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략남이 훅 들어왔어-5화 (5/100)
  • 5화

    입맞춤

    나와 눈이 마주친 르나르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때, 르나르가 짚은 창문턱 위로 복사꽃 색 정수리가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원작 표지의 연분홍 머리카락?’

    나는 그제야 상황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나를 만나고 싶지 않던 올렌도가 호위기사 르나르에게 제 자리를 맡긴 채 도망친 모양이었다.

    사실 원작에서 코웰 가문이 멸문엔딩을 맞게 된 것은 엘로즈가 올렌도와의 파혼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올렌도는 엘로즈가 파혼을 거부하기 전부터 코웰 가문을 싫어했다.

    올렌도의 친모인 죽은 황후 스텔라가 코웰 형제들과 엘로즈의 친모인 제니퍼의 미혼 시절 하녀였기 때문이었다.

    원작에서도 스텔라는 황후가 된 뒤에도 제니퍼만 보면 기가 죽었기에, 그런 어머니를 안타까워했던 올렌도가 제니퍼에게 악감정을 품게 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하지만 그 악감정이 제니퍼의 새 울타리가 된 코웰 가문 멸문까지 이어진 건 역시 부당했다.

    ‘게다가 코웰 부인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데.’

    엘로즈인 나를 낳고 병을 얻었다고 했다.

    그런데 올렌도가 차후 행할 악행의 정당성을 따지는 건 지금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의 우선순위는 르나르가 위였다.

    르나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건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상황은 알겠는데, 올렌도 얼굴을 몰라야 하는 내가 올렌도를 불러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게다가 터넛과 꼭 닮은 흑발을 가진 르나르를 황자가 아니라고 의심하는 것도 어려웠다.

    그래도 황자의 방에서 황자의 옷을 입은 르나르를 만나게 된 건, 아무래도 당황스러운 일은 맞을 터였다.

    미르엣도 에반도 르나르를 황자가 아닌 황실 기사로 알고 있으니.

    “경, 왜 옷차림이… 그리고 왜 이곳에….”

    고민을 마친 내가 입을 열었다.

    충분히 자연스러운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르나르가 진실을 말하면 됐다.

    황자가 도망친 상태라고.

    그런데 다음 순간 르나르가 한 말은, 나를 무척이나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오랜만이네요. 미안합니다. 그동안 말하지 못해서.”

    “……?”

    의아해진 내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설마 자신이… 올렌도라고 지금 속이려는 걸까…?

    ‘르나르가 대체 왜… 내게 그런 거짓말을….’

    “방금 그 말씀은 경이 사실은 올렌도 황자님이었단 말씀이신 건가요?”

    내가 의심을 가득 담은 어조로 물었다.

    르나르는 그런 내 질문에 긍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정하지도 않았다.

    봄 햇살을 가득 담은 적갈색 눈동자로 그저 날 똑바로 바라볼 따름이었다.

    나야 원작을 알고 있으니 속을 리 없었지만, 보통 사람이었다면 충분히 오해하고 속을 수 있을 만한 상황이었다.

    올렌도의 외양은 철저한 비밀로 감추어져 있었고 올렌도의 머리색은 물론 눈동자 색까지 전혀 알려진 게 없었으니.

    “…좋습니다.”

    잠시 이어진 침묵의 허리를 자르며 내가 말했다.

    르나르가 거짓말하는 이유까진 알 순 없었다.

    하지만 애써, 르나르가 올렌도가 아니란 사실을, 내가 여기서 증명할 필욘 없을 거로 생각됐다.

    내 말을 들어야 할 올렌도는 어차피 지금 창문 뒤에 숨어 있었으니.

    “이미 연이 있으니 말씀드리기 더 쉽겠네요. 저는 오늘 전하께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전 황후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대공녀로서 충분히 행복한데, 황후란 무거운 직책에 얽매이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의 적당한 자유가 좋습니다. 그리고….”

    난 올렌도에게 분명하게 알려줄 작정이었다.

    나는 황후 자리에 욕심이 없음을.

    그리고….

    “언젠간 황자님께도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나타날 수 있겠죠?”

    올렌도의 사랑을 방해하지 않을 것임을.

    “그럼, 해드릴 겁니다. 파혼. 지금은 황제 폐하께서 전하와 제 약혼을 간절히 원하시니 저도 어쩔 수가 없지만, 분명 기회는 올 겁니다. 황자님과 제가 남이 될 기회.”

