로 레오를 구하기 위해서였잖아. 근데 왜 레오의 죄책감이 네 탓인 것처럼 말해? 나쁜 건 황제야. 우리 그거 하나는 분명히 하자. 특히 넌 더욱 아무 잘못 없고. 잊지 마, 로즈. 넌 아무 죄가 없어.”

    단호하면서도 따뜻한 진심에 나는 아무런 사족도 붙일 수가 없었다.

    에반이 그런 날 살피며 두 눈을 접어 웃었다.

    “레오 걱정은 하지 마. 오빠들 믿지? 넌 아무 나쁜 생각 말고, 지금처럼 네 몸에 이렇게 상처만 안 내면 돼.”

    에반의 문지름이 사라진 자리엔 어느새 희미해진 자국들이 있었다.

    그걸 만족스럽게 보던 에반이 문득 고개를 들고 내게 갑자기 물었다.

    “아 참, 로즈. 근데 아까 미르엣한테 짝사랑 얘기는 왜 물어본 거야?”

    “어?”

    에반은 신경 쓰지 않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별 의미 없었어.”

    “정말?”

    “응.”

    “혹시 정말… 황궁에 다녀오고부터 궁금해진 건 아니고?”

    나왔다. 에반의 당근 잃을 것 같은 토끼 표정.

    “아니야, 그런 거.”

    “진짜 아니야?”

    “진짜.”

    “진짜?”

    “응, 진짜.”

    정말 아니라고 말해주니 잠시 고민하던 에반은 이내 밝게 웃었다.

    “그래, 네가 아니라면 뭐. 네가 나한테 거짓말할 리도 없으니까. 그럼 이 말 전해 줘도 되겠지? 아침에 황자의 전령이 다녀갔어.”

    “……뭐?”

    황자의 전령?

    “그 녀석이, 너와 저녁 식사를 하고 싶대.”

    *

    끼이이익—

    빠르게 달리던 마차가 멈췄다.

    마부가 내려준 발판 위로 내가 조심스럽게 발을 디뎠다.

    고개를 드니 날 맞이하기 위해 나와 있던 깔끔한 정장 차림의 사내가 보였다.

    ‘짙은 남색 머리에 노란색 눈동자? 설마….’

    “어서 오세요, 대공녀님. 황자님의 저택 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집사 더글라스입니다. 전하께선 이미 도착해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자신을 더글라스라고 소개한 남자가 예의 바르게 웃었다.

    원작에서 더글라스는 르나르의 외가인 플루토나 제국 루즈벨트 공작가의 집사장 손자였다.

    루즈벨트 가문의 멸문 이후 집사장은 르나르의 어머니인 엘리와 르나르, 더글라스를 데리고 달아났고, 또래인 더글라스와 르나르는 서로를 친구처럼 여기며 자라났다.

    형식적으로는 주종관계를 유지했지만.

    그런데 더글라스는 르나르가 플루토나 제국에서 그레이시아나 제국으로 넘어온 뒤엔 원작에선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런 더글라스가 이곳에 있는 게 이상했다.

    ‘역시 원작이 어딘가 꼬인 걸까?’

    그러고 보니 이 소설에 빙의된 뒤 내가 가지게 된 의문이 또 하나 있었다.

    원작에 따르면 플루토나 제국이 그레이시아나 제국의 속국이 된 건 엘로즈의 열두 살 생일 전.

    하지만 그 일은 내 열두 살 생일이 지난 후에 일어났다.

    원작의 꼬임을 처음 의심하게 된 것이 그때였다.

    어쨌든 지금 이 순간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들어가시죠.”

    집사 역할이 제법 익숙해 보이는 더글라스가 날 저택 쪽으로 이끌었다.

    코웰 대공작 저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올렌도 황자의 개인 저택.

    화려하고 웅장한 코웰 저택과 달리 이곳은 아기자기하고 고즈넉한 맛이 있는 곳이었다.

    갈색 벽돌벽과 선명한 초록색 지붕이 눈에 들어왔다. 저택을 둘러싸고는 작은 숲이 있었다.

    어둠을 깊게 머금은 그 숲과 숲 위에 걸린 손톱달이 한 폭의 수채화만 같았다.

    그 모습을 빤히 보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니 내 시선이 닿은 곳에 르나르가 있었다.

    발코니의 르나르.

    그곳에서 조금 전의 나처럼 손톱달을 바라보는 르나르.

    밤바람이 사르륵 불어 하늘빛에 물든 그의 검은 머리칼을 살며시 헝클었다.

    손끝이 간지러웠다.

    그때, 르나르가 예고 없이 고개를 돌렸다.

    피하지 못한 내 시선과 집요한 르나르 시선이 공중에서 치밀하게 얽혔다.

    멀리서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마치 내가 자길 보길 알고 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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