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황자의 옷을 입은
드리엔 호수 별장으로 피난 온 지 두 달.
황제는 잠잠했다.
그래서 나는 황제가 나와 황자의 약혼을 포기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황제 폐하의 명입니다. 황제 폐하의 명이란 말입니다!”
황명을 받든 시종장과 황실 기사단이 별장에 들이닥친 건, 투명한 드리엔 호수가 산들바람에 올랑거리던 어느 맑은 날의 오후였다.
황제는 그래도 황제였던지 그레이시아나 제국의 터넛 황제는 가문에서 숨기고 있던 날 기어코 찾아냈다.
황명을 강조하는 시종장에게 그를 상대하고 있던 레오가 날을 세웠다.
“이 정도면 집착 아닙니까? 로즈가 몸이 좋지 않아 당분간 요양이 필요하다고 분명 말씀드렸을 텐데요.”
산책을 위해 현관으로 향하던 나는 계단에서 멈춰 섰다.
때마침 반대편 복도에서 걸어오던 겔리온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챈 건지 자리에 우뚝 서는 게 보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황실 기사단이 무장한 상태였다.
‘하필 대공이 수도에 간 지금…?’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에 심장이 위험하게 쿵쿵 뛰는 것이 느껴졌다.
“칼을 든 당신들을 어떻게 믿고 내 동생을 내준단 말입니까?”
“지금 황제 폐하의 명을 거역하시는 겁니까?”
“그러면 황가에서는, 지금 코웰 가문을 무시하는 겁니까?”
레오의 벽안이 번쩍하자 기세등등하던 시종장이 움찔했다. 그가 움찔한 데엔 이유가 있었다.
광물이 주요 자원인 그레이시아나 제국에서, 코웰 가문은 주요 광산은 모두 소유한 부유한 가문이다.
게다가 황가 못지않은 수의 사병을 가진 개국 공신 가문이기에, 군사력 측면에서도 황실에 크게 뒤지지 않았다.
터넛 황제가 코웰 가문을 권속으로 삼고 싶어 하는 것이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는 강한 것을 좋아하기에.
게다가 터넛 황제는, 그가 황제가 되도록 과거 도움을 준 코웰 대공에게, 필요 이상으로 집착하기도 했다.
형과 사돈으로까지 엮이고 싶어… 랄까…?
대공은 그런 황제에게 학을 뗐지만, 황제가 대공의 약점을 알고 있어 함부로 건드릴 순 없다고 오빠들끼리 이야기하는 것을, 나는 몰래 들은 적이 있다.
오빠들이 엿듣는 날 눈치채고 대화를 끊어버렸기에 지금까지도 그 약점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그런데 생각에 잠겨 숙였던 고개를 들고 보니 시종장이 날 보고 있었다.
별안간 시종장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뭐지?’
내가 미간을 접으려던 찰나, 시종장이 레오를 향해 고개를 돌리곤 말했다.
“듣던 대로 코웰 가문은 막내 따님 보호가 유난하군요.”
“알면 꺼….”
“그런데 동생이 제국 황자의 약혼녀가 되는 걸 가족들이 이렇게나 막는 게 과연 정상이란 말입니까? 무슨 다른 관계들이 있는 것은 아니고요?”
“다른 관계라니?”
“저야 모르죠. 제국법에 금지된 근친상간죄에 저촉될 만한 사유라든….”
퍽—
순식간이었고 말릴 틈이 없었다.
레오의 단단한 주먹이 시종장의 왼쪽 얼굴을 강타했고, 시종장은 얕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현관 로비 구석에 그대로 꽂혔다.
가족이 모욕당하는 것을 지켜만 보는 것은 명예롭지 못한 일이었기에 기사인 레오의 반응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이상했던 건 시종장이 레오의 주먹에 맞자마자, 황실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단 사실이었다.
마치 시종장의 도발은 보지 못한 듯.
그것이 계획 일부였던 것처럼.
“얍…!”