    어쩔 수 없는 만남을 가지게 된 오늘, 사망 플래그를 최대한 뽑아 놓을 작정이었다.

    “그럼 파혼해드리겠습니다. 전하와.”

    “파혼….”

    작게 되뇌는 르나르의 적갈색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

    “…어떻게 생각해?”

    엘로즈가 황궁을 다녀간 맑은 봄날의 이른 저녁.

    올렌도가 르나르에게 물었다.

    올렌도는 어느새 황자의 복장을 갖추고 있었다.

    곁에 선 르나르도 호위기사인 그의 의복을 되찾은 상태였다.

    “뭘 말입니까?”

    “대공녀 말이야. 파혼해 주겠다는 거. 진심인 것 같아?”

    “…글쎄요.”

    “나는 솔직히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든? 코웰 가문의 유일한 딸이 황후 자리에 욕심이 없다고? 황후 자리가 아니라, 황제 자리에 욕심이 있는 건 아니고?”

    올렌도가 건 비소에 엘로즈를 향한 불신이 드러났다.

    올렌도는 그 순간 죽은 황후 스텔라가 했던 얘길 떠올리고 있었다.

    「아가씨께서 코웰 가문의 아이가 차기 황제가 될 거란 신탁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조심하세요, 황자. 코웰 가문은 위험합니다…!」

    ‘그놈의 아가씨, 아가씨….’

    스텔라는 황후가 된 지 한참이 지나도 종종 무의식중에 제니퍼를 아가씨라 칭하곤 했다.

    그런 사소한 요소 하나하나가 올렌도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올렌도는 얼굴도 본 적 없는 코웰 부인과 말도 안 되는 신탁 얘긴 믿지 않았다.

    그럼에도, 엘로즈를 황후로 맞는 건 영 찜찜한 것이 사실이었다.

    “앞으로 어떡하실 작정이십니까? 일단 황자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행동하긴 했습니다만….”

    르나르가 슬쩍, 올렌도에게 물었다.

    눈을 감은 올렌도가 오늘 벌어진 일들을 떠올렸다.

    평민 옷을 입고 궁 밖으로 나가는 게 취미인 올렌도는 오늘도 르나르에게 자신의 옷을 입히고 궁 밖으로 빠져나갔다.

    엘로즈가 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호감 가는 여성을 만나, 되돌아오는 시간이 지체됐다.

    올렌도가 창문을 통해 방 안으로 들어서기 전 엘로즈가 도착했단 기사의 외침이 들렸을 때, 올렌도는 충동에 휩싸였다.

    어차피 보기 싫었던 엘로즈를 앞으로도 쭉 안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단 충동.

    「네가 황자인 척해.」

    그가 창문을 넘는 걸 돕던 르나르에게 대뜸 명한 올렌도는 창문턱에서 훌쩍 뛰어내려 다시 잔디밭에 내려섰다.

    르나르는 당황했다.

    하지만 문득, 그게 방법이 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미르엣에서 엘로즈로 표적을 바꾼 르나르였다.

    그가 접근해 마음을 살 표적.

    사실 엘로즈는 르나르의 첫사랑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이미 7년도 더 된 일이었고, 지금의 르나르에겐, 힘 있는 가문의 영애를 유혹해 복수의 기반을 다지는 일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런데 갑자기 엘로즈가 요양을 가버려 그녀에게 접근할 방법이 요원해진 차였다.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한 채 시간을 흘려보낸 지가 두 달.

    엘로즈가 다시 그의 앞에 나타났다.

    르나르는 이런 게 바로 운명이 아닐까 생각했다.

    물론 파혼 얘기를 듣던 순간은 당황스러웠다.

    엘로즈도 올렌도만큼 이 약혼을 원하지 않을 줄이야.

    어쩌면 패를 잘못 쥔 것인지도 몰랐다.

    약혼 전부터 파혼하고 싶어 하는 상대의 마음을 사는 것은 분명 수월할 일은 아닐 테니.

    그런데 올렌도가 사악한 미소와 함께 건넨 다음 말이 그런 르나르의 고민을 멈추게 했다.

    “네가 꼬셔볼래? 코웰 대공녀?”

    ‘…설마.’

    진심은 아니겠지.

    르나르가 생각했다.

    하지만 르나르를 빤히 보는 올렌도의 연하늘색 눈동자는 진지했다.