기사 중 하나가 레오에게 달려들었다.
“레오!!!”
레오가 검을 피하고 그를 공격한 기사의 정강이를 차 넘어뜨린 뒤, 기사의 검을 뺏어 들었다.
그리고 진짜 싸움이 시작됐다.
레오와 기사들의 검이 쉴 새 없이 맞부딪쳤고, 별장 바닥은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로 붉게 물들어갔다.
죽이지 않으면 죽을 만큼 격렬한 싸움이었다.
검을 다룰 줄 아는 나는 레오를 도와야겠단 생각에 계단 아래로 뛰어 내려가려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나를 뒤에서 번쩍 들어 올린 힘이 있었다.
“겔리온, 내려놔!! 당장 안 놔?!”
나는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레오와 기사단이 뒤얽힌 아비규환의 수라장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뒷일은 레오에게 맡겨.”
겔리온은 몸부림치는 날 어깨에 들쳐 맨 뒤 빠르게 움직여 복도 가장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문을 잠갔다.
챙-챙—
잠긴 방문 너머로 검끼리 맞부딪히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으억…!”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신음도 간간이 들렸다.
“…어떡하지…? 레오가 주, 죽… 다치면 어떡해….”
레오의 죽음은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지도 않았다.
현실이 되어버릴까 봐.
“괜찮아, 레오는 강하니까. 레오는 제국에서 제일 뛰어난 검객이잖아? 그러니까… 괜찮을 거야….”
겔리온이 날 달랬다.
겔리온 말은 사실이었다.
레오는 제국에서 제일 뛰어난 검객이 맞았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바로는.’
하지만 원작을 아는 나는, 르나르 같은 소드 마스터의 존재 또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르나르가 온 것 같진 않았지만, 설마 황제에게 르나르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해서.
“…….”
나는 두려웠다.
이젠 내 진짜 가족이 된 레오를 잃을까 봐.
그런데 그때,
“터넛, 이 개자식….”
문밖의 소리에 귀 기울이던 겔리온이 별안간 황제를 욕했다.
시종장이 아닌 황제를 욕한다.
혹시 나와 같은 생각인 걸까?
그리고 그 진실을 확인할 수 있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
“어서 와요, 대공녀. 짐의 초대에 응해줘서 고맙습니다.”
황제가 나를 만나게 된 것이 기쁜 듯 해바라기 같은 웃음을 만면에 띠었다.
“제가 오지 않으면 레오를 체포하신다기에 좋지 않은 몸을 이끌고 이렇게 오게 됐습니다. 그러니 만일 제가 궁에서 쓰러지더라도, 자비로운 황제께선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의를 차리는 듯 비꼬는 듯 내가 황제에게 말했다.
별장 사건 이후, 황제는 레오를 체포하려 했다.
죄목은 반역.
레오가 황제의 기사단을 몰살한 것이, 황가의 권위에 도전하고 제국의 안보를 위협한 반역 행위란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죽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었을 정도로 기사들이 목숨을 걸고 레오에게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들 중 자신이 레오를 이길 수 있을 거로 생각했을 만한 실력자는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애초부터 죽는 것이 목표였다는 것.’
황제에 대한 충성심 때문일 수도 있었지만,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가능성이 더 컸다.
실제로 그날 죽게 된 기사 중 일부의 가족들이 빚을 청산하고 잠적했단 사실을 우리 가문에선 알게 됐다.
게다가 싸움을 틈타 사라진 시종장도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대공이 찾고 있음에도 행방이 묘연한 걸 보면 황제가 그를 숨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 황제가 반역죄를 무마해 줄 수 있다며 붙인 조건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올렌도 황자와 나의 약혼.’
황가에 대한 반역이라면서 황자와 약혼하면 없던 일로 해주겠단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를 통해 대공을 보는 것이 분명한 집착 가득한 연하늘색 눈동자만 보더라도, 나는 왜 오빠들이 황제를 미쳤다고 말하는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반역에 대한 최고 형벌은 사형.