    “원래 알던 사이라면서. 그럼 더 쉽지 않겠어? 네가 꼬셔서 대공녀가 널 좋아하게 됐는데, 후에 네가 황자가 아닌 것을 알고도 널 좋아한다면 그땐 나도 믿을 수 있을 것 같거든. 그 여자가 황후 자리에 욕심이 없다는 거.”

    “…….”

    “혹시 그거 알아? 폐하께서 내게 명하셨어. 궁 밖, 내 저택에서 대공녀와 함께 지내라고.”

    “그게… 정말입니까…?”

    르나르의 적갈색 홍채가 달빛을 반사해 반짝 빛났다.

    “빨리 친해지라는 거지. 근데 네가 생각해도 그건 좀 위험하지 않겠어? 내가 코웰 가문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폐하는 몰라도 너는 알잖아. 내가 어느 날 욱해서 대공녀를 죽여버리기라도 하면… 폐하께서 노발대발하실걸? 그러니까 내 안전을 위해서라도, 대공녀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네가 내 역할을 하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이득이야.”

    “…….”

    “애먼 사람 죽게 할 거야?”

    르나르는 말이 없었다.

    그는 올렌도가 말한 ‘모두의 이득’에 자신의 이득도 포함되는 것 같다는 걸,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

    달이 밝았다.

    가을 장미 향이 스민 제법 선선한 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여긴 어디지. 황궁?’

    연회 중인 건지 온기 서린 빛을 달빛처럼 내뿜는 본궁이 멀찍이 보였다.

    주변을 가득 채운 건 화려한 정원의 짙은 색 장미들.

    그 장미 정원을 내가 둘러보는데,

    “대공녀님.”

    나를 부르는 달콤한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았다. 붉은색 제복을 입은 르나르가 보였다.

    ‘붉은색이 저렇게 잘 어울릴 수 있다니….’

    새삼, 내가 손에 든 장미의 다홍빛보다 르나르가 매혹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난… 왜 이 장미를 들고 있는 거지?’

    이 정원의 장미와 같은 색도 아닌데?

    “절 믿으십니까?”

    르나르가 별안간 내게 물었다.

    내 고개가 모로 기울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

    다음 순간, 르나르가 빠르지만 절제된 걸음으로 내 앞에 섰다.

    그가 내게 속삭였다.

    “못 믿어도… 지금은 참아야 해.”

    꿈속에서나 들을 것 같은 사탕 같은 목소리로.

    그러곤 내가 생각이란 것을 하기도 전,

    “……!”

    내 입술 위로 그의 입술 감촉이 느껴졌다.

    크게 놀란 내가 그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이미 내 허리를 꽉 잡은 르나르는 그런 내게 밀리지 않았다.

    입 안으로 달고 따뜻한 감각이 들어섰다.

    그 감각은 내 혀를 얽고 입천장을 훑더니, 목구멍에 닿기도 하며 내 입 안 구석구석을 탐닉해 갔다.

    몸에서 힘이 빠졌다.

    숨이 모자랐다.

    괴로워진 내가 단단한 어딘가를 정신없이 두드렸다.

    그 두드리던 곳이 르나르의 가슴께였단 사실을 나는 살짝 부은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서 떨어졌을 때가 되어서야 알 수 있었다.

    “마셔.”

    “……?”

    “숨.”

    ‘숨…….’

    어떻게 마시는 거였더라…?

    탁해진 적갈색 눈동자가 날 삼킬 듯 바라보자 머릿속이 내 하얗게 탈색됐다.

    욕정에 가득 찬 눈빛.

    부족한 산소에 금방이라도 기절해버릴 것만 같았던,

    바로 그때.

    르나르의 긴 손가락이 내 허리 옆선을 따라 움직였다.

    놀란 내가 숨을 마셨다.

    서늘한 밤공기가 파도처럼 밀려들어 와 허파를 덮쳤다. 동시에 르나르의 뜨거운 입술도 내 입술을 덮었다.

    바로 방금 숨을 쉬었음에도 나는 정신을 놓아버릴 것만 같았다. 결국 다리가 풀렸다.

    하지만 내가 주저앉으려 하니 르나르는 내 허리를 감싸고 들어 올려 날 다시 서게 했다.

    내 힘으론 거역할 수 없는 날 휘감은 단단한 팔.

    내 꼴은 덫에 걸린 짐승의 그것이었다.

    ‘이건 고문이다.’

    설탕 과자처럼 달콤한 고문.

    세상 처음 당해보는 종류의 고문에 의식이 혼미해지고 있었을 바로 그즈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