레오에게 반역죄를 씌우면 내가 자신에게 올 것을 황제는 분명 알았을 것이었다.
실제로 난 오늘 대공과 오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홀로 황제를 만나러 온 참이었으니.
“에드워드가 그대를 어찌나 꼭꼭 숨기고 보여주지 않던지. 그 고운 얼굴 한 번 보고자 짐이 참 고생했습니다. 그럼에도 결국 만나게 되었으니, 대공녀와 황실은 운명이었던 걸까요?”
나를 보며 사근사근 건네는 황제의 눈길과 목소리가 다정했다.
속사정을 모르고 보면 참 좋은 시아버지로 보일 만한 모양새였다.
“잘 왔습니다, 대공녀. 그레시아나 제국 황실은 그대를 환영합니다. 대공녀는 아직… 황자를 실제로 만나 본 적이 없지요?”
날 뚫을 것 같은 시선.
그리고 그가 희생시킨 기사들에 대한 죄책감 따윈 전혀 없는 것 같은 시선이 역겨워 내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황제가 갑자기 웃었다.
“하하, 대공녀, 혹시 지금 황자를 만나게 될 것이 긴장된 것인가요. 귀엽네요, 귀여워. 이렇게 귀여운 에드워드의 막내딸이 짐의 며느리가 될 것이라니….”
황제가 만족스러운 듯 턱을 쓸었다.
“오늘 여기까지 온 김에 황자의 얼굴을 보고 가는 건 어떨까요? 사실, 황자에겐 미리 말해 뒀으니 부담가지지 말아요. 황자는 이제 대공녀의 것이니.”
‘…자기 아들이 내 것이라고?’
확실히 정상이 아니었다.
*
“전하, 코웰 대공녀께서 오셨습니다.”
화려한 문양이 양각된 문까지 날 안내한 시종이 무어라 속삭이자, 문 앞을 지키던 기사 중 한 명이 방 안을 향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황자의 방은 본궁과 따로 떨어진 별궁에, 그리고 그 별궁에서도 복잡한 회랑을 몇 번은 지나야 나오는 은밀한 장소에 자리해 있었다.
황자의 얼굴을 숨기기 위해 이렇게 외진 곳에 방을 둔 모양이었다.
원작에서 올렌도는 황태자로 책봉되기 전까지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황자였다.
이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전 하루건너 암살 위협에 시달려야 했던 터넛이, 아들인 올렌도는 그런 일을 겪지 않게 하려고 취한 조치였다.
터넛이 황제가 되기 위해 죽인 형제들의 가문에서 올렌도의 목숨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으니.
어린 황자는 암살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능력이 없었을 테니 꽤 괜찮은 방법이기도 했다.
‘그런데 올렌도가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과연 이런 보호가 필요할까?’
아마 아닐 것이었다.
하지만 터넛 황제는 여전히 올렌도를 숨겨 키우고 있었고, 이는 원작대로면 올렌도가 황태자로 책봉하기 전까지 이어질 것이었다.
황제가 올렌도를 굳이 숨겨 키우는 이유는 외전 2에 있다고 원작 독자 댓글에서 본 적 있으나, 외전 2를 읽기 전 이 세계로 넘어오게 된 나는, 현재 그 이유를 몰랐다.
‘…왜일까? 왜 숨겨 키우는 걸까?’
내가 고민하는데,
“들라 하라.”
안에서 올렌도의 것으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들렸다.
황궁에 오기 전, 나는 올렌도를 만나면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지 수십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했었다.
그럼에도 그 모든 대응 방안 중 사실 그 어느 것도 이것이 정답이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미래에 예정된 시나리오를 바꾸려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걸까?
끼이익—
상념과 함께 방문이 열렸다.
마른침을 절로 삼키게 됐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흑발에… 적갈색 눈동자….’
“르나… 르…?”
황자의 방엔,
황자의 옷을 입은,
르나르가 있었다.